[내글내생각] 시간을 저버린 소년  
상병 김무준   2008-11-22 11:23:27, 조회: 277, 추천:0 

한 때 인터넷에 유행했던 만화가 있다. 행복했던 연인이 자리에 앉아 함께 사진을 찍는다. 시간이 지나 둘은 이별하고, 남은 이는 떠나간 이의 사진을 찢어 반쪽을 만든다. 하지만 알고 있다. 사랑이 사라지지는 않음을. 작가는 말했다. ‘기억은 기록을 지배한다.’

매일 짤막하게 일기를 쓴다. 늦은 시간에도 일어나야만 하는 올빼미에게는 두 시간 남짓한 시간이 매일 밤 주어진다. 일찍이 일기 쓰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네모난 칸의 충효일기에 재미없는 글을 참 재미있었다-로 쓰곤 했고, 어쩌다보니 졸업할 때까지 일기를 썼다. 집에는 아직도 초등학교 육년간 써놓은 일기가 고이 모셔져있다. 어머니는 가끔 농담을 던졌다. 장가갈 때 색시에게 포장해서 보내겠다고.

세상에서 제일 깊은 바다는 우울海라고 했던가. 워낙에 감정기복이 심한지라 심심하면 바다 깊은 곳으로 잠수를 떠난다. 사유의 바다에는 수 억 가지 생물들이 떠다닌다. 개중에는 차마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놈도 있고, 잡아다가 사무실 물통에 넣고 고이 키우고 싶은 놈도 있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 미지의 생명체를 기억하고 기억해도 내가 만난 모든 녀석들을 기억 할 수는 없다.

내게는 세 권의 다이어리가 있다. 하나는 지난 구월부터 올 구월까지의 일정과 짧은 생각을 기록해놓은 관광공사용 다이어리요, 하나는 GQ 구독선물로 받은 두꺼운 다이어리다. 올해 일월부터 십이월까지 일 년 동안의 감정과 행위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스페인어 약간. 술에 대한 스크랩과 수많은 옷들. 그리고 잡념들. 명언들. 디자이너 인터뷰까지 쑤셔 넣고 나니 처음 받았을 때의 두 배정도 두께가 되어버렸다. 마지막 하나는 고등학교 일학년 때부터 써온 다이어리다. 아이디어박스라고 표현한다. 세계 각국의 신화 요약과 구상 중이던 소설의 시놉, 신문의 칼럼에서부터 화보, 08년 F/W Collection, Milan, Paris, London, New york, Seoul 까지. 두 다이어리에 잡지 일 년 치의 패션화보와 스타일 가이드가 들어있으니 심심할 때 열어보면 정말 최고다. 여담이지만 부대에서 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는 남자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가끔 게을러졌다는 생각이 들 때는 다이어리를 펼쳐본다. 몇 자 옮겨보자면, 『힘내라. 나는 나를 위해 살고 있다. Dignity 긍지를 갖자. 20대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라. 미친 듯 삽시다. 지배당해야 한다면 내가 가져버리겠어. 자신감을 갖자. 나는 누구보다 멋진 인간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나아가리라. 미치리라. 미쳐라. 자, 이제 다시 시작이다.』 같은 말들이 구석구석 놓여있다. 기록에 대해서도 몇 자 기록되어있다.

『그럼, 기억은 기록을 지배할까? 글쎄.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록을 통해 기억하는 것이 있고 기억을 통해 기록되는 것도 있으며 기록으로 기억하는 것도 분명 존재한다. 신은 인간에게 망각의 축복을 내려주었고, 인간은 망각아래 삶의 喜怒哀樂을 효과적으로 즐길 수 있었다. 기억과 기록은 상호 보완적이다. 하지만 어느 것도 서로를 지배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망각을 지배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기록을 통해 어느 정도의 망각을 수용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렇다면 지금, 기록해야할까. 기억해야할까. 답은 하나다. 내가 그 아픔과 슬픔까지 기억하고 싶고 공유하고 싶다면 그 시절의 향수를 느끼고 싶다면 기록하는 것이 맞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펜을 들어 쓰 잘데 없는 사유의 쓰레기를 써 놓는다. 그렇다. 나는 기억하려하고, 기억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사랑한 대부분의 여인을 사랑한다. 단 하나의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나는, 비록 사랑을 하고 있을지라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손에 꼽을 수 없는 여인네들을 만나왔고,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여인네들을 사랑한다. 나는 아직도 그네들을 사랑하고 있다. 그럼, 그 많은 사랑을 어떻게 확인하느냐.

일기를 쓴다. 슬픔과 아픔과 눈물을 담아 가슴을 뜯어 그 피로 글을 쓴다. 시간이 흘러 그 기록을 다시 열람했을 때 여전히 가슴이 시리도록 아프다면 나는 그 여인을 사랑하고 있다고 느낀다. 누군가에게 가슴의 두근거림이 사랑을 느끼는 방식이라면, 나는 가슴이 아림을 느껴 사랑을 확인한다. 어쩌면 떠나간 여인네의 말처럼 나는 참 슬픈 방법으로 사랑을 하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현재에 살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니라 사랑했던 순간의 기억일 뿐임을. 그래서, 적지 않은 여인네를 사랑할지라도 다시 그네들의 마음을 뒤흔든다거나, 찾아간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육십억이 넘는 세상 사람의 절반가량은 남자일 테니까. 가진 것 없는 내가 꼭 행복을 퍼줄 필요는 없을 테니까.

오늘도 마음을 열어 그녀들의 방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고,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것이면 족하다. 한 번 씩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여인 앞에서는 마음 아플 수밖에 없지만. 나는 여전히 기억 속 당신을 사랑하기에, 그 아픔마저도 사랑한다. 내 머리는 이제 열여섯 소년의 기억에서 벗어나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지만, 내 심장은 여전히 열여섯 소년의 떨림으로 남아있다. 피터팬. 내 가슴은 네버랜드에 사는 피터팬이 가져가 버렸다.

그녀들은 현재로 먼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겠지. 나의 어머니 역시 집을 떠났다. 나에게는 텅 빈 가슴과, 그 가슴에 당신들이 만들어 놓고 간 방과, 그 방에 남아있는 당신들의 그림자와, 그 슬픈 그림자와 서글프게 인사를 나누는 나와, 그 인사를 할 다이어리만이 남았다.

나는 사랑을 잃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오늘도 기억을 기록한다. 순간의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하여. 이 가슴의 떨림이 떨림이 멈추는 날까지. 기록할 것이다.




뱀발. 솨이월드 다이어리에나 올릴 만한 잡담을 늘어놓아 송구스럽기 서울역에 그지 없습니다.
뱀발 둘. 다시, 심심해 죽겠습니다.
뱀발 셋. 여전히 글 쓰는 건 어렵습니다. 하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3:58:10 

 

상병 이우중 
  글 쓰는 건 어렵지만 좋은 글 많이 보여주시는 무준님께 우선 감사를. 
싸이어리에 올릴 만한 잡담이라도 '내생각'이 오롯이 들어있는 '내글'이라면 좋지 않을까요? 허허... 

아... 주말에 뭐하죠... 정말 심심하긴 하군요... 창밖으로 남산타워가 보이는데... 나는.... 2008-11-22
11:46:16
  

 

상병 김무준 
  옥상에 올라가면 강남이 보이는데, 오늘은 나가서 수영이나 해야할까봅니다. 2008-11-22
11:49:31
  

 

병장 박장욱 
  옥상에 올라가면 옆 찌개마을만 보일뿐... 아 산도 보이는구나... 2008-11-22
12:38:28
  

 

병장 장상원 
  옥상에 올라가면 강남과 용산전자상가와 63빌딩과...등등등 이 보이는군요.. 2008-11-22
13:24:40
  

 

병장 정병훈 
  솨이월드 다이어리가 꽤나 속이 꽉 찼군요. 
심심하시면 뭐 논쟁거리라도 던져 드릴깝쇼? 
휴- 뭐 왠만한 떡밥엔 잡히지 않는다는걸 알고 있습니다. 크흐흐 

멋진 다이어리를 갖고 계신게 참 부럽군요. 저도 올 연초엔 다이어리를 사서 기록을 하자고 했지만, 다이어리 선택을 잘못하는 바람에 도로묵이 榮芽求. 이젠 좀더 크고 쓰기도 편한 그놈을 찾아야죠. 
따라하는건 아니에요. 흐흐흐 저만의 다이어리를 만들려고 항상 생각했던거니까요. 2008-11-22
13:24:41
  

 

일병 신민재 
  다이어리...기록... 
항상 시도는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저도 저만의 색깔을 가진 기록들을 해야 겠습니다.(웃음) 2008-11-22
14:03:11
  

 

병장 이동석 
  솨이월드 다이어리에나 남길글-이란 표현은 말 그대로 삼십초쯤 되는 시간에 한 두줄 찍찍-거리는 글을 지칭한겁니다. 써놓고도 막상 어폐가 있다 싶었네요. 

평생 글 써오신 선생님께서 많이 쓰고 조금 남기라는 말을 해주셨는데, 전 조금 쓰고 많이 남기는것 같아서, 막상 제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싶기도 합니다. 2008-11-22
14:50:32
 

 

병장 이동석 
  난 옥상이 없을 뿐이고, 창문을 봐도 북녁밖에 안보이고, 돌아봐도 바다뿐이고, 
거참... 허허. 2008-11-22
16:28:31
 

 

병장 김낙현 
  한쪽으로는 산, 한쪽으로는 바다. 
배산임수(강이 아니라 바다니 임해라고 해야하나요?) 지역입니다. 어찌, 호텔들은 멋지게도 해변을 정확히 가려서 좋은 구경은 하나도 못하는 군요. 

기록과 기억의 공생은 상당히 유익한 것 같습니다. 저도 여기와서 일기를 꼬박 쓰고 있는데(매일 매일 쓴다든지 일일 일회 같은 원칙은 없습니다.) 그때그때 사건이든 생각이든 적어두니까 적어둔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때도 있고, 적어놓은 것을 볼때 즐거운 것도 있더군요. 2008-11-22
17:12:44
  

 

병장 김민규 
  담벼락 너머로는 철원의 황량한 평야가 펼쳐져 있고 뒤로는 높디높은 산 뿐이군요. 춥군요. 덜덜덜. 아, 이건 이동슥씨가 연평도에 있다는것만큼이나 중립적인 표현 맞죠? 2008-11-22
18:06:45
  

 

일병 이세종 
  보이는건 낙엽, 보이는건 말라가는 나무, 
들리는건 바람 소리, 다가올건 악마의 비듬, 
안보이는건 군용이 아닌 모든것. 

아하하. 

그나저나 기록은 참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하지 않는 사람이긴 하지만, 과거나 남은 기록들을 어떠다 마주하면 
소중한 마음뿐이더군요 2008-11-22
19:49:38
  

 

병장 김현민 
  글 잘읽었습니다. 솨이월드 다이어리라기엔 
좋은 글이었어요. 전 바다가 보고싶군요. 
주위가 다 산이라 더 답답해요. 2008-11-23
05:5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