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스물 둘의 첫걸음을 위하여  
상병 김무준   2009-01-03 13:03:39, 조회: 224, 추천:3 

-Slow down 태양아 제발 서두르지 마. 그리움이란 무지개가 떴잖아. Slow down 시간아 제발 보채지 좀 마. 나의 추억을 모두다 네가 가졌잖아.

잊지 못하는 노래가 있다. 리쌍의 경우가 그렇다. 어느 앨범에 수록된 곡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두 번째 앨범이었나. 노래 두 곡이 나를 사로잡았다. 중학생 때쯤이었으니까, 오륙년은 된 노래다. Spain과 Slow down이다. Spain의 Feat을 누가 담당했는지는 모르지만, Slow down은 김범수가 Feat을 담당했다. 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스페인에 가고 싶었고 노래를 불렀다. 사진학과에 다니는 친구 녀석과 학창시절부터 음악적 취향이 잘 맞아떨어졌고 우리는 심심할 때 마다 노래를 했다.

녀석은 선천적으로 고음이 불가능한 목을 타고났기에, Feat부분은 모조리 내 담당이었다. 언젠가는 무대에서 노래를 하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는 힙합동아리의 메인보컬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첫 공연에 부를 곡으로 Slow down을 선택했다. 시간이 무섭도록 빠르게 지나고 있었다. 내게는 시간을 붙잡을 능력이 없었다. 그저 슬픈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할 수밖에. Rap부분은 다른 친구가 맡고, 나는 김범수의 Feat부분을 맡았다.

우리 동아리는 급조된 동아리였기 때문에 다들 다른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Rap을 맡은 친구와 Bit를 맡은 친구는 둘 다 댄스 동아리였고, 여자 보컬은 중국어 연극동아리, 동아리 부장은 밴드부의 기타리스트였다. 거기다 나는 학교에서 제일 많은 동아리 활동을 하는 남자였다. 연극, 밴드, 농구, 축구, 힙합까지. 그래도 무대에 서고 싶어서 음악실에서 세달 가까이 MR을 틀어놓고 연습을 했다. 틈만 날 때면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시간은 무섭게 흘렀다. 우리는 이제 입시를 걱정해야할 나이가 되어 있었고, 동아리 연습마저 눈치를 봐야만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을 능력이 없었기에. 노래를 해야만 했다. 연기를 하고, 노래를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노래를 불렀다. Rap을 담당한 녀석과 눈빛만으로 호흡을 맞출 수 있을 때 쯤. 축제날이 왔다.

사오년 전만 하더라도 힙합이 대중적인 음악은 아니었다. 우리의 두려움은 너무나 컸다. 객석의 호응이 없으면 어쩌나. 실수하면 비웃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걱정에 묶여 우리는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졌다. 그런데 축제 당일 마이크가 나오질 않았다. 세 명이서 노래를 해야 하는데, 마이크는 두개였다.

그래도 공연을 해야만 했다. 공연은 우리의 약속이기도 했지만, 관객과의 약속이기도 했으니까. 걱정스럽게 Bit무대는 진행되었고, 엄청난 환호 끝에 마무리 되었다. 의자 두개가 무대에 놓여지고. 나와 친구가 자리에 앉았다. MR이 시작되고 조명이 자리를 비췄다. 연극무대에서도 이렇게 떨린 적은 없었는데. 다리를 덜덜 떨어가며 노래를 시작했다.

점점 클라이맥스에 다가가며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서 마주보고 노래했다. 클라이맥스에는 김범수의 기교부분이 있다. 나는 오로지 이 부분을 무대에서 부르고 싶었을 뿐이다. 십오 초에서 십-팔 초가량을 한 호흡으로 불러야 했다.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객석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이제까지 무대에서 그렇게 큰 환호와, 박수와, 함성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순간 나는 분명 그 누구보다도 많은 환호에 파묻혀 있었다. 노래가 끝났고, 박수가 이어졌다.

공연은 끝났다. 우리는 기뻤지만, 결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내 바람대로 시간이 느리게 가지도 않았다. 시간은 흘렀다. 흐르고 흐르고 흘러서 몇 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돌아보면. 그 시간동안 나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머리는 열여덟 철없는 고등학생으로 남았고, 마음은 열다섯 중학생으로 남았다. 어쩌면 그 무대에서 나는 시간을 따라 가는 것을 포기했는지도.

오지 않을 것 같던 이천구년이 왔다. Lost memories라는 영화에는 이천구년에 타임머신이 만들어져서, 대한민국이 일제강점 하에서 독립하지 못한다는 상상이 있었다. 아쉽게도 타임머신은 발명되지 않았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대로 지구가 멸망하지도 않았고, 밀레니엄 쇼크가 오지도 않았으며, 외계인이 침공해 온다거나, 제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도 않았다.

시간을 붙잡거나 느릿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스페인에 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시간은 흐른다. 그래도 시간은 흐른다. 잃어버린 시간 동안 늦게나마 깨달았다. 이제는 나이를 먹어야한다. 함께 노래할 친구는 멀어져만 가고, 더 이상 철없이 무대에서 뛰어다닐 수도 없다. 그럼 이제 내 무대를 만들고, 비행기를 타고서, 스페인으로 이탈리아로 향해야지. 나 혼자 힘으로 해야만 한다.

누구나 똑같이 나이를 먹는다. 흐름을 거부한다고 해서 흐름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온 몸으로 저항해 시간을 잃어버려야만 한다면, 차라리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겨보겠다. 어른이 되는 것이 두렵다. 현실에 부딪히는 것이 겁이 난다. 상처받고 싶지 않고, 맞서 싸우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손에 쥔 것마저 잃어버려야 한다면. 마이크가 고장 난 무대라 할지라도 올라서야겠지. 나는 약속했다. 대한민국 최고가. 세계 최고의 자리에 서고야 말겠다고. 지나간 시간의 무대에서 그 약속을 지켰듯이. 나는 지금의 약속을 지켜야한다. 얼마나 걸릴지, 얼마나 아플지, 얼마나 잃어야 할지 모르지만.

하지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젊으니까. 우리는 여전히 젊으니까. 나를 죽이지 못할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할 뿐. 포기란 배추를 셀 때나 하는 말이지. 소크라테스는 일찍이 너 자신을 알라 말했고, 누군가는 아는 만큼 행하라했다. 이제 나이를 좀 먹어보자. Slow down은 불러봤으니까, 이제 Spain을 불러야지. 해야 할 일이 많다. 나는 죽지 않았고 포기하지도 않았다. 조금은 나를 알 것 같다. 그러니까 아는 만큼만 행동하자. 새해가 밝았다. 나는 스물 둘의 대한민국 청년이다. 세상이 나를 버린 게 아니라, 세상이 애초에 나를 가진 적이 없었다면. 내가 세상을 가져주마.

시간을 달리자. 마른하늘을 달리자.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애써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4:00:33 

 

병장 고은호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을 능력이 없었기에. 노래를 해야만 했다. 
연기를 하고, 노래를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노래를 불렀다.' 

그 기백이 마음에 깊게 박혔습니다. 

지금, 움직여야겠네요. 2009-01-03
13:30:40
  

 

병장 박찬걸 
  맞죠. 우리는 젊죠.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경제가 어려워도 우리가 다시 살릴수가 있잖아요. 우리는 잿더미에서 시작하지는 않으니까요. 2009-01-03
14:04:07
  

 

병장 홍석기 
  흐흐, 스물 하나인 저는 일단 걸음마부터. 2009-01-03
15:13:59
  

 

병장 이동석 
  석기님, 여기는 한국이니 한국식 나이로 치면 석기님은 올해 스물셋! 
스물셋! 우후훗 

그러나 전 스물 다섯! 궁에서 보낸 년수 사년! 우우웃 (안구에 쓰나미) 

책마을 언제 공연이나 한번 합시다. 낄낄. 영화인력끼리 영화 한편찍어 영화제 틀고, 연극하나 만들고, 노래 잘하는 분들이나 악기 좀 다루는분들 모아 공연좀 하고 2009-01-03
16:16:46
 

 

상병 김무준 
  오오 동석씨 고거 괜찮네요. 2009-01-03
16:39:28
  

 

병장 문두환 
  /동석 

동석님을 보면 차암...그 4년이라는 것이. 흐흐. 

나중에 몇몇 분들이 탈출에 성공하면 그 영화제와 연극을 동시에 하면서 송년회를 하는 것은 어떨까요? 사회는 무준씨가 보고 사회에 이어 바로 랩을... 2009-01-03
18:28:01
  

 

상병 김무준 
  왜 근데 사회가 저인걸까요. 2009-01-03
20:03:34
  

 

병장 이동석 
  그건 무준씨가 사회적으로 생겼기때문입니다. (음?) 2009-01-03
20:31:43
 

 

상병 김예찬 
  크, 학교 다니며 스쿨밴드할 때 마지막 공연에 그동안 그토록 하고 싶었던 <교실이데아>를 불렀던게 기억나네요. 함께 했던 멤버들과는 그 곡만큼은 나름 스쿨밴드 치고는 어떤 정점의 수준을 이룬 무대였다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요새 이 곳 후배들 중 악기 다루는 친구들이 계속 들어와서 안에서 합주라도 한번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나가서도 가능할지는 모르겠네요. 꼭 다시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스물둘이 아니라 스물 넷이라서 이렇게 비관적인 것일지 (웃음) 2009-01-04
12:46:40
  

 

상병 정근영 
  석기님의 '스물하나인 저는 일단 걸음마부터..'를 보고 좌절했지만, 바로 아래에 동석씨 댓글을 보고 마음을 놓았습니다. 
89년생이라는 제 후임도 08년 3월 군번인데 09년 1월에 이미 병장을 단 레어한 인간이 있을리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나저나, 저도 이제 스물 셋이군요. 
어느덧 2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는..(먼산) 2009-01-04
19:48:57
  

 

병장 이우중 
  근영님. 
저보다 한 기수 후배녀석은 89년생입니다. 07년 6월에 들어왔는데 말이죠. 허허허 2009-01-04
20:44:23
  

 

상병 정근영 
  아니 
그럴수가 
우중님 그거 가능한 일인가요? 당최 이해가 되질 않는군요, 후덜덜 2009-01-04
22:42:46
  

 

병장 이우중 
  근영님/ 
뭐 굳이 한국식으로 따지자면 빠른 89년생이죠. 허허허. 
저랑 같은달에 들어왔는데 제 후임이랍니다. 이젠 거의 그냥 동네 형-동생이지만요. 2009-01-05
19:5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