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속사(俗事)  

상병 김형태  [Homepage]  2009-03-04 16:41:19, 조회: 99, 추천:0 

“여기서 일한거요? 허허허, 이제 근 20년 쯤 다營읒.”

“허허허,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 아이들 등교할 때 잠깐씩 나가있고, 하교할 때 횡단보도 앞에 서있는거, 점심시간에 몰래 나가는 애들은 없나 잠깐 살피면 된다구요.”

“껄걸, 뭐 특별히 쉬운일이 어디있겠어요. 하루하루 내 손주같은 것들 재잘재잘 거리는걸 보면 내 자식들 어릴때가 생각이 나서 여태까지 계속해온 거죠. 제 다음사람이 정해졌다는 얘기하려고 오신거면, 다알고 있으니 마음쓰지 마세요. 허허허. 그럼, 다음주까지 비워드리면 되나?” 

“당장 내일이요? 뭐, 노인네라 짐도 없으니 금방 끝날겁니다. 퇴근할 때 한번찾아 뵙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사장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아, 이 젊은 친구가 경비일을 한다면 학부모들도 선생들도 마음이 놓겠습죠. 정말 잘 데려오셨습니다. 내 뒤를 잘 부탁하네 젊은이, 허허허.”

“젊은이가 일을 해야지 이 다 늙은 노인네가 젊은이들 일자리를 뺏어야 쓰나. 껄껄껄. 노인네는 먼저 가보겠네, 참 감사했습니다. 이사장님.”

그렇게 15년간 자신이 지키던 문을 처음으로 완전히 벗어났다. 다 늙은 노인네를 지금까지 써준것만도 고마운일인데 이사장은 고생했다며 흰 봉투를 내밀기에 끝까지 사양하며 돌아섰다. 계속된 감기로 근처 소아과를 찾았다. 
“37년 7월생 강만철 할아버지.” 부른다. 이전에 있었던 두리둥실한 간호사는 항상 손을 잡아 끌며 진료실로 데려갔지만 이번처자는 내 이름 석자만 부를뿐이다. 들리는 내 이름이 낯설다. 이곳 의사선생의 아버지가 원장으로 있을 때에는 서로 안부를 자주 묻곤 했는데 더 이상 그는 병원에 나오지 않는다. 차가운 청진기를 내 가슴에 댄다. “숨 크게 들이쉬세요, 이제 기침한번 해보세요. 다 끝났습니다. 감기인 것 같군요. 나가서 약 처방받으시고 주사 맞으세요.” 차갑다. 청진기도 그의 말투도. “아버지는 잘 계시나요? 허허허” 어렵사리 말을 붙여보지만 내일 다시 나오라는 말 밖에 없다. “그럼, 내일봅시다. 수고하시구려.” 처방전이라는 종이를 기다리는 동안 꺼진 TV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귀에 들리는 것은 클래식 음악뿐이다. 예전보다 많이 깨끗해졌다. 인테리어도 바뀌었고 얇은 평면TV는 보란 듯 꺼져있고, 병원 곳곳에 있는 스피커에서 모차르트인지 베토벤인지 클래식 음악만 나온다.
다가오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공허한 음악을 깬다. “주사 안맞을 꺼야. 나 하나도 안아파.” 아이들의 저 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어머,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어디 아프신가봐요? 건강조심하셔야죠. 예진아 할아버지 몰라? 학교 경비실 아저씨잖아. 인사해야지.” 학부모인가보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꾸벅 인사를 한뒤 엄마를 조른다. “엄마엄마, 나 주사 안맞으면 안되? 영어시험 백점받았잖아.” “예진아, 주사 맞으면 내일이면 번쩍 나을거야. 엄마가 맛있는거 사줄게. 예진이가 아프면 엄마도 마음이 불편해요.” 아이는 체념하듯 시무룩하다. 엄마는 반짝이는 전화를 꺼내들고 어디론가 전화한다. 아이도 손보다 더 큰 휴대폰을 들고 ‘딱딱딱’거리며 뭔가를 쓴다. 난 신문을 찾아보지만 없단다.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걷는다. 탈탈탈 오토바이가 다녀야할 길을 반짝이는 차들이 메운다. 읍내 작은 사거리가 어느새 큰 빌딩으로 둘러싸인 어지러운 도시가 되었다. 어지러운 머리를 다잡으니 기침이 나온다. 얼핏 얼핏 아는 얼굴이 지나간다. 내 친구의 아들들, 또 그의 친구들. 어느새 달려와 “아저씨, 우리 아부지가 오늘 저녁에 간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아! 그리고 지난번에 주신 고구마도 잘 먹었다고 꼭 전하라고 엄마가 얘기했었구요. 히히히 아저씨 다음에 야구 또 해요!” 라고 예전처럼 얘기할 것 같지만, 동네가 변하며 또 친구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며 그들도 변하고 떠났다.

높이 솟은 아파트 하나 중 17층에 있는 집으로 올라간다. 노란 봉투로 편지가 와있단다. 누군가 했더니 지난주에 상을 치룬 성구였다. 상을 치룬 전날 까지만해도 성구놈 특유의 구수한 목소리로 “야, 세상이 많이 변해버렸지이? 이거 갑갑해서 살 수 있겄냐? 허허허” 하며 예전 탄광적 얘길 했는데, 나이가 많은 탓인지 심장마비로 다음날 떠나버렸다. 하지만 놀라지 않았다. 갈때가 되니 간 것이라고 담담히 받아들이며 그의 향앞에 하나의 향을 더 추가했다. 장을 치루면서 돌아오는길에 이젠 몇 남지않은 친구중 한놈도 이렇게 얘기했다. “왜들 질질짜고 우는겨, 갈때가 되니껜 가는거 아니겄냐, 안그냐 만철아? 허허허 아님 우리가 세상이 각박하기라도 해서 죽는단 거여? 껄껄껄. 다의미 없는 것이여 우리가 가야 또 새것들이 태어나지 껄껄”
  펼쳐본 성구의 편지에는 ‘감기가 오래가면 무섭다는데, 너도 인자 그만 일을 그만둬. 갑자기 친구 녀석들이 보고 잡다. 만철이 너도, 성탄이 그것도. 아들자식들 내려오면 예전처럼 같이 야구나 했으면 좋겠다.’ 라는 별볼일 없는 내용들이었다. 늦은 저녁, 드르륵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간다. 아래를 보니 막내손주가 학원에 다녀오는 길이다. 하늘을 본다. 까마득한 하늘속에 별이 적다. 죽은놈 소원하나 들어준 셈치자니 기침이 난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10:09:24 

 

병장 최영민 
  저도 죽은놈이라고 치고 소원하나 들어주실래요? 
기침하셔도 되는데.. 
흐흐 2009-03-04
16:55:40
  

 

상병 김예찬 
  저도 언젠가 나이를 먹고 늙어갈 텐데, 지금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죠. 좋은 글입니다.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