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설월야독 (雪月夜獨)
병장 고동기 2008-11-20 17:35:46, 조회: 123, 추천:0
그런데 뭘 이리도 어물쩡거리는 것이냐. 나는 준비가 되어있다. 지난번만 하더라도 나의 물건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느냐. 나의 유일한 통로를 막으려 하지 않았느냐. 사람하나 찾지 않는 이 동굴 같은 곳에서 내 유일한 희망이자 기쁨이었던 그것을 빼앗으려 하지 않았느냐.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음습한 실내. 문을 열면 느껴지는 서늘한 공기. 싸구려 형광등이 내뿜는 조악한 조도. 이곳에서 지낸지도 벌써 1년이다. 그동안 난 불평한번 한 적도 없다. 눈이 시리고 침침할때면 그저 눈 한번 꼭 감았다, 떴다. 네가 나의 것을 빼앗아 간다고 했을 때도 그저 담담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나는 이용가치가 다 떨어지지 않았느냐. 나도 내 자신이 그렇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나도 그래, 어차피 갈 사람이지 않느냐.
그래서 여기 홀로 있겠다는 것이다. 내가 잠시 가졌던 것 모두 버리고, 홀로 남겨진 책상에 앉아 남은 시간을 보내려는 것이다. 읽어오던 책 읽고 써왔던 글 쓰며 그렇게. 이제 더 이상 내 글을 읽을 이도 없지 않느냐. 닿을 곳 없는 글은 점점 나의 내부로 침잠하겠지만, 그 가운데서 할일 없이 떠도는 가벼운 생각들은 덜어낼 수 있으니 오히려 더 잘된 일 아니냐. 난 모두가 떠나버린 이곳에서 혼자 남아 있겠다. 그리고 이곳을 나만의 공간으로 만들겠다.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집필실을, 그래 이곳에 만들겠다. 다, 모두 다 가져가라. 더는 이곳에 아무것도 남기지 마라. 길 잃은 추위만이 떠돌게 하라.
겨울의 정점(頂點)아 어서 다가오너라. 어서 다가와 이곳을 더 춥고, 더 어둡고, 더 괴롭게 만들어라.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가 그랬듯, 견딜 수 없는 외로움으로 고독의 끝을 맛보게 하라. 그리고 나의 이 떨리는 손을 더욱 더 세차게 흔들어라. 육체의 감각은 마비되어도 좋으니, 정신의 감각이 날서도록 하라. 그렇게 남은 시간 동안 나를 더 괴롭혀라. 나는 나에게 주어질 하나의 상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겠다. 더 이상 남의 체온도 빌리지 않겠다. 얼어붙은 손가락은 입김으로 녹이며, 그렇게 한 자(字) 한 자(字) 써내려가겠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8:25:12
병장 이동석
제가 가장 읽기 버거워 했던 책은 카프카의 <굴>입니다. 뭔가 딱히 어렵다거나 그렇진 않은데, 이상하게도 읽기가 버거워요. 이미 갇혀있기에 <굴>을 읽으면 폐소공포증이라도 돋아나는지 모르겠군요.
그런데 동기님의 굴은 절망적이지만, 폐쇄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군요.
그 절망은 칼 끝에 선듯, 독이 배여 따끔한 복어의 살같이 짜릿한 절망입니다.
무슨일이 있으신건 아니겠지요?
상투적인 말로, 강철같은 의지가 엿보이기에 크게 걱정은 하지 않으렵니다. 2008-11-20
17:44:05
병장 정병훈
크흐흐 겨울의 정점이 오면... 동기님도 가겠죠... 쳇.
동기님이 가면, 저도 가겠죠. 으켈켈 2008-11-20
18:03:44
병장 정병훈
'동기님의 출사표' 정도로 받아들여지네요. 저는 언제쯤 출사표를 던질수 있을라나요.
흐흐흐 굳은 의지가 보이네요. 좋아좋아-
동기님의 글을 자주 봤으면 합니다. 2008-11-21
08:05:45
병장 고동기
갑자기 제가 책마을에서 안보이게 되면, 눈내린 달밤에 글이나 쓰고 있겠거니.
생각해주세요.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릅니다.
새해가 다가오면서 사무실 배치나 이것 저것, 재조정 할 것 같아서요.
그나마 사바넷에 책마을이 만들어졌으니 다행입니다. 2008-11-21
09:04:57
병장 이동석
쩝, 또 해가 바뀌고 여기저기서 난리로군요. 아무쪼록 조심히... 2008-11-21
09:09:25
상병 이동열
저도 갑자기 한동안 잠적했었습니다(웃음)
궁에서의 생활은 어쩔수가 없는거 같아요-
눈내린 달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동기님이 생각나겠지요? 2008-11-21
12:2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