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서울의 기별  
병장 김민규  [Homepage]  2008-12-23 11:24:17, 조회: 153, 추천:0 

긴 호흡으로 뜸을 들여 전화를 건다. 닿을 수 없는 거리를 넘고자 암호같은 숫자들을 발 아래 놓으며 너에게로 간다. 만나러 가는 길에 수많은 길을 거쳐 지하 미로속 주행을 하듯이, 번거롭게 상냥한 목소리들에 맞추어 번호를 누른다.

신호가 가고, 기계음이 이도를 타고 흐르는 그 시간동안에, 그동안 스쳐온 단절의 시간이 함께 달린다. 내색하지 않기를, 그래서 1주일의 시간을 흘려 보냈는데 불과 사십여초의 기계음을 들으며 너를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가 제각기 흘려보낸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기에는 못 미치게 역부족이었는지, 반갑지 않은 또다른 상냥한 목소리가 번거롭게 끊을 것을 종용한다. 통화료가 부과되오니 원치 않으시면 끊어주세요..

갇힌 공간에서의 반복적인 하루의 무게와, 자유로이 저 하늘을 날고 있는 일주일의 무게는, 서로 가늠하기 어렵게 엇비슷한 것인지, 많이 뜸을 들였다 생각한 나의 기다림의 고뇌를 배반한 채로, 너에게 가서 닿을 것이었다. 한번 더 번거롭게 상냥함과 마주하다, 마침내는 단념하고 차가운 종용 앞에 무릎을 꿇는다.

너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은 작고 좁아서, 마냥 궁금해 넘어가보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모니터속 작은 너의 방에는 냉랭한 부재의 기운만이 가득한 것이었다. 차가움이란 열의 부재를 표현한 관념적 언어에 불과할진대, 그것의 실체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인가, 라고 나는 생각했다.

4X6인치의 작은 코팅지 안에서 너는 웃고 있다. 가만히 앉아 그 온기를 음미한다. 머리 끝 가르마로부터 내려온 너의 머릿결은 흘러내려 프레임의 바닥에 닿을 듯이 나와있고, 양옆으로 벌어진 눈 만큼이나 길다란 뿔테 안경은, 너를 가두고 있는 프레임만큼이나 억압적으로 그 눈매를 가둔다. 벌어진 입술의 틈으로 새하얀 치아가 살그머니 고개를 내미는데, 올라간 듯한 입꼬리는 세세히 응시하니 웃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묘한 인상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그것은 수화기 너머의 너의 침묵만큼이나, 모니터속 너의 방에 어린 냉기 만큼이나 서늘하게 다가온다.

기억의 무덤을 파헤쳐 너의 흔적을 답사한다. 발굴되는 동행의 추억들만큼이나 떨어져 보낸 시간의 두께가 입혀져, 오존에 노출되어 퇴색된 색바랜 달력처럼, 그 생기는 힘을 잃고 무너져 내린다. 너를 그리는 나의 부름에는 아직 지침이 없는데, 그 외침은 광야에 울리는 공허한 소리가 되어 산산이 흩어진다. 코팅지 위에 내려앉은 하얀 먼지를 손으로 문질러 쫓아내다, 어느새 붙어있던 지우개 똥이 너의 입가에 뭉게져 번지는데, 그것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점인지, 빛의 반사로 인한 음영의 기복인지, 그도 아니면 사진기 렌즈에 달라붙은 먼지였는지 알 길이 없다. 그처럼 내가 너를 안다고 하는 것은 허망한 것이고, 너와 마음이 합했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한 일이다. 나는 너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너와 조우했지만, 우리의 마음속 티끌들은 마치 뭉게진 지우개똥처럼 번져, 그 마음이 온전히 오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폐포에는 타르가 달라붙고 다시 돌아나온 날숨에는 하얀 먼지들이 가득 끼었는데, 신선한 산소가 나의 폐 세포에 오롯이 다가가지 못함과 마찬가지로, 내가 부르는 너의 이름이 번거로운 상냥함에 가로막혀 멈추어 선 것 같이, 프레임속 너의 입가에는 거뭇한 불청객이 자리를 잡고, 하얀 너의 얼굴색으로 다가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바라본다는 것에는 기약이 없어서, 언제 이 단절이 끊기고 우리 사이에 통함이 있을지 짐작할 수가 없다. 언덕 위에 앉아 저 멀리 서울로 가는 국도를 내다보는데, 서울까지의 길은 까마득해 그 시계市界는 보이지 않으나, 이십 분에 한 번씩, 수유↔철원이라는 팻말을 큼직하게 붙인 서울로부터의 기별은, 여지없이 다가와 닿는 것이었다. 모든 닿을 수 없는 마음을 비웃기나 하듯이, 국도 위의 차들 중에는 강원 넘버도 있고, 경기 넘버고 있고, 지역 표시가 없는 신형도 있는데, 그 중에는 서울 표지판을 단 몇몇이 끼어 서울로부터의 기별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은 다시 만나고, 끊겨버린 전화 너머 너의 핸드폰 화면에는, 033으로 시작하는 생소한 나의 번호가 남는 것이다. 지리하고 따분한 기다림은 그조차도 하나의 흔적으로 남아, 너에게 나를 상기시키고, 나의 다음 연락을 기다리게끔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다시금 닿기를 꿈꾸는 기별이 된다.



본점에 잠시 출장을 나와 있습니다. 또 코딩질이네요. 안하던 짓을 하려니 어색하기만 한데,
당분간은 이곳에 들어올 여건이 영 되지 않을 것 같아요. 노트에 끄적였던 거나 한번 올려 봅니다.
이 잡텍스트와 생각하시는 그 글은 아마도 '연평도 이동슥과 서울의 송혜교만큼의'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허허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5:42:24 

 

병장 이동석 
  아니, 그건 너무 관련이 많잖아욧. 낄낄. 2008-12-23
11:48:14
 

 

병장 양 현 
  똥똥거리네요. 이런 똥똥님. 출장오신만큼, 마음껏 배출해주시길 바라옵나이다. 
저희는 2x8정도 되는 검은 화면에 뜬 빨간색 전자문자뿐이로군요. 

전 이런걸 더 좋아합니다. 버튼말고, 그리고. 상대방이 날 위해 내지 않아도 되는걸요. 
날 위해 내는. 날 위해 거는. 날 위해 받는 그대들을 위해서요. 2008-12-23
13:42:53
  

 

상병 정근영 
  요즘들어 전화를 잘 안 받으시는 여친님 때문인지, 괜히 마음이 울적해지는 글이군요. 전화를 통해 상대방을 확인한다는 건 참 잔인해요.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을 때는 깊은 안도감과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는 반면, 혹여 3~4번을 해도 받지 않는다면, 내가 상대방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듯한 느낌을 받죠. 어휴, 그나저나 나의 그녀는 왜 이렇게 기분이 별로인걸까요 2008-12-23
20:0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