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서른네 번째 남자-2  
상병 이우중  [Homepage]  2008-11-09 10:55:25, 조회: 187, 추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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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잠에서 깬다. 강에 반사되는 아침햇살에 눈이 부시다. 아직 술기운이 약간 남아 있어 흐리터분한 눈으로 둘러보니 아직 사내는 오지 않았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담배갑을 발견하고는 자신이 담배를 피웠던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그는 자리의 주인인 사내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 멍하니 강을 바라본다. 강 건너에는 이쪽 편과 마찬가지로 메리골드가 만개해 있는 것 같다. 온통 불그죽죽하다. 드문드문 해바라기도 피어 있다. 강 위에는 오리들이 둥둥 떠다닌다. 아무 생각 없는 듯. 둥둥.
그가 앉아 있는 자리의 원래 주인은 아직까지도 오지 않는다. 그는 다시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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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잠에서 깬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여전히 옆에는 아무도 없고 강물은 조용히 흐른다. 그는 허기를 느끼고 매일 가던 편의점으로 향한다. 다행히 수중에는 돈이 있다. 천원짜리 김밥과 우유를 계산대에 올려놓고 값을 치르려는데 점원은 아무 반응이 없다. 그는 계속 점원을 바라보고 있지만 점원은 마치 그가 거기에 없는 것처럼 멍하니 서 있다. 가까이에서 이렇게 계속 쳐다보면 그쪽으로 눈이 가는 게 정상 아닌가? 상식적으로. 하고 들으라는 듯이 말을 해 보지만 묵묵부답이다. 그 때, 다른 사람이 계산대에 물건을 놓은 뒤 옆에 서 있는 그를 보지도 않고 어깨로 저만치 툭 밀친 뒤 계산을 한다. 손님에게 점원은 친절하다. “이것도 같이 계산하시는 거세요?” “아뇨. 제 거 아닌데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손님이 나가자마자 점원은 욕을 한다. “미친 새끼, 안 살 거면 왜 같이 올려놔?” 그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손사래를 치며 아니, 지금 계산하려고 하는데... 라고 말하지만 이미 점원은 김밥과 우유를 진열대에 다시 올려놓고 계산대로 돌아온다. 평일 낮의 강변 편의점은 한산하다. 점원은 만사가 귀찮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리고 기지개를 켜고는 잠시 화장실 다녀올께요*^^*라는 팻말을 문에 걸어두고 문을 잠근 뒤 어디론가 나가 버린다. 그는 다시 김밥과 우유를 계산대로 가져다 둔다. 잠시 후 점원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그에게로는 시선을 두지 않고 김밥과 우유만 보고는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하고 다시 진열대로 올려놓는다.
어이가 없지만 그래도 그는 배가 고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진열대에 있는 김밥을 주머니에 슬쩍 집어넣고 편의점을 나간다. 누가 볼세라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로. 하지만 그에게 관심이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진짜 내가 안 보이는 건가... 하고 생각하며 편의점의 유리문을 힐끗 보지만 거기는 분명 반사되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 보아도 손 역시 그대로이고 얼굴을 만지는 촉감도 다를 게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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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훔친 김밥을 들고 강변 천막으로 돌아온다. 오리들은 계속 둥둥 떠다닌다. 그는 김밥을 우걱우걱 씹으며 오리의 숫자를 세어 본다. 하나, 둘, 셋, 잘 보이지 않는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다시 세어 본다. 하나, 둘, 셋, 넷... 서른셋. 분명 듣기로는 서른두 마리라고 했는데. 그러던 중 서른세 번째 놈이 낯이 익다고 느낀다. 오리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게 처음인데 낯이 익다니. 하기야 뭐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고 생각하며 그는 피식 웃는다. 어쩌면 그 때 병원에서 본 미친X도 완전 미친X은 아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조금 더 크게 웃어 본다. 분명 웃고 있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난다. 우습다. 그런데 슬프다.
그는 문득, 여기는 분명 내가 나고 자란 곳이지만, 이십 몇 년간의 기억이 모두 남아 있는 곳이지만, 자신이 뭔가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는, 낯선 공간이다. 그래서 그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다. 담배가 다 타들어가고 그는 몸을 일으켜 시외버스터미널로 터덜터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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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오후의 버스터미널 역시 아까의 편의점만큼이나 한산하다. 모두가 어디엔가 있는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을 시간이니까. 바로 얼마 전의 그처럼. 그는 이번에는 매표창구에서 어슬렁거리지 않고 바로 승강장 쪽으로 향한다. 대기하고 있는 버스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그가 들어간 차는 서울행이었다.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두 명의 승객을 지나쳐 그는 맨 뒷좌석 바로 앞의 구석 자리에 앉는다. 검표원은 한번 슥 둘러보고는 두 장의 승차권을 회수해서 밖으로 나간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이후로 처음 가게 되는 서울이다. 하지만 지금과 수학여행 때와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 때도 딱히 존재감은 없었다는 것과, 대체 무엇을 하러 왜 서울로 가는지 자신도 모르겠다는 것 정도이다.
차가 출발한다. 서울까지는 세 시간 삼십오 분이 걸린다고 한다. 그는 잠이 오지 않지만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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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좀 길어지게 생겼는데요? 허허....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5:46:55 

 

병장 문두환 
  /우중 

무의미한듯 보이는 일상의 반복속에서 가끔은 내 자신이 잊혀'지는'듯한 환상을 갖게 '되곤'합니다. 맥락은 상당히 다르지만 예전에 제가 쓰던 정치적 픽션과 조금 비슷한 설정이 있을 것 같기도 하군요. 흐흐. 잘 읽었어요(웃음). 2008-11-09
16:03:36
  

 

상병 양순호 
  괜찮아요. 길면 길수록 재미도 있고 흥미도 있고 궁금증도 있으며 기다림도 있는걸요. 기다리고 있어요. 히히. 2008-11-09
20:54:24
  

 

상병 이우중 
  허허. 부족한 글 잘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조금 신기한 건, 아무도 내용 중의 이모티콘을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과 
2가 있으면 궁금해서라도 1을 다시 한 번 볼 법도 한데 1의 조회수는 올라가지 않는 것 정도일까요. 허허허... 2008-11-10
09:01:17
  

 

일병 송기화 
  전 다시 읽어봤는데 말이죠. 으흠, 
다 좋았지만 길어지게 생겼다는 부분이 가장 좋았던 저는 뭘까요(웃음) 2008-11-10
12:26:46
  

 

병장 이동석 
  이런, 요새 우중님 조루...? (죄송합니다) 

왜 계속 글이 중간에 끊기는지, 안타깝지만, 다음을 기대할수 있어 좋군요. 흐흐. 2008-11-18
21:45:27
 

 

병장 이우중 
  아무도 보지 않겠지만 '서른네 번째 남자'는 여기서 끝입니다. 
연작 형태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볼까 해요. 

두 번째 이야기의 제목은 아직 미정입니다만 '백사십오만육천칠백아흔여섯번째 남자'가 될 수도 있고 '천육십이만칠천스물두번째 여자'가 될 수도 있어요. 2009-01-09
20:2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