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상병 정근영   2009-05-02 21:11:01, 조회: 164, 추천:1 

  TV를 본다. 뉴스에서는 돼지 인플루엔자라는 신종 질병에 대해 떠들며, 우리나라에도 2차 감염자가 속출하고 있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궁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먼 나라 일일 뿐이다. 기껏해야 “야, 이러다가 메뉴에 삼겹살이랑 수육이 추가되는 거 아냐?”, “그러면 밥이 좀 먹을만 해 지겠네”라는 둥의 시덥지 않은 농담을 던지며 킥킥거릴 뿐. 물론, 나 역시 그 중의 하나다. 채널을 돌린다. 애프터스쿨과 다비치의 2연타석 크리티컬에 다들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숨을 죽인다. 남심을 녹이는 강민경의 표정과 미끈한 허벅지에 열광하고, 유소영과 이주연의 투톱에 흐느적대는 것도 잠시, 무대가 끝나자 이내 자조와 탄식이 섞인 한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밖에서는 이 따위 음악 프로그램에 눈길도 안 줬었는데..’라는 중얼거림과 함께. 곧이어 SG워너비가 나오자 망설임없이 TV를 꺼버린다.

  마땅히 할 것이 없어 무언가에 짓눌리듯 힘겹게 몸을 뉘인다. 낮잠이나 좀 자볼까 하며 눈을 감아보지만,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고 뭔지 모를 영상들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더 이상 사랑이라는 감정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고, 한 줌 남아있던 아쉬움과 미련과 그리움까지 모두 다 흘려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내 생각에 시위하듯이 떠오르는 기억들을 마주하고 있으니 마음이 혼란스럽다. ‘사랑은 잊혀지지 않는다. 이제는 떨림하나 남지 않았어도’ 문득 떠오른 이 문장으로 스스로를 자위하며 흘러가는 기억들을 바라본다. 분명한 형체없이 두루뭉실하고, 안개 낀 앞을 바라보듯이 흐릿한 기억들은 더 이상 내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한다. 주인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기억들은 다시 무언가에 쫓기듯이 흩어져 버리고, 그 자리를 다른 기억들이 채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미 단절되어 버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실체가 없는 기억은 벌써 아득히 멀어져버린 거리를 뛰어넘지 못한 채, 제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주인을 원망하듯 서럽게 흐느끼며 스러진다. 정말 사랑하기는 했던 걸까. 4개월이라는 시간은 너무도 아득해서,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을.

  미니홈피를 연다. 진정성이 결여되고, 사람의 온기라고는 단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가상공간에 불과한 미니홈피를 손에서 놓은 지는 꽤 되었지만, 서로를 이어줄 어떠한 매개체도 없는 지금, 시리도록 차가운 텍스트들 사이에서라도 너의 흔적을 쫓을 수 있음에 안도하며 다이어리를 열어본다. 너도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혹시라도 나를 떠올리며 무언가를 적어놓지는 않았을까. 혹시나하는 기대는 이내 실망감으로 변해버리고, 다른 사람 곁에서 과거의 연인 따위는 다 잊어버렸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너의 사진을 바라본다. 이미 무감각해져 버린 내 심장은 그 어떤 슬픔도 느끼지 못하지만, 잃어버린 슬픔만큼의 서러움이 가슴을 두드린다. 너는 정말 나를 잊은 걸까. 네가 아닌 그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는 물음을 던지며 쪽지창을 연다. 키보드를 두드렸다가 다시 지우기를 수십번, 언어로는 나의 깊은 한숨과 서글픔을 미처 담지 못한다는 것을 이내 깨달으며 쪽지창을 닫는다. 아니, 내 진심이 온전히 글 속에 담긴다한들, 반듯한 모니터 위에 얹어진 딱딱하고 무감정한 글씨들 사이로, 과연 내 마음이 너에게 닿을 수 있을지.

  미처 해결하지 못한 의문을 가슴에 품고, 돌아와서 일기장을 펼친다. 오늘은 어떤 글을 써볼까.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에서 나카지마가 주인공인 김해연에게 “사랑 따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자의 시시한 표정이로군”라고 했던 것을 떠올리며 독서후기를 적어볼까. 아니면 자신을 “장전된 한 자루의 총”이라고 비유했던 에밀리 디킨슨의 절대적 고독과 슬픔을 상상해볼까. 어느 쪽이라도 좋으리라. 지금의 나는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문득 어제도, 그제도, 그제의 어제도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쓴웃음을 머금는다. 3주째 자신이 단 한 문장도 쓰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썼던 4월 10일의 일기를 펼친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고 있던 사이라고 해도, 세상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하더라고, 더 이상 내가 너에게 영향을 줄 수 없고,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로 남아있다면, 그건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우리는 서로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시간을 살아가겠지만, 우리의 기억은 서로를 마주했던 마지막 순간까지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본질적으로는 죽는 것과 다름아니게 되어버린다. 때때로 사랑이라는 것의 극단적인 성격을 들여다보게 될 때면 한없이 슬퍼진다. 가장 깊이 관계하고 있던 사람이 완전한 무관심의 영역으로 밀려나는 역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차마 막을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 박제된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가는, 그러나 한때는 거의 전부였던, 너를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 물론 미니홈피나 친구들에게서 전해지는 소식으로 어느 정도 서로의 삶을 더듬어 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영화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더 이상 서로가 서로의 삶에 아주 조금만큼의 영향도 주지 못한다면.
과연 사랑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랑의 아름다움에 심취한 나머지, 한없이 어둡고 슬픈 이면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끝도 없는 심연의 좌절과 절망, 그리고 상처와 아픔을’

  가네시로 가즈키는 「연애소설」에서 ‘잊혀짐’이란 곧 ‘죽음’과 같은 거라고 말했다. 온 힘을 다해 내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너를 본 순간, 가즈키의 이 문장이 갑자기 되살아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나를 향해 영혼의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 그게 바로 잊혀짐이리라.

  편지를 써볼까. 잘 쓰는 글씨체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깔끔하고 가지런한 내 글을 보면서, 너는 행간에 녹아있는 깊은 한숨과 안타까움을 찾아낼 수 있을까. 또 다시 펜을 들려다가 고개를 젓는다. 미처 보내지 못한 두 통의 편지는 제 본래의 주인을 찾아달라며 죽어가고 있고, 어렵사리 보낸 마지막 편지가 다시 나에게 돌아와버린 지금, 더 이상의 편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너와 나의 우연한 첫만남이 운명이었다면, 지금 너와 나를 가로막고 있는 상황들도 또한 운명이겠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한때나마 내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던 그 손으로 그리 잔인한 일을 했다고는 차마 상상할 수 없었기에, 그저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었을 거라 믿는 것뿐.

  아직까지도 이곳저곳에 흩어져있는 너의 흔적들을 주워담는다. 물질적인 사랑을 경멸했기에 기념일이니 무슨무슨 데이니 하는 것들을 별로 시덥지 않게 생각해왔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너와 내가 이 자리에서 함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나버린 지금, 아스라이 사라져버리는 순간의 기억들은 정성이 깃든 선물과 함께 분명한 모습으로 다시 생명력을 얻는다. 궁 안에서 맞는 첫 번째 생일이라며 접어준 수백개의 하트들과 2년을 기념해서 직접 만들었다는 포근한 스웨터. 나를 생각하며 밤을 지새웠을 그 시간들이 어떻게 거짓일 수가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너와의 추억들이 담겨있는 달력을 다시 펼쳐본다. 2008년 1월부터 2009년 6월까지, 한 장 한 장 달력을 넘기며 나한테 남긴 너의 메시지와 활짝 웃고 있는 우리의 사진들을 바라본다. 문득 네가 내게 이 달력을 주면서 했던 “이 시간이 다 지나면 이제 100일만 기다리면 마음껏 볼 수 있어”라는 말이 떠오르는 건 무슨 까닭일까.

  가즈키는 ‘중요하고 소중한 일은 약하디 약한 얼음조각 같은 것이고, 말이란 망치 같은 것’이라 했다. 잘 보이려고 자꾸 망치질을 하다보면 얼음조각은 여기저기 금이 가면서 끝내는 부서져 버리고 만다고. 설명을 하려하면 할수록 진심은 왜곡되고 감정은 어긋나 버린다고.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투명한 내 마음을 따뜻하게 품는 일 밖에 없으리라. 포근한 봄햇살에 나의 그 얇디얇은 얼음들이 녹아, 흐르고 흘러서 너라는 바다에 도착한다면, 너는 봄햇살의 싱그러움을 느끼며 나란 사람을 다시 추억하겠지.

그래.
네 마음이 나와 같다면,
사랑은 잊혀지지 않겠지.
이제는 떨림 하나 남지 않았어도. 

20.3.1.98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09:45:37 

 

병장 김우현 
18.1.11.19   미니홈피의 모호함을 한창 경험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과의 소식을 전해주는 고마운 '물건' 이나 때로는 숨겨지고 싶은 비밀 혹은 알지 말았어야 할 소식을 알게끔 만드는 슬픈 '물건' 임을 느낍니다. 
들어가지 말아야할 상대방의 미니홈피임에도 자발적으로 마우스를 클릭하게 만드는 충동은 참으로 끔찍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잊혀질꺼 같으신가요. 과연 잊을 수 있을꺼 같은가요. 
평생을 잊으려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녀와의 행복했던, 뇌리에 박혀버린 순간들은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저 생각을 하지 않게 될 뿐이죠. 시간의 흐름에 의해. 

지금은 많이 힘드시겠죠. 저 또한 그러했으니. 그러나. 
당신이 졸업을 맞이하게 될때쯤 그녀 또한 당신을 기억하게 될껍니다. 분명히. 
무심코 날짜를 보았을때 당신의 졸업날이 다가옴은 당신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자아낼껍니다. 

한 후배녀석이 한창 제가 힘들어 할때 이런 말을 했답니다. 
'누군가 선배님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 사람이 가족을 제외하고 단 한명이라도 있다는게 너무 부럽습니다' 
저에게 있어 그리고 그녀에게 있어 적용해보니 정말 그렇더군요. 

바빠지세요. 무언가에 빠질려고 노력하세요. 힘들더라도 일부러 손을 들고 힘들어지려 노력하세요. 그럼 자연히 기억은 잊혀질테고 시간의 지남에 의해 점점 무뎌질껍니다. 

아무리 지금의 환경에서 고민하고 해결하려 발버둥쳐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고민과 힘듦이 늘어날 뿐입니다. 

화이팅입니다. 2009-05-02
22:47:18
 

 

병장 김무준 
22.83.38.70   깽깽이는 요즘 아가씨들을 만나도 사랑한다는 말은 절대 하질 않습니다. 

모두가 아는 사랑의 칼날을 알기 때문에. 아훔. 이모티콘을 날려드리고 싶어라. 2009-05-02
23:48:48
 

 

상병 김태완 
16.48.3.118   문득문득 떠오르겠지만 나중엔 잊혀집니다. 
가끔씩 가슴시리도록 아프겠지만 추억들은 희미한 형태로 남아 있다가 결국 사라집니다. 
추억이 남아있음에, 내 가슴이 아픔에 감사합니다. 

만남과 헤어짐의 필연적 고리와 그것들의 소중함에 대해 깨닿습니다. 
남을 대할 때 더 진지하게 대하려 합니다. 
그들을 잃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기분입니다. 
후회와 눈물로 채운 잔을 마시며 오늘 난 한단계 더 성숙합니다. 

그것이 인생 아니겠냐며 소탈하게 웃습니다. 2009-05-03
02:10:25
 

 

병장 김형태 
54.4.11.94   떨림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해도, 이미 사랑은 사랑으로 남아 우리기억속에 영원히 존재하겠죠. 그 시간, 그 때에 우리가 얼마나 충실히 임했고, 설사 이제는 우리가 아닌 너와 나 일지라도 그 순간 순간에 사랑의 쟁취를 위해 조금더 조금더 하며 노력했다면 이미 사랑은 사랑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이라는 말이 그 후에 찾아오는 것들에 대해서는 사랑이라는 말보다 다른말들로 표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자기 방어적일 것임에 분명하지만 사랑을 사랑이라 표현하기에 부끄럼 없을때에 저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2009-05-04
07:27:32
 

 

병장 김형태 
54.4.11.94   맞다, 추천한방 2009-05-04
07:29:19
 

 

상병 정근영 
20.3.1.98   우현 / 비슷하게, 예전에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드랬죠. '내가 죽으면, 과연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는가?' 하는. 며칠이 지나고나니, 이제는 조금 무뎌졌군요. 이틀이 멀다하고 들락날락하던 사이버방도 요즘은 잘 안가고, 자려고 누우면 그렇게나 아른거리던 영상들이 떠오르지 않네요. 아, 물론 그녀의 꿈은 아직도 꾸고 있기는 합니다. 허허. 오늘은 비가 내려서 그런지, 유난히 센치해지는 기분때문에 저도 모르게 전화기를 들 뻔했군요. 

무준 / 저도 잠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다시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하는. 아직 잘 모르겠군요. 운명적 사랑이 짠-하고 제 앞에 나타난다면 모를까. 

태완 / 그러게 말입니다. 어쨌든간에 인간은 아픔으로 인해 성장하고, 고통받으면서 성숙하게 마련이니까요. 요즘은 그녀를 위해서나, 저를 위해서나 오히려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형태 / 그래요. 언젠가 동석씨가 제 글에 이런 댓글을 달았던 적이 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의 그녀는 휘발되고, 기억 속에서만 살아있는 거라고 했던가요. 거의 8~9개월 전이라 가물가물하군요. 그런데, '순간순간에 사랑의 쟁취를 위해 조금더 조금더 하며 노력했다면'이라는 말이 살짝 걸리네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가 그렇게 노력한 것 같지는 않아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녀에게 그렇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걸요. 좀 더 사랑해주지 못해서. 좀 더 노력하지 못해서. 2009-05-15
21:23:40
 

 

병장 최경빈 
22.66.33.103   낡고 흔한 멘트 하나 날리겠습니다. 

'저랑 비슷한 상황이셔서 공감이 가네요' 


글체는 다르지만 마치 제가 쓴 글처럼 느껴졌습니다. 가슴이 아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