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새벽 세시의 냉장고  
병장 이동석  [Homepage]  2008-10-26 07:06:28, 조회: 297, 추천:1 

새벽 세시의 냉장고 

간만에 온전히 홀로 남았다. 지긋지긋한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적당히 미지근하니 속이 쓰린다. 새벽 세시의 냉장고라는 시가 있더라. 새벽 세시에 냉장고를 뒤지는 인간은 그 정도의 시밖에 못쓰는 인간이라는 뭐 그런 자조적이라고 단정 짓기엔 미안한 시를 떠올리며, 새벽 세시에 냉장고를 열어 본다. 당연히 먹을 거라곤 식당에서 업어온 김 몇 개 밖에 없다. 진이정의 유일한 시집을 보내준 누나는 <인간실격>도  보내주었다. <자기 앞의 생>인가 하는 책을 받은 지 삼개월만 이었다. 그리고 누나는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하는, 만화 <원피스>를 좋아하는 형이라고 부르긴 조금 어색한 나이의 남자와 사귀기 시작했다. (원피스와 원피스를 좋아하는 이들을 폄하할 의도는 전혀 없다. 나도 좋아하는 만화니까) 



인간실격 

나 같은 인간이 새벽 세시에 이곳에서 홀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다. 삼주 만에 피는 열세 번째 담배를 물며, 참 상투적이라고 생각한다. 기껏해야 담배로 밖엔 내 공허함이나 뭐 그런 것들을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금연이 좋은건 하룻밤에 담배 한 갑쯤 펴도 괜찮다는 거지. 그리고 휴일이 있는건 오일간 착실하게 살았으니 하루 이틀쯤 막살아도 된다는 거고. 그 하루 이틀쯤을 술에 취해 버리는건 그야말로 진부한 일 같다. 그런데 별수 없지 않나. 오일간 술을 안 먹는건 하루 이틀쯤 술에 쩔기 위해서니까. 

새벽 세시, 유료 영화채널은 어쭙잖은 에로영화를 틀어재낀다. 현란한 제목과는 달리 어설픈 미끄러짐만 가득한, 소쉬르의 세계가 펼쳐지고, 별수 없이 성을 내는 페니스에 할일 없는 손이 간다. 그런데 도저히 저런 신음소리를 들으며 사정을 할 순 없었다. 대신에 오줌을 싸갈기며 어째서 오줌을 싸고 있는 도중에 똥이 마려운 것인지, 왜 오줌을 끊고 변기에 앉으면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해, 기표-기의의 관계처럼 미끄러지기만 하는 에로영화 제목과 내용의 연관에 대해 생각한다. 



리얼 인터뷰 

결국, 정액도 똥도 싸갈기는데 실패했다. 끊어버린 오줌이 요도 끝을 맴도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다시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제목은 <리얼 인터뷰>라는데 소리를 아무리 키워도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다. 구형 텔레비전 모노 스피커에 귀를 대고 있자니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에 오줌 몇 방울이 요도로 새어나올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인터뷰라는 건 일종의 에로영화배우 면접인 셈이다. 감독인지 뭔지 하는 양아치자식이 사무실인지 뭔지 알바 없을 곳에서 조악한 디지털 캠코더로 카메라 테스튼지 성상납인지를 강요하는 뭐 그런 내용인데, 이번만은 ‘리얼’이 미끄러지지 않았다. ‘공사’치고 끝없이 미끄러지던 성기들은 이번만은 진짜로 결합해버렸다. 

그런데 나는 흥분해버렸다. 아니, 페니스와 불알은 오그라드는데, 정말로 흥분해버렸다. 그러니까 이건 리얼이건 리얼이 아니건 간에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건 해외에 등록한 도메인으로 장사하는 야동사이트도 아니고, 프루나에 올라온 몰래카메라 유출본도 아니고 스카이 라이프에 몇 천원만 더 내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유료가 무색할 만큼 영화를 늦게 틀어주는 채널을 수신하고 있는 골드스타-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건 정말이지 내가 인간-인데다, 페니스-와 불알-을 차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난 이성애자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건 연기일수가 없다. 에로배우들의 연기력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건 그저, ‘리얼’이기 때문이다. 아 이런, 병X같으니. 그런걸 핑계라고 대고 있다니. 

오줌이 몇 방울인가 흘러나온 것 같다.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여자의 옷을 벗긴 건 카메라 뒤의 목소리였다. 남자는 탁자 밑으로, 정확히는 여자의 치마 속으로 카메라를 비추면서 한껏 거드름을 피운다. 이상한데 올리는 거 아니죠? 그냥 카메라 테스트라니까. 저 집에 가야 되는데. 아무것도 안 보여주고 그냥 가려고? 진짜 하는거에요? 원래 진짜 하는 거야. 그건 포르노잖아요. 에로는 뭐로 덮고 하는 척만 하는 거잖아요. 에로는 그게 안보이게 하는 거고, 포르노는 그게 보이게 하는 거야. 가만히 있어. 카메라 보고. 네 몸이 예쁘게 나오게 포즈를 잡으란 말이야. 



정성과 기술 

가장 최근에 포르노를 본건 친구의 자취방에서였다. 친구는 학교를 갔고, 나는 술똥을 싸고 무거운 몸뚱이를 컴퓨터 앞에 앉힌다. 영화를 보려고 켠 동영상 뷰어에 <정성과 기술>이라는 파일이 걸린다. 한 시간짜리 일본 포르노에는 뭔가 어설퍼 보이는 젊다기 보단 어린 여자가 낑낑대며 겨우 무거운 남자를 견뎌낸다. 페니스를 애무하며 카메라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을 보는데 갑자기 기분이 눅눅해졌다. 빨리 감기. 인정사정없이 찔러대는 남자를 버텨내는 여자의 비명에 실컷 흥분해 자위를 하고 나니, 축축해진다. 두루마리 휴지, 손바닥, 팬티와 음모처럼 축축해지는 기분으로 멍-하니 아직도 끝나지 않은 포르노를 보면서 인간에겐, 아니 나에겐 왜 이렇게 섹스가 많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한다. 눅눅한 섹스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내게 인간의 자격이 있는 것인지, 화면 속 여자를 동정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한다. 휴지를 변기에 넣고 내리면서 하수구가 막히지나 않을까 걱정하기 전까지만. 

그리고 나선 사주팔자를 보러갔다. 친구들의 부추김 섞인 추천도 있었고, 딱히 할일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복채가 만원을 넘었다면 그딴거 안 믿는다며 말았을 것이다. 집과 사무실을 겸한 철학원에서 철학책 꽤나 읽었다는 이 시대의 대학생 셋은 80년대 학번으로 전 시대에 팔뚝 운동 좀 하셨다는 아줌마 앞에 둘러앉았다. 85년 소띠, 음력 8월 6일에 정오에 태어난 나는 소와 말이 만나는 뭐 아무튼 그러면 안될 것 같은 살이 끼어있었다. 아줌마는 몇 천원인가의 돈을 받고 철학책은 읽어봤지만 막상 점심 메뉴 고르는 철학도 없는 어린양 셋에게 정성스럽게 조언을 해주었다. 뭔 말을 해봐라 내가 믿냐는 식으로 성가시게 굴었던 나를 수긍하게 만드는 아줌마를 보면서, 내 팔자에 ‘기생살’이 끼어 있다는 말에 내심 찔려하면서, 건강운이 좋아 술병에 성병 말곤 걱정 없겠다는 말에 코딱지를 튀겨가며 웃는 친구들을 잠시 흘겨보면서 이것이야말로 능수능란한 기술이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나는데, 기생살이라면, 내가 기생의 팔자라는 것인지 내가 기생에게 혹할 팔자라는 것인지를 안 물어봤다. 

사실 혈액형이고 별자리고 오늘의 운세고 심리테스트고 전부 개소리정도로나 여기면서 들으면서 잊어버리던 내가 사주팔자를 아직까지 신경 쓰고 있는 건, 함께 봤던 친구 녀석들의 확인사살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폐부를 찔렀던, 아줌마의 분석 때문이다. 여자를 좋아하고 역마살이 있고 뭐 그런 것이야 누구라도 때려 맞출 수 있겠지만, 술독에 빠져 부은 얼굴로 추레한 차림을 한 배불뚝이가 난봉꾼이라는 근거를 어디서 찾았는지 난 아직도 가늠할 수 없다. 부모님이 날 야동이나 보는 찌질한 동정남쯤으로 간주하는 건 그렇다 쳐도(동정남이 찌질하다는게 아니라, 내가 찌질하다는 것이다) 나를 잘 아는 녀석들조차도 나의 연애사-라기 보단 난봉일기-를 불가사의하게 여기는데 겨우 사주만 보고 책 몇장 뒤지고 나서 그걸 때려 맞추는걸 빤한 레퍼토리로 보긴 어렵다. 아마 이런 것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주팔자를 보고 심리테스트를 믿기 시작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밭 다 갈아놓고 씨까지 뿌려놓고 역마살을 못 이겨 추수도 하기 전에 도망가 버리는 나를 발견하게 된 건 단연코 아줌마의 기술 덕이다. 다년간의 사람 보는 경험에 기반을 두어 때려 맞추고 언변으로 때우는 것이라고 가정해도, 나름 자아성찰 좀 한답시고 해봐야 어째서 제 인생이 이렇게 허한지 깨닫지 못하던 내게 실마리를 준건 확실하기 때문이다. 



싸구려 커피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를 밤새 듣고 있다. 새벽 세시에 열어젖힌 냉장고는 6시가 되도록 닫힐 줄을 모른다. 몇 시간 만에 담배를 두 갑이나 피워재꼈다. 삼주동안 참아봐야 어차피 이런 식이라면, 애초에 금연을 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적당히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린다. 이건 뭔가 아니다 싶어 종이컵을 보니 아까 담배를 끈 컵이다. 

속도 안좋고 머리도 무거워서 바람을 쐰다.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처마 밑에 쭈그려 앉아보니 벌써 동이 터오는데 이건 뭔가 아니다 싶다. 몇 년간 세숫대야에 고여 있는 물 마냥 완전히 썩어가지고 이건 뭐 감각이 없어. 누나에겐, 여자친구였던 이에겐, 새벽 세시의 냉장고에겐, 그 정도밖엔 안 되는 내 삶에겐 사과 한마디 안했으면서 자위 뒤에 찾아오는 공허함처럼 스치는 죄책감으로, 싸구려 동정으로 속이 쓰린 건 그야말로 ‘리얼’한, 기표와 기의가 진짜로 결합하는 위선이 아닌가. 



친누나도 사촌누나도 없지만, 누난 너무 예쁘다고 말해왔던 나에게 

사실 누나는 나를 실격시킬 자격이 있다. 그리고 형이라고 부르기엔 죄송한 나이의 그 형은 머리는 벗겨져가도, <원피스>를 좋아하더라도 누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담배꽁초를 입에 머금은 뒤로 배가 아파서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비웠고, 적어도 몇 시간동안은 섹스가 필요 없을 정도로 피곤하다. 오늘도 인간들은 야동을 찍고 팔고 올리고 받고 보겠지만, 그런 것들엔 알바 없을 정도로 피곤하다. 사정 후에 말끔히 사라져버리는 성욕처럼, 모니터와 텔레비전속의 벗은 여자들에 대한 죄책감이나, 동정심도 사그라들었다. 유료 영화 채널의 에로영화 시간대도 끝나고 한물간 ‘그냥’ 영화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마지막 담배를 하나 피고, 이를 닦은 다음 축축한 이불로 기어들어가야겠다. 내일은, 이제 오늘은 아마 해를 보기 힘들지 싶다. 



무엇보다도

정말이지, 모두에게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정말 정말.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8:49:15 

 

상병 이우중 
  아, 이런 키취적(?) 감성이라니요. 
끝없이 미끄러지는 소쉬르의 세계에서 뻥 터졌습니다. 허허허. 2008-10-26
07:58:31
  

 

병장 문두환 
  아, 이건 제목만 보고 상상했던 내용과 너무 다르네요. 포르노의 제목을 보면서 소쉬르를 떠올리시다니. 허허. 그건 그렇고 뭐라고 해야 할까요? 열정적이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페미니즘 잡지 발간에 공을 들여온 친한 친구 덕에 어깨 너머로 페미니즘에 관한 담론을 보고 듣거나 관련된 연극을 같이 보러 다니고 수 차례에 걸쳐 일상에서 일어나는 성 문제에 대해 토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군지도 모르는 우리나라의 일본의 미국의 프랑스의 여자들이 옷을 벗는 것을 소비하듯이 다운 받았던. 그때 저도 동석님이 써 놓은 '눅눅한 섹스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내게 인간의 자격이 있는 것인지, 화면 속 여자를 동정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했던 것 같네요. 초등학교 때였나, 그때 나눠준 성교육자료에서 '자위행위는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포르노를 보면서 자위행위를 하는 것이 권장할 만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 덩달아 속이 쓰린 느낌이에요. 커피를 4잔 마셔서 그런걸까요. 2008-10-26
08:14:54
  

 

상병 양순호 
  그러고보니 CGV에서는 일본에서의 C급 영화를 틀어주더군요. 
은은하게 비쳐오는 살색과 조용한 한밤중을 더욱 더 조용하게 하고 
침넘어가는 소리만 들리게 해주는 영화였어요. 아. 

이런 댓글을 쓰는건 다 동석님 탓이에요. 에잇. 2008-10-26
12:15:57
  

 

상병 양순호 
  더 중요한건 전 보다 잤다는거네요. 에잇에잇. 2008-10-26
12:16:17
  

 

상병 김무준 
  아 오랜만에 실컷 웃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2008-10-26
22:19:41
  

 

병장 고동기 
  사정을 기점으로 삶이 리셋되는 것 같아요. 
지난 주말에도 리셋하고 돌아왔네요. 후 2008-10-27
09:54:07
  

 

병장 정병훈 
  이런... 남자라면 다들 생각해봤겠죠 뭐. 

그나저나 정말. 휴 ~ 2008-10-27
20:29:10
  

 

병장 이동석 
  어익후, 써놓고도 잊어버렸던, 그런 글입니다. 재밌게 봐주셨으면 감사하지요. 허허. 

두환/ 그런 내용와 기조의 글을 진지하게 쓸 능력이 제겐 없는것 같아요. 그래서 겨우 생각해낸게 겨우 이런글이지요. 흑. 2008-10-28
18:39:32
 

 

상병 양순호 
  아.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를 듣고 나서 이렇게 보니까 참 달라보여요. 세상에나. 2008-11-09
09:2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