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상병 정근영   2009-02-07 20:34:45, 조회: 380, 추천:1 

1월 초였던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마이너들과 회식을 할 기회가 있었다. 평소에도 '애인 안 도망갔냐'는 악의없는 장난을 자주 하시는 마이너께서 뜬금없이 그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예기치 않게 내 쪽으로 화제가 집중되었고, 여느 때 같았으면 웃으면서 넘겼을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헤어졌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상에 여자는 많다', '더 좋은 여자 만날거다'라는 둥의 진부한 조언들에 넌더리가 나려던 찰나, 과장님께서 '그래, 그런데 그 애랑은 자봤냐?'며 장난섞인 질문을 하셨고, 애써 평정을 가장하고 있던 나는 그 말 한 마디에 입술을 깨물었다. '가볍게 만나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으나 억지로 삼켜내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이 제멋대로 나와 그녀의 관계를 규정짓고, 장난이라 할지라도 노골적으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불쾌했지만, 자리가 자리인만큼 내멋대로 분위기를 망쳐놓을 수는 없었다. 대신에 나는 담배를 빼어물고 서늘한 밤바람이 몰아치는 바깥으로 나왔다.


12월 26일, 마지막 설탕을 먹었던 11월 중순부터 약속해왔던 27, 28일의 짧은 출타를 앞두고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12월 중순부터 영 전화받을 때의 목소리가 밝지 않아서 내심 걱정을 하고는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조금 기다리면 풀어질 거라 생각했다. 밝은 목소리로 장난을 치며 그녀가 어서 웃기를 기대했지만, 이번에도 그럴 거라는 나의 기대는 착각으로 끝나버렸다. '야, 뭐야. 왜 이렇게 반응이 시큰둥해. 내일 나 만나기 싫은 거구나?'라는 내 장난에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나는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나는 이별을 직감하고 만나서 얘기하자고 그녀를 달래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가슴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차가운 대답뿐이었다. 한 번도 자기 맘대로 전화를 끊어버린 적이 없던 그녀는 내가 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자 망설임없이 전화를 끊어버렸고, 나는 한참동안 날카로운 비프음을 뱉어내고 있는 수화기를 멍하니 들고 서 있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도 갑작스레 찾아온 이별통보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느 때 같으면 금방 다시 사이가 좋아졌을 텐데, 나는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런 결정을 내리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나는 다시 그녀의 전화번호를 누를 수가 없었다.


예정되어 있는 날짜를 바꿀 수 없어서 나는 내키지 않는 마음을 추스리며 집으로 향했다. 평소였으면 벌써 핸드폰으로 도착해 있어야 할 그녀의 문자는 온데간데 없고, 한 달 전의 온기를 담고 있는 잘 들어가라는 마지막 메세지가 날 맞아주었다. 당장에 그녀의 집으로 달려가야 했지만, 의욕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올 날카롭고 잔인한 말들이 내 가슴 속을 헤집어 놓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그래, 나는 이기적인데다가 겁쟁이이기까지 했다. 그녀의 변해버린 마음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도 없었고, 이별의 순간에 내 마음이 다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늦은 밤 집 앞 편의점에서 맥주를 한 병 사놓고 담배를 피웠다. 한참이나 망설인 끝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 쓰린 마음을 달래고자 맥주를 한 입 삼켰으나, 어찌된 일인지 여전히 술은 씁쓸하기만 했다. 새삼 술을 못 마시는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차라리 술이라도 마음껏 들이붓고 뻗을 수만 있다면 잠시나마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감정의 편린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텐데. 아무래도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끝낼 수는 없었다. 끝날 때 끝나더라도 얼굴을 마주하고 속시원하게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다음날, 연락도 없이 무작정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면도도 안 하고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씻지도 않은 채 초췌한 모습으로 집을 나왔다. 그리고는 그녀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몇 시쯤 집앞으로 갈테니 나와달라는 말을 전해달라 부탁하고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거의 다 도착할 때 즈음 그렇게 전화를 해도 받지 않던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고, 역시나 그녀는 자꾸 왜 이러냐며 짜증섞인 말들을 몇 마디 내뱉으며 역 앞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거의 한 달여만에 만난 그녀는 얼굴이 많이 야위어 있었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그녀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 것인지 짐작하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내가 몰랐던 순간에 울며 밤을 지새웠을 그녀를 생각하자, 가슴 한 구석이 먹먹했다.


겨우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사랑을 속삭였던 그녀의 입술은 무척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그만 하자고 말했다. 그녀를 위해 노력이나 한 번 해봤냐고, '미안해, 앞으로 더 잘할게'라는 말이라도 한 번 해본 적 있냐고 냉정하고 쌀쌀맞게 날 쏘아붙였다. 언제나 부드럽게 나에게 말을 걸던 그녀가, 속상한 일이 있으면 울음부터 터뜨려 나를 당황하게 하던 그녀가,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못하고 끙끙 앓기만 해서 나를 답답하게 하던 그녀가, 내 가슴 속을 사정없이 후벼파는 날카로운 말들을 내 가슴이 시릴 정도로 차갑게 내뱉었다. 화가 나기보다는 마음이 아팠다. 2년이 넘게 사귀었음에도 내가 모르는 그녀의 모습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슬펐다. 내가 한 번이라도 그녀의 입장이 되어 생각했다면,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있었을텐데 왜 난 그러지 못했을까. 그녀의 속이 얼마나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나는 비겁한 변명과 핑계만을 늘어놓기 바빴는지. 뒤늦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와 내 가슴을 적셨다. 눈물은 보이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이 볼 위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쿨하게 보내주자던 내 다짐은 어디 갔는지, 나는 끝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담배의 유일한 좋은 점은 실은 그 사람이 내쉬고 있는 한숨을 감춰주는 것이라 했던가. 나는 나조차도 모를 감정의 조각들이 휘젓고 있는 불안한 내 모습을 감추려 그녀가 떠난 그 자리에 한참이나 서서 애꿎은 담배만 계속 태웠다.


한 달여가 지난 1월 말까지, 이상하게도 난 별로 슬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허전함과 쓸쓸함이라는 감정은 느꼈으나, 그것은 그동안 내 곁에 있어주던 그녀가 없기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었고, 우리의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아닌 듯 했다. 문득, 그녀가 헤어지면서 했던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라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붙잡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습관처럼 중얼거렸던 그 말이, 애써 내가 외면해왔던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으리라.


일주일쯤 전에 4.5g의 설탕을 먹고 돌아오면서,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지갑속에 들어있는 그녀와 마지막으로 찍었던 스티커 사진을 꺼내어 주머니에 넣었다.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싣고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을 뒤로 하고 그 사진을 꺼내는 순간, 눈 앞이 뿌옇게 흐려져왔다. 아,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애써 외면하고, 마지막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 자위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순간 내 눈 앞을 적시는 짭짜름한 액체는, 우리가 함께해왔던 순간들이 거짓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와 함께 걸었던 거리와 풍경과 그 시간들이 생각나 새삼 마음이 아련해져 왔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오로지 변한 것은 우리 뿐인것 같아 마음이 서글퍼졌다. MP3에서는 아직도 그녀와 함께 있던 콘서트장에서의 노래들이 흘러나오고, 함께 갔던 장소들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모든 것이 끝나버린 지금, 우리의 사랑은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몇 장의 사진과 희미한 잔상만이 남아있는 서로의 추억들만이 기억하고 있겠지.


작은 슬픔은 그 자리에서 울고 다시 설 수 있지만, 큰 슬픔은 사람들이 자신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조금씩 찾아와 계속 마음문을 두드리는 거라고 했다. 죽을 만큼 아프지는 않지만, 가슴 한 구석을 쥐어질린듯이 먹먹한 느낌은 아마 이 겨울이 끝날 때까지 나를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성급히 잊어버리려고 노력하지 않으리라. 사랑하고 있는 그 순간만이 사랑은 아니니까. 사랑한 만큼 아픈 헤어짐과 잊혀짐 속의 서글픈 외로움 역시도 사랑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그녀를 잊지 않으리. 언젠가 추억 속에 남겨진 우리의 모습을 되새기며,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을 수 있기를.


혹시 그녀는 알고 있는까. 그녀가 헤어짐을 말한 12월 26일이 우리의 777일째였다는 걸.
7은 행운의 숫자라고들 하는데, 왜 그 행운은 우리를 빗겨갔을까.



헤어짐이 슬픈 건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만남의 가치를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쉬운 이유는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그 빈자리 속에서 비로소 빛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건 사랑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야 알게되기 때문이다. - 「사랑후에 오는 것들」, 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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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09:44:47 

 

병장 정병훈 
16.35.11.88   아아... 2009-02-07
20:44:03
 

 

병장 정병훈 
16.35.11.88   어리석은 동물이라 모든것의 영장이라 생각하지만 결국은 몽매한 인간입니다. 가지고 있을때는 가진것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 하지 못하고, 잃었을때 그때야 비로소 가지고 있을때의 감사함을 느낍니다. 사랑얘기인줄 알면서도 읽었고. 2009-02-07
20:50:02
 

 

상병 정해룡 
18.96.1.14   아아,...나도 지금 문득 걱정과 안타까움이 교차합니다 2009-02-07
21:15:42
 

 

병장 김민규 
22.34.42.32   아이고. 일부러 아껴놓았다 읽었는데, 또한번 찡하네요. 가지路 외치고싶은데 근영씨 마음 한구석에 영영 박아놓는 일이 될 것 같아서, 그냥 이번에는 조용히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바보같이, 아침부터 칭얼대고 있다니 

만감이 교차하는데 한 마디밖에는 못 하겠어요. 힘내요. 행복합시다. 2009-02-08
07:54:13
 

 

일병 오효섭 
7.5.1.143   글을 읽고 갑자기 여자친구에게 전화해야겠다는 생각이.. 
이틀전 갑자기 화나가서 전화 끊었던 기억이 덜컥 . 
지금 전 전화하러 갑니다. (한숨) 2009-02-08
15:0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