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빌어먹을, 상병 최후의 날  
상병 김무준   2009-01-26 23:06:29, 조회: 120, 추천:0 

회사에 입사해 신입사원 연수를 받던 시절부터 아련히 원하던 것이 있었다. 남들보다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연수시험을 잘 친다던가, 집중력이 좋아 표적을 잘 맞췄기에 전화는 제법 많이 했다. 편지도 자주 받는 편이었고. 군것질에 대한 욕망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간절히 바라던 건 연수를 마치고 아무것도 달리지 않은 가슴팍에 작대기 하나를 다는 게 아니라 배터리 네 칸을 채우는 것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배터리는 한 칸 한 칸 채워나가야 한다. 하늘에서 산업스파이가 낙하산을 타고 떨어져 덜컥 손에 쥐어지지 않는 한 이건 사원 모두를 통틀어 마찬가지니까.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고, 회사의 배터리는 급속충전이 불가능하다. 오로지 기다리고 인내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밖에 없었다. 한 칸 때도, 두 칸 때도, 세 칸인 지금도 꿈꾸는 것이 배터리 네 칸의 충전이었다. 개구리 마크를 다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배터리 네 칸을 향해 달려왔다. 유혹과 시련을 거치며 모두가 그러하듯 이제는 마지막 배터리를 채우는 것이 남았다.

며칠 뒤면 간절히 바라던 소망이 이루어진다. 이 배터리라는 게 입사만 하면 자동적으로 채워지는 것이지마는, 설렘은 최고조에 달해있다. 꿈이 이루어지려 하는 것이다. 조금은 엉뚱할지도 모를 꿈이지만, 꿈꿔왔기에 꿈이었고 꿈이 현실이 되려한다. 꼭 산타의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완전충전을 의미하는 조각을 기다리는 중이다.

인간은 꿈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꿈꾸던 꿈을 다 먹고서 현실에 직면할 시기가 다가오니, 미래를 걱정하게 되었다. 주어진 현실은 퍽이나 단단하다. 깨뜨릴 수 있을까. 해머도 없고, 드릴도 없고, 삽도 없다. 오로지 주먹으로 때리고 또 때려서 이 벽을 부숴야 하는데, 잠만 쿨쿨 자면서 꿈에 취해있던 깽깽이 나부랭이가 벽을 깰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당신들에게 묻는 것이 예의라 생각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유월 쯤에 아마도 퇴사를 할 것 같은데, 서울에서 생활하고 싶다. 하다못해 전세금 몇 푼이라도 마련해 줄 수 있느냐. 경기가 어렵고, 집안 형편은 더더욱 어렵기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역시나 아무것도 도와줄 수가 없단다. 예상은 했지만 왠지 입맛이 씁쓸했다.

악연으로 똘똘 뭉친 입사 동기는 전세금은 자기가 댈 테니 영등포에서 함께 살자고 졸라댄다. 이게 몇 달째인지. 회사의 요리를 도맡아 하는 요리사이기에 집걱정, 밥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테다. 월세만 둘이서 쪼개 내면 되겠지.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기로 약속도 했고. 어떤 일을 할 것이며, 어떻게 생활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뿔싸. 현실이 눈앞에 다가오니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최선의 선택으로 최상의 시나리오를 써야만 한다. 대학에는 가야겠고, 전문대라도 등록금은 비쌀 테고, 학자금 대출을 받자니 이자가 겁나고, 장학금을 탈 수 있을까, 이래저래 돈 문제로 고민하다보니 일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럼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가뜩이나 우석훈의 팔십-팔 만원 세대를 읽고 있는 마당에, 밝고 희망찬 미래를 그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비정규직으로 일을 한들, 주오일 근무에 하루 여덟 시간에서 열 시간의 근무타임에 최저임금을 보장하면서 보험이 적용되는데다 안정적인 직장이 있을까. 차디찬 사회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업주들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이러이러해서 돈이 필요하고, 공부가 하고 싶다 말한들 씨알이나 먹힐까. 글쎄 말이다.

공부를 하자니, 돈이 문제고. 돈을 벌자니, 공부가 문제다. 대학에는 올해 꼭 가야겠다. 수능을 본다손 치더라도 입학하면 나이가 스물 셋이다. 전문대라도 졸업하고 나면 스물다섯이다. 일 년을 포기하고 돈을 벌어 바짝 수능공부를 해 대학에 가면 일일 학번에 스물여섯이 될 테다. 이런 지쟈스 크라이스트. 그 나이에 취직자리를 알아본들 전문대 졸업장 가지고 있는 스물여섯 노땅을 쓸 회사가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답이 나왔다. 공부를 할 수 있으면서도 하루 여덟 시간 근무에 주오일제. 밥 주고 돈 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는 최고의 직장. 바로 공사였다. !@#$%^&*()_+ 아아. 어쩌란 말이냐. 머리는 기회비용을 따져보면 최선의 선택이라 부르짖는데, 마음은 야이 미친-놈아 네가 정녕 돌아도 한참 돌아 개념을 안드로메다가 아닌 우주 저편으로 날려먹었구나 하고 채찍질한다.

당신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일단 그렇게 하면 아무래도 편하지 않겠느냐 말한다. 아니, 뭐.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육 개월 아르바이트 한다 치고 일하면 다른 직장보다는 편하겠지. 남 밑에 들어가 다시 빌빌대고 신뢰를 쌓을 필요도 없고. 이년가까이 봐온 사람들과 정규직을 함께 하는 것이니, 보험도 되겠다. 호봉도 처음부터 정규직을 선택한 이들만큼 쳐주겠다. 나쁜 건 아니다. 그러나.

숱한 트레이닝과 간혹 터지는 브이아이피의 방문 크리티컬. 보디가드 일을 하니 이건 피할 수 없는 문제다. 미국 대통령이 바뀌고, 수시로 회담이 열리는데 올 한해 주요 인사들이 국내외를 뻔질나게 드나들 것은 불 보듯 빤한 일. 아무리 육 개월이라지만, 수능을 한 달 남기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 알고 있던 것도 스트레스로 홀랑 까먹으리라.

어떠한 선택이 최선일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구회 말 투아웃을 책으로 낸다 치면, 그 절차는 얼마나 복잡할까. 여기저기 출판사에도 찔러보며 다녀야 하는데, 일하랴 공부하랴 돌아다니랴. 아주 그냥 몸이 세 개였다면 소원이 없겠다. 한 놈은 돈 벌고, 한 놈은 공부하고, 한 놈은 잡다한 일 정리하면서 뛰어다니면 될 텐데. 안타깝게도 몸뚱이는 하나다. 도라에몽 도와줘요. 어디로든 문과 요술주머니가 필요하단 말이야. 캬아아악.

사람은 꿈을 꾸며 살아가야 한다. 앞으로 닥칠 현실적 문제들은 꿈이 아니다. 스물에 들어서면서부터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타협해 최선의 선택을 끌어내는 법을 배워왔다. 무엇이 최선일까. 어떻게 해야 할까. 꿈 언저리에 서서 남은 꿈을 죄다 먹어치우게 될 터인데, 새로운 꿈을 꾸자니 너무나 험난한 가시밭길이 펼쳐져 있다.

한 발 내딛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다. 밖에 나가도 똑같은 고민을 하게 될 것도 알고 있다. 살아가는 게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는 건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럼, 최대한 마음대로 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야 하는데. 이게 까나리 원 샷 복불복 토너먼트도 아니고. 간장인지 콜라인지 구분도 가질 않는데, 대체 뭐가 기회인지 알아볼 선구안이 없다.

배터리를 다 채우면 몸도 마음도 한층 편해질 줄 알았다. 그래서 완벽한 충전을 꿈꿔왔다. 근데, 이게 아니다. 치트키라도 써서 앞마당 멀티에 몰래 배럭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고 싶은데, 에라이 이 양반아. 그게 되면 온 세상 사람들이 죄다 물량토스로 테란을 박살냈겠지. 조이기에는 셔틀에 질럿을 태워 드랍하고, 리버로 응수를 해야 할 것 아니냐.

알고는 있는데, 머리가 너무 복잡하니 이게 맞는지 아닌지 도통 확신이 서질 않는다. 그 옛날 배터리 한 칸에 보던 완벽충전 선배들은 하루죙일 뒹굴뒹굴 노닥거리기 바빠 보였는데, 그네들도 똑같은 고민으로 뒹굴 거리고 있었던 게로구나. 미안하다. 솔직히 호박씨 많이 깠다. 이제 조금 이해가 된다. 제 몸 하나 먹고살기 바쁜 마당에 아가들 일이 눈에 들어왔겠냐.

어쨌거나 저쨌거나, 고민이 너무 많아 뒹굴 거리는 중이다. 혹시라도 이 텍스트를 읽는 훗날의 후배야. 지금 이러고 있는 건 절대 게을러서나, 귀찮아서가 아니란다. 정말 재수가 없다면 육 개월 동안 이 보기 싫을 낯짝을 더 보여주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후배야. 시간이 흘러 배터리를 다 채웠을 때는 이해할 수 있겠지. 지금 내가 이러는 것처럼.

엄. 그러니까. 미안하다구.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4:05:05 

 

상병 김상윤 
  딱 작년 이맘때가 생각납니다- 
다들 겨울산책을 나갔는데, 당시 큰형의 막내는 가지말고 집이나 보라는 말을 듣고, 
밤에 서서 이곳저곳 둘이 한시간동안 지켜보는일을 하고 있었어요, 
당시 저랑 같이 있던형은, 바로 다음날 설탕 마지막 숟가락을 먹을 예정으로 산책을 못갔었고요, 
그당시 저에게 너도 나때 되보면 마냥 좋을것 같겠지만, 먹고 살꺼 걱정은 점점더 심해진다고, 차라리 그때가 나을수도있다고 했더랬지요, 
물론 그때는 이게 왠 멍멍이소리인가 했지만, 지금 벌써 슬슬 압박이 옵니다. 
미쿡발 위기는 저의 계획을 다 망쳐주시고-. 
조용히 복학했다가, 궁에 오기 전에 계획했던대로, 시험으로 딴 자격증으로 먹고 살수 있는걸 알아봐야겠죠. 
이것참, 무준님보다 한달 늦게 배터리를 충전시키는데, 
밖에서의 일 걱정 80%에 안에서 점점 동생들을 괴롭히는것 같은 저에대한 고민 20%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아- 2009-01-26
23:29:48
  

 

일병 이상훈 
  술 한잔 마시고 싶은 밤입니다. 전 그런 고민하기엔 아직 입사한지 얼마 안됬지만요. 2009-01-26
23:34:36
  

 

상병 김상윤 
  먹고사는 준비에 걸리는 시간을 생각한다면, 
배터리가 한칸밖에 차지 않았을때조차 빠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건 대부분의 잔소리처럼 지나고 나서야 알수 있겠지만요 2009-01-27
00:16:37
  

 

병장 김지웅 
  난 뭐 병장되도 상병때랑 바뀐게 없으니 뭐 그려려니 하지만, 
나도 1월1일에 병장을 달아서 그런지 아직은 상병이 그립구려, 

그 이유인 즉, 

상병 한명 과 이등병 열명은 안바꾸지만 
병장 한명 과 이등병 열명은 뒤도 안돌아 보고 바꾼다! 

라고 외치신 저희 아버지 말씀때문인가 봐요. 아버지도 한 25~6년전엔 군인 이셧으니깐, 

훗 2009-01-27
00:18:46
  

 

병장 이동석 
  그 나이에 취직자리를 알아본들 전문대 졸업장 가지고 있는 스물여섯 노땅을 쓸 회사가 있을까- 

취업시장에서 전문대졸 스물여섯 군필남성은 노땅이 아니라 노멀입니다. 물론 노멀-이라서가 더 문제겠지만, 스물 여섯이 노땅이라뇨. 이사람아, 당신은 스물다섯 안될줄알어? 엉? (난데없는 나이타령) 

저도 이제 정말 얼마 안남았는데, 정말이지 먹고 살 걱정이 갑갑하군요. 전 일년 전까지만 해도 제가 복학을 꿈꾸리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어요. 그때를 기점으로 슬슬 집에 갈날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점점 복학쪽으로 기울더니 결국 복학 신청을 앞두고 있지요. 쯥. 

물론 막상 나가면 그 갑갑한 곳으로 돌아갈바에 차라리 새우잡이 배를 타겠다고 부산 어딘가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놔 환장하겠네요. 등록금은 왜 이렇게 비쌀까요. 2009-01-27
01:07:03
 

 

병장 위대한 
  이런 고민들을 다들 하지만 역시 다들 마찬가지 인가봐요- 딱히 답이 없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전역한 사람 중에 집안 사정이 좀 괜찮은 사람은 이번 달 29일에 뉴질랜드로 출국한다던데.. 마냥 부럽기만 하네요― 
확실히 집에 경제적 여건이 좋으면은 가장 큰 문제는 해결이 되니깐 자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것 같아서 부럽기만 합니다. 
남의 인생 말해봐야 아무짝에 쓸며 없기만 할 뿐이겠지 만서도 왜 자꾸 부럽기만 한 것일까요? 2009-01-27
01:30:54
  

 

일병 이영경 
  이미 스물여섯되버린 저는 노땅. 입지요. 2009-01-27
03:24:55
  

 

상병 김상윤 
  위대한/ 공지 읽고 수정좀 해주시길.. 2009-01-27
03:48:55
  

 

병장 남동진 
  제가 생각하는 퇴사후에 목표를 현실성에 맞게 수정하고 오차의 범위를 좁히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 이상은 이상 그 안에 일어나는 괴리감에 몸부림치다가 결국 선택한 부분은 밥은 못먹어도 공부는 하자는 겁니다. 하하 

아르바이트도 중요하지만 정작 나에게 필요한 것은 깨달음이니까요. 흐흐 2009-01-27
12:0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