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방해꾼 4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9-01-20 16:38:52, 조회: 85, 추천:1 

정신세계는 지독하게 넓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 정신적인 자극을 제외하면 그 존재를 유지하는 것에 다른 요소가 필요없는 정신적 존재들은 움직일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거의 이동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에 어떠한 이유로 이동을 할 필요가 있으면, 순간이동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동한다. 자신의 위치를 상상하면 몸이 따라오는 정신적인 방식인데 '어디어디 앞.'이라거나 '어디에서 어느 방향으로 몇m.'같은 표현법을 사용할 수 없는 텅 빈 정신세계에 사는, 상상력이 부족한 정신적 존재-삐에로는 자신이 지금 서있는 위치도 제대로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정신적 존재들과 같은 이동방식을 쓸 수 없었기에, 그저 걸었다.
한참을 걷던 삐에로는 자신이 어느새 누군가의 꿈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넋을 놓고 걷다가 눈치를 채지 못한건지, 아니면 자신이 걷던 곳에 꿈세상이 펼쳐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눈앞에 광활한 풀밭이 펼쳐졌다. 삐에로의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긴 풀들, 끝없이 높은 푸른 하늘, 깃털같은, 솜같은, 양털같은 구름. 온통 흰색으로만 가득했던 세상에 갑자기 나타난 선명한 싱그러운 자연은 눈을 찌르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와."
삐에로는 이 광경이 마음에 들었다. 적절한 햇살도, 따뜻한 바람도, 살랑이는 풀들도 좋았다.
"이런 건 어떻게 상상하지?"
삐에로는 아무래도 꿈세상의 주인을 먼저 찾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야 말로, 중얼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긴다.

한참을 걸었다. 정말 한참을 걸었다. 하지만 아직 꿈의 중심은 찾지 못했다. 걸어도 걸어도 맨 처음에 보았던 것처럼 허리까지 올라오는 풀이 시야 가득 펼쳐져 있다.
"뭐야, 여긴."
이쯤되면 어떤 꿈인지 궁금해진다. 누가 만든 세상인지, 왜 풀을 펼쳐놓았는지, 알고싶어진다. 궁금증과 약간의 오기로 계속 발걸음을 옮긴다. 한동안 걸음을 더 옮기자, 갑자기 풀이 사라진 곳이 나타났다. 풀이 없는 땅은 검고, 단단하고, 광택이 난다. 거울처럼 삐에로의 모습을 반사해 보인다. 
"이게 뭐지?"
몸을 숙여 바닥을 만져본다. 잘 연마된 대리석 같은 느낌이다. 차갑다. 매끄럽다. 고개를 들고 훑어보니 반듯한 검은 돌로 거의 길이 만들어져 있다.
"호오?"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매끄럽고 단단한 느낌이 발끝으로 전해진다.
"어째 계속 걷기만 하는 것 같은데?"
말속에 짜증이나 불만은 없다. 흥미를 잃지 않았다. 꿈의 중심을 찾아 계속 걷는다. 매끈한 바닥을 통해 자신의 모습이 계속 비친다. 검은 물 위를 걷는 것 같아 재미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다른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검은 길 위를 걷는다. 적당히 굽은, 상당히 넓고 일정한 폭의 길 양옆으로는 허리까지 올라오는 풀들이 펼쳐져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무의미한 공간은 의심스럽다. 갑자기 길이 끊긴다. 칼로 자른 것처럼 반듯하게 길이 끝나있고 그 경계에서부터 바로 풀이 빽빽하게 자라있다. 다시 풀숲으로 들어가볼까 하다가 털썩 주저앉는다. 바닥에 닿은 부분에서 차가움이 느껴진다. 기분 좋은 차가움이다. 따뜻한 바람이 스쳐지나간다.
"아무래도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은데?"
꽤나 난감한, 낯선 상황이다. 다시 바람이 스쳐간다.
"음?"
무언가 느꼈다. 아까보다 따뜻해진 것 같은 바람. 까치발을 든다. 주위를 둘러본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본다. 저 멀리서 붉은 것이 어른거린다. 검은 연기를 올리며 불이 타오르고 있다. 얼핏 보기에도 굉장한 속도로 번져가고 있는 것 같다. 금방 이 풀밭 전체를 태울 것 같다.
"어쩌면?"
고개를 치켜든다. 역시 대단히 섬세한 하늘. 눈을 정신없이 움직여 무언가를 찾는다. 멀리 구름 뒤에서 움직이는, 구름을 헤치고 날아다니는 검은 점을 발견했다. 얼핏 날아가는 새 같지만 새라고 하기에는 중요한 것이 없다. 손을 들어 검은 점을 따라서 움직인다.
"저기로."
상상력이 부족하다 해도, 가고싶은 위치만 정확하게 잡으면- 목표만 있으면 충분히 이동할 수 있다. 순식간에 몸이 하늘 위에 위치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늘 위가 아니라 날아다니는 물체의 근처에 위치를 잡는다. 물체가 이동하는 것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몸의 위치가 변한다. 가까이로 몸을 옮기고 나니 정체가 확실히 보인다. 이 꿈의 주인이다. 우선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본다.
"어떻게 날개도 없이 날아요?"
날개도 없이 하늘을 날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삐에로를 바라본다. 아무리 사람마다 제각각인 꿈속이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하늘을 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날개가 있거나, 망토를 두르거나, 아니면 입으로라도 바람을 내뿜었다. 비행을 연상하게 하는 무언가를 통해 자신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세요?"
되묻는 남자의 말투는 어딘가 미묘하게 이상했다. 누구인지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여기 있는 게 이상해요?"
-삐에로의 존재 자체를 의문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네."
"왜요?"
삐에로는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고 늘 솔직하게 물어보는 편이다.
"난 당신같은 사람 등장시킨 적 없거든요."
"어?"
삐에로는 조금 놀랐다. 지금 이곳이 꿈이라는 것을 아는 듯한 말투였기 때문이다.
"당신 여기가 어딘 지 알아요?"
"내 꿈속이죠. 내 꿈에 있는 당신은 누구에요?"
삐에로는 굉장히 기뻤다. 이곳이 꿈이라는 것을 알고있다면, 꿈이라는 것을 알려줘도 화내거나 울거나 실망하거나 관심을 잃지 않을테고, 그러면 친절하게 꿈을 상상하는 것을 설명해 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그러니까 정신적인 존재에요."
삐에로는 성심성의껏, 열심히, 차근차근 자신을,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아, 그러니까 무언가를 상상해내고 싶은 거군요?"
"네, 그래요."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만들고 싶은 게 뭔데요?"
꿈의주인, 날개 없이 하늘을 나는 남자가 물었다.
"네?"
삐에로는 얼빠진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상상하려면- 음, 목표? 원인? 이유? 하여간 시작점이 되는 무언가가 필요해요."
"시작이요?"
삐에로는 착한 학생이 되었다. 남자가 하는 이야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새겨들었고, 궁금한 것은 곧바로 질문했다.
"아, 이거 어렵네. 그러니까 아, 뭐라고 하지? 갈망? 하여간 생각의 시작이 되는 무언가를 원해야 하죠.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생각을 차근차근 벌려나가는 거에요."
"저기, 이해가 잘 안되는걸요."
"저도 설명이 잘 안되네요. 밑을 내려다보세요."
밑에서 봤을 땐 풀밭이 타고있는 줄 알았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넓은 풀밭에는 삐에로가 서 있던 검은 길 말고도 검은 길이 여러 군데 더 있었는데, 그곳이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길이 있던 자리마다 불꽃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뭐가 보여요?"
"검은 길이 타고 있네요. 풀밭은 그대로고."
"검은 길? 저 글자 안보여요?"
"글자요?"
"아, 우리 글자 몰라요? 말은 잘 하면서."
삐에로는 다시 설명했다. 지금 하고있는 것은 정신적인 대화라고. 상대방이 알아듣길 바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전달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구나. 신기하네. 어쨌건 저 검은 길은 사실 글자에요."
"그렇다면 저 글자가 모두 불타고 있는 거네요?"
"그렇죠. 어디서부터 설명할까, 그러니까 제가 제 의식을 가지고 꿈을 꾸고 있는 것을 루시드 드림, 자각몽이라고 불러요. 그리고 전 의식적으로 자각몽을 꿀 수 있도록 연습을 해뒀어요."
"왜요?"
"현실은 꽤나 아프거든요. 그래서 꿈이라도 원하는 대로 꾸고 싶었어요. 기운을 얻어가려구요."
"왜요?"
"꿈이라는 거, 중요해요. 아침에 좋은 꿈을 꾸고 일어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고, 악몽을 꾸면 하루종일 축 쳐져요. 우리는 좋은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고, 팔기도 하죠. 태몽은 어떤가요? 꿈 하나에 온 가족, 일가 친척이 기뻐해요."
"가짜잖아요."
"예, 가짜죠. 하지만 단순한 가짜가 아니거든요."
"왜요?"
"꿈 속에서의 나와 현실의 내가 완전히 다른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에 감정을 실으니까요. 꿈 속에서도 우리는 울고 웃고 화내요. 그렇다면 꿈을 꾸는 순간에는 꿈 속의 내가 살아 숨쉬는 나인거죠."
"에, 알 듯 말 듯 하네요. 조금 어려워요. 전 언제나 지금이 진짜라서요."
타오르던 불꽃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꿈 속의 내가 즐거웠다면 현실의 나도 즐겁게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기운나는 꿈을 꾸고 싶었어요. 그래서 연습하기 시작했죠."
불꽃이 꺼진 자리에는 검은 길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맨 흙이 그대로 보였다. 생각에 잠겨있던 삐에로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저 검은 길, 글자라고 했죠? 뭐라고 써있던 건가요?"
"저거요?"
꿈의 주인이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 입으로 말하려니까 창피하네?"
"뭔데요?"
"욕이에요. 못 읽었다니, 대단히 순화해서 말해드릴게요. 거지같은 병, 안녕. 이런 뜻이에요. 나 일어나면 아픈 몸이거든요."
흙이 드러난 자리에서 녹색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푸릇푸릇하게 돋아나기 시작한 풀들이 굉장한 속도로 자라서는 글자가 있던 자리를 메웠다. 글자가 있던 흔적은 사라지고 넓은 풀밭만이 바람에 흔들렸다.
"꿈에서라도 이렇게 병을 없애버리면, 기분 좋잖아요. 이런 거에요. 꿈을 상상하는 거 간단해요. 원하는 것을 위해서 차근차근 기분좋게 생각을 벌려 나가면 되는 거에요."
"아, 예."
"내가 알려준 거 잘 모르겠나봐요?"
"왜요?"
꿈의 주인이 고도를 서서히 낮췄다. 풀밭은 부드러워 보였다. 삐에로는 자신의 위치를 남자의 주변이라고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남자를 따라 높이를 낮췄다.
"별로 기뻐하는 것 같지가 않아서요."
"저, 하나만 물어볼게요."
"뭔데요?"
"꿈 있잖아요, 꿈을 꾸고 있는 사람에게 이것이 꿈이라고 알려주는 거, 나쁜 걸까요?"
둘은 풀밭에 내려앉았다. 두 명이 넉넉하게 앉을 수 있을만한 공간의 풀이 저절로 원을 이루며 누웠다. 둘은 사뿐하게 땅에 발을 디뎠다.
"네. 나쁜 일이에요."
"그렇군요."
남자가 딱 잘라 말하자 삐에로는 멈칫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지금 슬퍼요?"
"네?"
"지금 웃는 거, 삐에로 같거든요."
"삐에로 같다는 말은 자주 들었는데, 당신이 말한 의미는 다른 것 같네요."
"원래 삐에로는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이거든요."
"아, 지금 내 얼굴이 그래요?"
"네."
남자는 웃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12:26 

 

병장 이충권 
  저 검은 길, 글자라고 했죠? 뭐라고 써있던 건가요?" 

"저거요?" 

"황천길" 이요. 못읽었다니, 대단히 순화해서 말해드릴게요. 

이길을 가면 저승간다는 뜻이에요. 나 아픈몸이라 저승사자가 끌고 갈지도 몰라요. 

흙이 드러난 자리에서 녹색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누울 묘자리 인듯 싶었다. 

푸릇푸릇하게 돋아나기 시작한 녹색풀들이 굉장한 속도로 자라서는 벌초를 하러 

친척들이 오는 모습이 앞으로의 미래를 보여주는 듯 했다. 2009-01-20
17:54:21
  

 

일병 송기화 
  그리고 계약서를 들고 등장하는 313씨. 친구의 뒤를 이어 우수사원이 되겠다며 요즘 영업에 한참인데... 

죄송해요. 저승사자라는 단어에 반응했어요. 2009-01-20
18:23:55
  

 

병장 김민규 
  크크크크 
아, 초성체 1회 사용할 뻔 했다. 2009-01-20
18:52:40
  

 

일병 이상훈 
  굉장히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2009-01-21
02:31:55
  

 

병장 이동석 
  으으, 진짜 기화님은 특별전, 아니 아니, 송기화 단편집-이라도 내셔야 겠네요. 정말. 2009-01-21
06:42:55
 

 

병장 이동석 
  제가 꼭 문집 만들어서 송기화 단편전을 기어코 만들어내겠습니다. 2009-01-21
06:4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