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방해꾼 3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9-01-19 10:58:05, 조회: 92, 추천:2 

정신세계-라고들 불리는 곳은 정신적존재가 살며, 상상력이 이루어낸 꿈이 펼쳐지는 곳이다. 하지만 우연이 아니고서는 꿈이 서로 겹치는 일이 없을 정도로 넓기도 하다. 정신세계는 희고 넓다. 꿈이 펼쳐지기에 방해되는 것이 없도록 아무것도 없는 것인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꿈이 펼쳐지는 것인지 아는 자는 없다. 다만 이 아무것도 없는 넓은 곳에 사는 정신적 존재들은 끊임없이 정신적 자극을 요한다. 정신적인 무기력이 곧바로 존재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정신적인 존재들은 자신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내곤 한다. 물질적 존재들이 본다면 그저 놀이에 가까운 정신적 존재들의 세계창조는 물질적 존재의 식사만큼이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자신의 세계를 창조할만한 상상력이 없기에 남의 꿈에 기생하는, 삐에로나 광대라고 불리는 정신적 존재는 회색빛 도시를 걷고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꿈에 참견해 본 그로써도 흑백으로 이루어진 꿈세계는 낯설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는 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어디로 가야 좋을까?"
삐에로가 계속 주위를 둘러보며 혼잣말을 했다. 남의 꿈을 만나지 않고서는 자극을 받기 힘들기에 혼잣말을 통해서 약간의 자극을 얻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었다. 어쨌건 그는 자신이 상상을 할 수 있게 되더라도 남의 꿈을 찾는 일은 계속 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만든 세상보다는 남이 만든 세상이 훨씬 더 자극적일테니. 손으로 자기 몸을 간지럽혀 봐야 웃음이 터지지 않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었다.
"어디 있을까?"
어쨌건 자신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배우려면, 가르쳐 줄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삐에로는 이 꿈세상의 주인을 찾아 걸었다. 대체로 꿈의 주인들은 꿈의 중심이 있었고, 그 중심은 가운데라는 뜻이 아니라, 가장 상상력이 집중된 곳이라는 뜻이었다. 정말 상상력이 뛰어난 주인은 어마어마하게 넓은 꿈세상을 지어올리기도 하지만, 모든 곳을 세세하게 상상하는 것은 무리이다. 중심에서 가장 먼 곳은 그저 낙서처럼 선으로 슥슥 그어져 있는 정도이고 중심으로 다가갈 수록 세세하게 묘사되어진다. 그 주인조차 꿈이라는 것을 인식 못하도록 현실적으로.
"흐음. 저긴가?"
삐에로가 방향을 잡았다. 아무래도 이 꿈세상에서 상상력이 가장 집중된 부분은 하늘높은 줄 모르고 솟은 탑인 것 같다. 온 세상이 흑백이지만 탑 부근의 하늘만은 노을무렵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상당히 불길한 느낌이었다.
"재밌네."
하지만 그에게 탑은 그저 재미있는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었다. 웃음을 띈 얼굴로 가볍게 걷는다. 별명 그대로 삐에로를 닮은 모습이었다.

쫓기고 있었다. 쫓아오는 것이 누구인지, 왜 쫓아오는지는 몰랐다. 사실 쫓아오는 자의 모습을 본 적도 없었지만 자신이 쫓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급하게 걸음을 옮긴다. 하늘높이 솟은 탑을 향해 달린다.
'탑, 탑 꼭대기에만 올라가면 돼!'
이상하게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을 쫓아오는 저것은 탑 꼭대기까지 따라올 수 없다. 유일하게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계속 달렸다. 고개를 뒤로 돌리는 순간 자신의 바로 뒤에 서있는 그것을 볼 것 같아서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달리면서 몇 번 쫓아오는 자의 숨결이 목 뒤에 닿은 것도 같았지만 그럴수록 더욱 힘껏 달렸다. 좁은 골목으로도 달려보고, 큰 길로도 달려보았지만 쫓아오는 느낌은 여전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지는 오래고 오기로 달린지도 한참이 된 것 같다. 간신히 탑의 입구가 보인다.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라 탑 내부로 들어서자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보인다. 도저히 계단으로는 올라갈 기운이 없다. 마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살았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엘리베이터로 뛰어든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야 엘리베이터에 누군가 있는 걸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정신사나운 보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웃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내릴 것인가, 타고 올라갈 것인가 고민한다. 느낌이지만 자신을 쫓아오던 건 이 남자가 아니었다. 머뭇거리다가는 녀석에게 잡힐 지도 모르겠다는 조바심에 닫힘 버튼을 계속해서 누른다. 문이 닫히려 움직이자 버튼을 누른다. 가장 윗층인 100층이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인다. 
위-잉
묵직한 느낌이 몸을 누른다. 굉장한 속도로 움직이는 듯 층을 나타내는 숫자가 빠르게 변한다. 등 뒤에 서있는 남자는 말이 없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남자는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이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덜컥.
몸의 중심이 휙 쏠린다. 80까지 올라갔던 숫자가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과 함께 60까지 변한다. 순식간이었다. 다시 몸을 짓누르는 느낌과 함께 85까지 올라간다. 터져나오는 비명은 요란한 기계소리에 묻힌다. 엘리베이터는 계속해서 미친듯이 오르내린다. 92에서 10으로 72로 29로 끊임없이 변한다. 엘리베이터와 함께 몸도 요동친다. 바닥에 달라붙듯이 엎드려 계속해서 소리친다.
"저기요."
목소리가 귀에 또렷하게 들린다. 자기가 내는 비명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소란속에서도 그 목소리는 귀에 꽂아넣은 이어폰을 통해 듣는 듯 정확하게 들렸다. 남자가 내는 소리였다. 그러고보니 남자는 이 요란을 들리는 듯 어정쩡한 자세로 벽에 기대어 웃고 있었다.
"이거 뭐에요?"
모르겠다고,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고 욕을 한바탕 쏟아부으려 했지만 입에서는 계속 비명만이 나왔다. 엘리베이터는 계속 요동친다.
"이런 거 좋아해요?"
헛구역질이 나온다. 비명은 커녕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다. 어지럽다. 이 상황에서도 들리는 목소리가 짜증스럽다. 말이 안나오니 노려보기라도 하고 싶지만 흔들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제대로 촛점을 맞추기도 힘들었다. 눈물이 나온다. 차라리 계단으로 갈 껄.
"울어요?"
서럽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난 그저 도망치고 싶었을 뿐인데. 탑의 꼭대기로 가고 싶었을 뿐인데. 무섭다.
"자기 꿈인데 슬퍼하는 게 어디있어요. 이거 악몽이에요?"
덜컥.
엘리베이터가 멈춘다. 99층.
"악몽이요?"
방금전까지 그렇게 소리를 치고 눈물을 흘렸는데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가 나왔다.
"아니에요?"
보라색의 남자는 어정쩡했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고 보니 온 세상이 흑백이다. 남자만이 자신의 색을 가지고 있다.
"아, 꿈이구나."
"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내린다. 남자도 따라서 내린다.
"꿈이구나."
방금전까지 그렇게 무서웠는데, 지금은 시시하다. 흑백의 세계가 갑갑할 뿐. 발걸음을 옮긴다.
"어디가요?"
남자가 쫓아온다. 어차피 꿈에 나오는 사람이겠지. 저 사람 역시 시시하다. 대답해 줄 필요는 없겠지. 계단을 오른다. 탑의 가장 꼭대기. 도대체 왜 가고 싶었던 건지, 그건 궁금했다. 한계단, 한계단 오른다. 드디어 100층. 말이 층이지 옥상같은 곳이었다. 벽도, 천장도 없이 바닥만 있다. 바람은 불지 않는다.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고 흰색 병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테이블까지 걸어가 병을 집어든다. 어떻게 생각하면 무겁고, 어떻게 생각하면 가벼웠다. 역시 꿈인가.
"그거 뭐에요?"
지긋지긋하게 쫓아온다. 귀찮다. 별것도 아닌 병, 던져준다. 보라색남자는 멍청하게 허둥지둥 거리다가, 병을 놓쳤다. 
쨍그랑
유리파편이 사방으로 튄다. 흰색의-빛이 둥실 떠오른다. 퍼진다. 햇살같다. 흰색빛이 퍼져나가며 푸르게, 붉게, 녹색으로, 노란색으로, 검게, 회색으로, 희게, 갈색으로, 보라색으로, 퍼져나간다. 오만가지 색이 섞여있던 듯 하다. 흑백이던 도시에 채색이 된다. 빛이 닿는 곳곳에 색이 맺힌다.
"우와아."
보라남자가 감탄한다. 혼자서 색을 가지고 있던 주제에.
"굉장해요."
어차피 꿈인걸. 시시하다.
녀석의 기척이 갑자기 느껴진다. 나를 계속 쫓아오던 그 무엇의 느낌이다. 공포도, 압박도, 긴장도 없다. 그저 궁금할 뿐. 뒤를 돌아보자 검고 납작한 무엇이 빠르게 움직여온다. 그림자. 내 그림자였다. 고작. 그림자가 내 발밑에 달라붙는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빛에 따라 흔들린다. 시시하다. 아직도 입을 다물지 못하는 보라색남자를 내버려둔 채 99층으로 내려간다.
이 가짜 세상은 언제 끝나는거야. 재미가 없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12:11 

 

병장 장지훈 
  항상 기화님의 주옥과 같은 글들을 보자면 이거..혀를 내두를수 밖에 없네요. 
기발한 상상력과 문체.(웃음) 

저는 아직도 제 색을 모르고 있는것인가요? 2009-01-19
12:13:49
  

 

병장 이충권 
  별것도 아닌 병 을 던지는 순간(Radio) 연막수류탄! 

흰색 빛깔의 안개가 스스스스스 터저나오면서 사방이 흐리다. 

이때 보라색 남자를 재끼고 유유히 엘리베이터로 가서 99층으로 내려간다. 2009-01-19
13:13:38
  

 

병장 김민규 
  꿈속에서의 엘리베이터는 말그대로 공포죠. 으악. 
뭐랄까, 의지몽의 냄새가 나네요. 가끔 그럴 때 있잖아요. '어차피 꿈인데 뭐. 뒤에서 뭐가 쫓아오든 딱 그 생각을 하는 순간 펑 하고 사라지죠. 눈앞에 있는 배경이 맘에 들지 않으면 시선을 돌려 시계 한 번 보고 다시 보면 바뀌고요. 크크크 

그러나 정말 달콤한건 그런 의지몽이 아닌,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찾아오는 '원하는 장면들' 이더이다. 전제된 설정 몇 가지(이건 꿈속에서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는데 어떻게 아는지)가 맘에 들지 않을지라도, 그저 그 상황속에 나를 놓아둔다는것만으로도 행복한 꿈들. 언제 또 저를 찾아올지요. 

잘 읽었습니다. 냠냠 2009-01-19
13:54:56
  

 

상병 김형태 
  음, 
지치지않고 계속 얘깃거리는 뱉어내시니, 
멋지십니다!, 
잘읽었습니다. 


fire in the hole 2009-01-19
14:06:04
  

 

병장 이동석 
  요새 멍때리느라, 글도 잘 못봤습니다. 
가슴이 조이는게 느껴졌는데, 금세 또 아무렇지도 않게 후련해지는군요. 

이제 저도 글을 써야겠네요. 2009-01-20
15:21:55
 

 

병장 박경민 
  꿈에 대한 단상인가요? 
유독 시시하다는 말이 눈에 띄는군요, 

꿈은 시시할 뿐이겠죠, 그것이 꿈이라는걸 깨달은 이후부터는.., 2009-01-20
15:50:51
  

 

일병 송기화 
  지훈님. 넵! 한결같은 헛소리입니다! 하하. 
충권님. 그리고 갑자기 피를 내뿜으며 쓰러지는 보라 남자. 쓰러지며 간신히 읊조린다. '가스가스가스' 
민규님. 네, 정말 꿈이란 참 좋은 것 같아요. 특히 그 무차별성이. 
형태님. 에- 이 삐에로가 할 일이 아직 몇 개 남았어요. 빨리 뱉을게요. 
동석님. 드디어 쓰시는 겁니까! 그렇군요! 네! 얍! 
경민님. 네,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만드는 게 삐에로입니다. 단상이라기 보다는 그냥 이야기에요. 2009-01-20
15:5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