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방해꾼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9-01-14 11:39:42, 조회: 130, 추천:0 

아침부터 바쁘다. 전화기가 쉴새없이 울린다. 밤새 일어난 수많은 변화들과 그것이 우리 회사에 미친 영향과, 미칠 영향과, 미칠지도 모르는 영향을 보고받는다.
"자세한 건 출근하고 보고받지."
전화를 끊는다. 
"다녀오세요."
"학교 잘 다녀와야돼, 우리 아기들."
아내와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현관을 나선다. 매일 이 순간이 되면 회사를 때려치우고 아이들과 있고 싶다. 휴가때마다, 방학 때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자랑할 수 있는 멋진 시간을 보내곤 하지만 아무래도 하루 종일 가족과 함께하고 싶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걷는다. 현관에서 대문까지 나가는 것은, 그러니까 마당을 가로지르는 것은 약간의 시간이 소모된다. 대문에 거의 닿아갈 때 쯤 문이 열린다. 우리 집 대문이 자동문은 아니지만, 내가 나갈 때에는 시간에 맞추어 문이 열린다. 내가 지나치면 대문은 닫히고, 문을 닫은 운전기사가 빠른 걸음으로 움직여 자동차의 뒷문을 연다.
길을 걷던 모두가 몸을 돌려 바라볼 차에 몸을 싣는다.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한다. 눈을 감고 있으면 차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의 안정감. 겉만 보고 예상할 때보다 훨씬 넓은 내부공간은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조수석에 앉은 비서가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해준다. 보고, 토의, 회의, 접견, 말만 다르지 다 거기서 거기, 비슷한 일들이다. 지루할 법도 하지만 나에게 이 일은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만족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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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운다. 최신기종, 고급기종이다. 스피커의 위력을 뽐내듯이 뿜어진 클래식 곡이 차 안을 채운다. 
"여보세요."
-아, 있잖아요. 이건요-
"아, 있잖아요. 이건요-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가 동시에 내 곁에서도 들린다. 흐칫하며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내 옆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다. 새카만 셔츠에 붉은 타이, 정신이 쏙 빠질정도로 화려한 보라색 양복을 입고는 반짝이는 흰색 구두를 신은, 현란한 복장을 한 남자였는데 얼굴은 새하얗다. 유난히도 입술이 붉다. 붉은 휴대전화를 얼굴에 대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서는 생긋 웃었다. 눈이 실처럼 가늘어지고 붉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모습이 삐에로같다. 그리고 그가 말을 이었다.
-다 꿈이에요.
-다 꿈이에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의 현실이 허상으로, 나의 상상의 산물로 전락한다. 이 순간이 꿈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정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씁쓸하다. 자고 일어나서 '꿈이었구나, 아쉽네.'따위의 상황이 아니다. 난 여전히 매력적인 차를 타고 있고, 운전기사가 나를 안전하게 회사로 이동시켜주고 있으며 비서는 나의 스케줄을 관리해주지만 이 모든것이 환상인 것이다. 리얼한 환상. 이거 꽤나 어마어마한 절망감이다. 이제 이 상황은 자각몽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 내가 이것이 꿈이라는 걸 알고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에게 이 상황을 알린, 저 보라색의 삐에로도 나의 상상의 산물인가?
"당신도 내 꿈속 인물인가요?"
궁금하면 물어보면 된다. 어차피 내 꿈인데 실례랄 게 어디있나.
"아, 정신 흐트리지 말아요. 이 차, 굉장히 편한데요?"
웃는 얼굴이 정말 삐에로 가면을 쓴 것 같다.
"아, 반갑습니다. 저는 그저 방해꾼이에요."
그가 악수를 청했다.
"예..예?"
얼결에 마주잡다가 말 끝에 물음표가 붙고 말았다. 방해꾼이라고?
"남의 꿈을 방해하는 걸 업으로 삼고 있죠. 지금처럼요."
웃는 낯에 침 못뱉는다는 말은 정말인 것 같다. 주먹이 날아가려는 것을 참았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고작 방해하고 싶다는 이유로 내 꿈에 찾아와서 이 기분좋은 꿈을 망친거야?"
주먹은 휘두르지 못했지만 존대까지 유지할 이유는 없다.
"아, 제가 상상력이 좀 부족해서 말이죠. 도-저-히- 이런 차를 상상할 수가 없는 거에요. 정신적인 존재가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게 어떤 건지 상상이나 가세요?"
녀석은 그 말이 웃겼는지 다시 삐에로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상상력이라는 게 어찌나 뛰어난 지 날아다니질 않나, 세상을 구하는 건 예사더군요. 헤어졌던 첫사랑이 다시 찾아와서 고백하는 꿈 보셨어요?"
"그러니까 그 많은 꿈을 다 방해했다는 말이지?"
"그러면 어떻게 해요, 꿈은 꿈이잖아요."
이 녀석에게 당했을 수많은 사람들이 정말 불쌍해진다. 그 즐겁고 행복했을 순간을 산산조각 내놓다니, 지독하게 잔인한 녀석이다.
"이런 짓을 해서 네가 얻는 게 뭔데?"
"꿈 속 사람들과 대화하는 기회를 얻는거죠. 이런 걸 어떻게 상상해 낸건지 물어보려구요."
"도대체 네 정체가 뭐야?"
"방해꾼이라니까요."
"정체가 뭔데 남의 꿈에 들어올 수 있는 거냐구."
"에에, 여긴 원래 제가 사는 곳이에요."
어느샌가 차는 터널에 접어들었다. 더 이상 배경을 상상할 능력이 없는 거겠지. 운전사와 비서가 사라진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차 안에는 나와 방해꾼만이 앉아있다. 차는 그저 달리고있다.
"내 꿈 속에 산다고?"
"아뇨, 아뇨. 그게 아니죠."
웃는얼굴 뿐만 아니라 몸짓 자체가 삐에로와 닮았다. 크고, 과장되어있다.
"정신세계라는 곳이 있답니다, 이 곳은 지독하게 넓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잠이 들면 자신의 상상력으로 아무것도 없는 정신세계에 자기만의 세상을 짓죠. 그게 꿈이에요. 워낙 넓어서 꿈끼리 겹치는 일은 드물지만, 요령만 알면 원하는 사람의 꿈과 겹치게 자신의 꿈을 지어서 꿈 속에서 만나는 일도 가능하죠. 태몽을 대신 꾼다던가 하는 게 그런 일이죠."
"그러니까 넌 정신세계의 사는-"
"정신적 존재요."
"그래, 그런 거란 말이지?"
"예. 그런 거에요."
"그리고 넌 사람들이 지어낸 꿈들을 돌아다니면서 방해하고?"
"사실 전 방해 할 생각은 없어요. 그저 상상력에 대해서 대화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다들 절 보고 방해하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그게 방해야. 제발 꿈은 건드리지 마."
"왜요?"
천진난만하게 녀석은 웃고있다.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그게 길몽이건 악몽이건 간에 꿈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어야 해."
"왜요?"
"그 왜요? 소리 좀 하지 않으면 안돼? 가끔은 내가 생각해도 부끄러울 정도로 동화같고, 어떨 땐 답지않게 세기말 분위기를 내기도 하지만 그런 꿈마저도 내가 아닌 다른 것에 통제를 받으면 우리는 죽어버릴거야."
"한번만 더 할게요, 왜요?"
"그게 누구라도 상관없어, 현실에서는 누구나 지독하게 통제받아. 현실 자체에 얽혀. 하지만 꿈은 다르다고. 그게 악몽일지라도 현실에선 벗어나있지. 그런 파괴적인 일탈일 지라도 우리에게는 그런 게 필요하다고. 제발 건드리지 마."
"음, 어, 그건 안될 것 같아요."
녀석의 입가에선 도저히 웃음이 떠날 줄을 모른다.
"도대체 왜?"
"이건, 너무 재미있거든요."
난 녀석의 웃는 얼굴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밤새 악몽이라도 꾼 모양이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않다. 휴, 하지만 출근은 해야지. 무거운 몸을 침대에서 꺼내며 하루를 시작한다.


덧. 이건 뭐, 도배인가요-(땀)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10:46 

 

병장 김민규 
  저 망할 삐에로 녀석, 저기 있었군요? 
아, 묵사발을 만들어 놔야 하는데, 주먹을 흠씬 먹여주신 거, 맞죠? 

엉엉엉 2009-01-14
12:01:53
  

 

상병 이지훈 
  어이쿠 한 사이에 기화님 글이 폭발했군요. 나머지 글들도 어서 가서 봐야겠어요. 2009-01-14
12:12:05
  

 

병장 이동석 
  이런 도배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2009-01-14
12:45:09
 

 

상병 김형태 
  꿈속의 기화님두분이 얘길 나누는거같아서 
제가 묵사발을 만들자니 실례가 되는 생각입니다 

암튼 너무 밉네요 2009-01-14
13:05:54
  

 

병장 안재현 
  ... 저 삐에로 짓거리 였군요?... 난 우리학교선생인줄 알았네~흐흐 

저 삐에로가 마이크로 꿈에깨서일어나라고 소리치는거였어 새벽6시마다... 겨울엔 30분 더자게 해주더라니... 2009-01-14
13:12:26
  

 

병장 이동석 
  재현님 댓글에 한번 더 폭소, 

제가 하는짓은 어쩐지 저 삐에로 같군요. 전 그러니까 꿈같은 드라마나 만화를 보는 어린아이들의 꿈을 짓밟거든요. 그런거 없어, 다 뻥이야. 독해- 2009-01-14
13:29:21
 

 

병장 이충권 
  난 차라리 웃고 있는 삐에로가 좋아 예예예예~! 

공포영화에선 삐에로가 엄청 무섭던데..허허허 2009-01-14
13:47:13
  

 

상병 차종기 
  동석님 독하네요 정말- 후후 , 
그런데 미묘하게 궁안에 있는 생활과 겹쳐지네요. 
저 방해꾼 녀석 내 꿈에 나타나면 말을 섞을 필요도 없이 갈겨 버려야지.(흥!) 2009-01-14
13:52:42
  

 

일병 송기화 
  에에- 나름 주인공인데 무지하게 미움받는군요. 계획대로야(응?) 2009-01-14
17: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