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미래로 가는 길  
병장 김무준   2009-05-29 23:52:37, 조회: 140, 추천:0 

『"'해리 포터'를 지은 조앤 롤링이 받는 연간 저작권료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받는 연간 배당금의 두 배가 넘고, '해리 포터' 시리즈가 벌어들인 돈은 우리나라 반도체 수출 총액 보다 많다"
"그동안 IT 산업과 금융 산업을 주성장동력으로 정신없이 달려온 세계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진 현재 이야기의 중요성은 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서울디지털포럼2009>에 대한 연합기사 中 하금열 SBS 사장의 말』

5월 27일자 연합뉴스로 <서울디지털포럼2009>에 관련된 기사를 읽었다. ‘Story-새 장을 열다’로 시작한 포럼에서 하금열 사장은 "디지털 시대에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디지털 기술이 가져온 정보의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질주하는 수많은 자동차들은 콘텐츠, 바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이는 평소 깽깽이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했다. 깽깽이는 지난 시간동안 조잡한 텍스트를 통해 장르소설의 문제와 한계를 지적해왔다. 이제 뉴웨이브 문학으로 발전 중인 장르소설이 스토리텔링과 서사구조의 완성 등으로 강점을 살리고, 흥미롭게 짜놓은 스토리텔링을 토대로 원 소스 멀티유징을 이끌어내는 변화만이 장르문단, 나아가서는 우리문학을 생존으로 이끌 수 있다고.

아래에는 장르소설과 관련한 깽깽이의 마지막 텍스트가 놓여있다. 텍스트에는 이야기의 중요성과, 변화의 과거 그리고 현재, 앞으로 다가올 변화가 담겨있다. 소수의 참고도서와 관련 정보를 통해 전체적인 흐름을 분석하고 가급적 객관적인 예측을 하려 노력했으나, 철저히 개인의 주관에 의해 진행되는 소견에 불과하므로 받아들이고 말고는 그대 마음이다.

※아래에 등장하는 문학은 문맥에 따라 ‘소설’을 지칭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1.
위에서 기사의 내용을 언급했다. 800명에 달하는 국내외 인사가 참석한 포럼에서 주최자나 다름없는 하금열 사장이 이야기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포럼에는 이문열, 황석영, 신경숙 등의 강연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의 강연은 모두 이야기를 주제로 한다. 포럼 자체의 취지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혁신과 미래에 대한 비전의 제시다. 이러한 취지의 포럼에서 이야기Story가 서두에 놓였다는 건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최근 학계와 시장, 작가를 불문하고 텍스트가 기반이 되는 문화에서 모두가 이야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말하는 이야기란 소설과 같은 독립적 텍스트와, 영화 ?  드라마 ?  만화 ?  애니메이션 등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복합예술에서 뼈대가 되는 사건들의 구조를 의미한다. 왜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을까?

우선 소설이라는 단일예술과 영화와 같은 복합예술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보면 차이를 알 수 있다. 영상산업은 성장과정에서 일찍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중요함을 깨닫고 세련된 이야기를 창조하는 데 집중했지만 문단은 그렇지 못했다. 한국순수소설은 표현이나 상징 등을 문학성과 예술성의 척도로 생각해왔고, 새로운 길을 창조하지 못한 채 정체되었고 다른 문화들이 과학과 예술, 경제 등의 경계를 넘나들며 발전하고 있을 때 흐름에 뒤쳐져야만 했다. 

타 문화와 달리 문학 그 중에서도 유독 소설이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가지 못한 이유는 시스템적 측면에 있다. 한국문학은 순문학과 비非순문학으로 알게 모르게 양분되어 있고 문단에서는 장르소설이나 뉴웨이브 문학과 같은 대중문학을 대부분 비순문학으로 치부한다. 순수문단은 등단이라는 시스템으로 집단을 폐쇄적으로 구성했고, 문학성과 예술성이라는 가치판단에 아집과 가까운 잣대를 적용하며 스스로 외로워졌다. 장르문단 역시 순수문단과의 교류를 시도하지 않은 탓에 두 집단의 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양분화가 심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서로가 이해관계를 성립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성문단이 장르문학의 문학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인데, 순수문단의 입장에서 보면 근거는 타당하게 보인다. 기성문단은 팬덤이라는 장르소설의 출발과 판타지, 무협, SF와 같은 텍스트의 생소한 배경에 거부감을 가졌었다. 새로운 문학의 출발을 그저 잠깐의 유행이라고 치부하기도 했다. 계속된 서로의 무관심과 몰이해로 양 측이 모두 침체기를 맞이했다. 

몇 년 새 문학의 침체와 양분화를 극복하고, 순수문단의 폐쇄적 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다. 장르소설에서 뉴웨이브 문학으로, 대중문학과 순문학의 장점을 모두 수용하는 새로운 문학으로의 변화를 목표로 각종 공모전이 개최되고 있다. 중앙일보 문학상과 세계문학상, 2009 멀티문학상 등 억대 규모의 거대 공모전이 뉴웨이브 문학을 표방하며 도전했다. 이외수가 대형 공모전의 심사위원장을 맡고, 황석영이 디지털포럼에서 이야기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한다. 기존 순수문단이 ‘예술적, 문학적’이라 생각되는 요소를 갈고 닦으며 우물로 뛰어들자 기성세대 혹은 기득권에 가까운 이들이 문제를 인식했고 아집을 버리고 눈을 넓혔다. 변화를 수용하는 첫 번째로 시장과 기성작가들은 이야기의 강화를 선택했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나 딱딱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이름난 작가들이 새로운 가치를 찾기 시작했다. 한국문학 전체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본다. 각종 문학상을 개최하는 SBS, Showbox, 중앙일보 등의 기업 혹은 매체들이 스토리에 중점을 둔 컨텐츠를 발굴하려 한다는 점에서, 비록 시장에 의해 변화가 주도되고 있다고 해석할 수는 있다. 아쉬움은 있으나 현 시점에서의 변화는 각국의 텍스트에서도 드러나듯 세계적인 흐름이다. 이제 장르소설의 등장처럼 빠르고 갑작스럽게 순수문단과 장르문단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문학성과 예술성 그리고 상업성 모두에서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리라 예상한다. 



2.
베스트셀러 순위를 통해 현 한국문학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날로 출판시장이 위축되어가는 지금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문학은 얼마 되질 않는다. 10위권 내를 살펴보면 간간히 소설이 눈에 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 등이 있다. 하지만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를 포함해 10위권 내를 차지한 소설 중 <엄마를 부탁해>를 제외한 세편 모두가 해외소설이다. 그나마 <엄마가 부탁해>가 1위를 차지하며 자존심을 지키나 시집은 단 한편도 없다. 간혹 이름을 비추는 수필은 보통 여행 에세이인 경우가 많다. 시장에서 점점 문학의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네 편의 소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네 편 모두 세련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신>을 제외한 세편 중 <천사와 악마>, <더 리더>는 이미 영화화 되었으며, <엄마를 부탁해>는 영화화의 판권이 팔린 것으로 알고 있다. 현대의 흐름에 맞게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원 소스 멀티유징이 진행된다. 세련된 이야기를 갖춘 소설들이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소비자는 결국 예술적 가치를 지향하는 한국소설이 아니라,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긴 해외소설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비교의 잣대는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시장의 특성상 해외에서 유입되는 소설들은 흥미 또는 작가의 인지도에 따라 번역과 출판이 결정된 것들이다. 시장이 수입을 마음먹은 만큼 해외에서 시장성을 인정받은 소설들이 베스트셀러 상위를 차지하는 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 한 해 수백 건의 공모전이 개최되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소설이 쏟아져 나옴에도, 자국의 독자들을 사로잡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재미가 없어서다. 지적유희를 즐기는 소수의 지식층을 제외하면 한국문학을 소비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한국민의 한 해 독서량이 열권도 채 되질 않는 상황에서, 시장은 날로 축소되고 있다. 몇몇 이들이 사태를 파악하고 현실을 인정해 돌아서는 독자들을 붙잡기 위하여 변화를 시도하는 중이지만 흐름은 미미하게만 느껴진다.

문학은 다른 문화들과 다르다. 영화와 같은 영상문화는 거듭된 발전으로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를 적절히 오가게 되었다. 천만이 넘는 이들이 책 한권 값을 지불하고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향한다. 영화는 일회적이나 책은 계속적이다. 책을 구매하며 가치 있는 작품을 소장할 수 있음에도 소비자는 책을 외면한다. 미술과는 더욱 다른 모습을 보인다. 미술가들이 작품의 대량생산을 꺼린다는 점에서, 작품은 희소가치를 얻는다. 소비자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예술에 감동하고 그것을 보기 위해 전시회 입장료를 지불하며, 소장하고자 수천 수억의 돈을 쓴다. 텍스트의 지면 발표를 전시회와 마찬가지라 생각할 수는 없다. 문예지 역시 대량생산되는 출판물의 하나이기에 한정된 장소에서 하나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회와는 다르다. 출판시장과 흡사한 시장이 음반시장이다. MP3와 불법복제의 등장으로 음반시장은 날로 축소되었다. 컨텐츠의 판매량 역시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서도 차이가 있다. 가수들과 시장을 주도하는 이들은 디지털 음반시장을 개척해 새로운 이익을 창출하게 되었다. E-Book 시장이 성장 중이기는 하나 성공을 장담하지는 못한다. 구매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컨텐츠가 시장에 등장한들 팔릴 수 있을까.  

작품의 발표는 예술이나 작품의 출판은 사업이다. 소비하는 이가 있어야 문화는 유지될 수 있다. 문화는 변화의 과정에서 철저하게 자본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호받지 못하는 이상 소비되어야 한다. 텍스트는 생존을 위해 변화해야한다. 텍스트는 여러 문화의 뿌리가 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텍스트가 나아갈 길은 굉장히 다양하다. 영상산업 혹은 게임산업으로의 원 소스 멀티유징은 적절한 해답이다. 작품 자체에 희소가치를 부여하기 힘들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어렵다면, 작품의 이야기를 팔면 된다.

예술가는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많다. 배고픈 게 문학이며, 예술이라 이야기한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하며 이는 옛말이 되었다. <해리포터>의 조앤 K 롤랑은 하금열 사장이 말했듯 떼돈을 벌고 있다. 롤랑에 비교하기는 턱 없이 작지만 신경숙 역시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수십억 대의 수익을 올렸으리라 추정된다. 잘 쓴 이야기가 사업 하나, 산업 하나에 육박하는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셈이다. 시장에서 새로운 컨텐츠를 찾는 까닭은 텍스트가 곧 돈이 되는 덕이다. <해리포터>의 경우를 보면 텍스트가 얼마나 많은 수익을 창출하는지 알게 된다. 시리즈 별로 동명의 영화와 게임이 시장에 나오는 등 등장인물과 텍스트를 이용하는 산업이 굉장히 많다. 롤랑은 이러한 산업들에, 텍스트의 생산자로 저작권료를 받음으로써 노천카페에 앉은 가난한 아줌마에서 벼락부자가 됐다.

그렇다고 <해리포터>의 문학성에 대해 딴지를 거는 이들은 없다. 롤랑은 수십 권의 책에 정치적 암투와 매체에 대한 비판, 인종차별 등 다양한 주제들을 흥미롭고도 세련된 사건들로 표현했다. 치밀한 이야기에 문학적 상징을 집어넣어 자신의 판타지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한국의 장르문단도 발전하고 있다. 과거 문학성을 논할 가치조차 없다는 편견을 극복하고, <드래곤 라자>가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장르문학의 문학성에 대한 편견에 반박하고 이해를 이끌었다. 중세 유럽풍이면서 톨킨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지만 이영도는 <드래곤 라자>와 <눈물을 마시는 새>, <폴라리스 랩소디> 같은 소설을 통해 우리의 삶과 타인에 대한 이해 등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며 장르문단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줬다. <드래곤 라자>는 아시아권에서 수백만부의 판매부수를 올렸고 이영도는 돈방석에 올랐다. 이영도의 작품은 동명의 게임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영도가 90년대 장르문단의 발전가능성을 보였다면, 귀여니는 2000년대를 장식했다. <그 놈은 멋있었다.>, <늑대의 유혹>과 같은 텍스트로 10대와 20대 어린 여성층을 공략했다. 이모티콘의 사용으로 극과 극의 평을 받았으나 하이틴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고, 새로운 표현을 제시했다. 텍스트의 영화화로 한국장르문학도 일본이나 다른 나라들처럼 원 소스 멀티유징이 가능함을 증명했다. 글쟁이가 항상 배고픈 시대는 지났다. 이야기를 소비해 줄 소비자와 시장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

상당수 예술가들이 예술을 돈에 팔아서는 안 된다고 외친다. 순수문단 역시 보수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하지만 변화를 인정하지 못하는 문화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이영도가 귀여니가 돈을 목적으로 텍스트를 생산했을지는 몰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텍스트를 소비하며 울고 웃었다. 소설이 나르시시즘을 위해 탄생한다 해도 무언가를 써낸다는 행위는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심리의 표현이다. 텍스트가 소비되지 못한다면 누가, 작가가 예술을 하고 있음을 이해할까.

책 읽기에 인색한 국민이 문제일까, 읽을 만한 책을 내놓지 않는 시장과 작가가 문제일까.



3.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각종 예술과 과학 등, 문화와 산업 전반에 걸쳐 통합과 융합이 이루어질 것이라 예견했다. 문화의 통합은 미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현대미술은 대지미술, 설치미술 등으로 새로운 표현을 수용했다. 건축과 미디어, 과학 따위를 넘나들며 미술은 진보적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주로 영상산업들이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텍스트의 발전가능성은 충분하다. 텍스트는 영상과 음향과 결합하고 바뀌어 표현되지만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는 변하지 않는다. 텍스트가 영상화 되면 시각적 혹은 청각적 표현들로 이미지가 구체화 될 수 있다. 반대로 문자로 전해질 때보다 수용자의 상상을 제한한다는 단점은 있으나, 수용자에게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때문에 원 소스 멀티유징은 여러 이유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중이다.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원 소스 멀티유징의 대표적인 예가 <반지의 제왕>이다. 톨킨의 대표작이자 세계 3대 판타지로 칭송받는 <반지의 제왕>은 이미 몇 십 년 전에 영화화의 판권을 넘겼다. 첨단기술의 발달로 텍스트는 3부작의 거대한 영화가 되었고, 게임으로도 제작되었다. 롤랑의 <해리포터>도 마찬가지다. 시리즈가 발매되는 족족 영화와 게임화 된다.

허나 한국은 그렇지 못했다. <드래곤 라자>가 라디오 드라마, 게임화 등으로 멀티유징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후 히트를 친 장르소설들은 출간만으로 끝났다. <퇴마록>이나 <묵향>, <이드>, <사신>, <늑대의 유혹> 등이 멀티유징을 통해 다양한 매체로 시장에 등장했으나 소수를 제외하면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소비자수가 적다고 탓할 수는 없다. 일본은 <로도스 전기>, <십이국기>, <슬레이어즈> 등 수 없이 많은 작품들로 원 소스 멀티유징을 이룩했다. 한국에 비해 두 배 정도의 인구를 가진 일본이 원 소스 멀티유징으로 자국 시장을 개척하고, 나아가서는 해외시장으로 뻗어나가는 모습은 한국과 굉장히 대조적이다.

원 소스 멀티유징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이제 멀티유징은 단순한 산업의 다양화에서 그치지 않는다. <매트릭스>와 <터미네이터>는 애니메이션, 게임, 드라마 등을 제작하며 영화 속에서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매트릭스> 3부작은 게임과 애니메이션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삽입함으로써 영화를 본 이들이 선택적으로 상품을 소비할 수 있게끔 유도했다. <터미네이터>는 4편이 나오기 전에 <사라코너 연대기>라는 드라마를 제작, 작품 속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해석하는데 실마리를 마련했다. 텍스트도 이와 같은 방식을 택할 수 있다. 처음 책을 출간하고 멀티유징을 통해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며 소비자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제공하면서 실리를 얻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시장에는 이미 멀티유징을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텍스트가 충분하다. 김철곤의 <SKT>나 윤현승의 <하얀늑대들>은 방대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작가가 차마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계속해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문제는 멀티유징으로 탄생한 상품을 소비해줄 소비층이 적다는 것이다. SF나 추리, 전쟁소설 등이 빼어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원 소스 멀티유징으로 진전하지 못한 것은 국내 출판시장과 소비자 수가, 작품이 멀티유징을 거쳤을 때 이를 적절히 소비해줄 만큼 충분하지 않은 탓이다. <드래곤 라자>나 <퇴마록>, <묵향> 등이 한정적이나마 멀티유징이 가능했던 까닭은, 책을 구매한 이들이 많았던 덕이다. 하이틴소설의 영화화는 조금 다른 맥락으로 해석해야한다. 판타지나 무협을 멀티유징 했을 때 이를 소비해줄 잠적 소비층이 소수인 반면, 하이틴소설은 꼭 기존 소비층의 어깨를 빌리지 않아도 이야기 하나만으로 소비자를 끌어들일 수 있다. 화려한 컴퓨터그래픽 따위로 예산을 낭비할 필요도 없기에 하이틴소설이 영화화 될 수 있었다.

국내시장에서 장르소설이 선택 가능한 경우의 수는 얼마 없다. 일본처럼 애니메이션화나 만화화를 택하기에는 시장이 너무 좁다. 영화화나 드라마화를 하기에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장르소설이 선택할 수 있는 멀티유징 중에 온라인게임화가 있다. 한국은 세계적인 기술과 시장을 갖고 있다. <묵향>이 온라인게임화를 선택했으나 철저히 실패한 것은 시간과 비용에 비해 결과물이 부족해서였다. <반지의 제왕>이 온라인게임화는 굉장히 놀라웠다. 국내유저의 선호를 충족시키지는 못했으나 북미와 유럽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텍스트와 영화와는 다른 이야기를 제공하여 소설 속 세계에 다시 생명력을 부여했다.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보다 많은 이들에게 들려주고픈 욕망이 있다. 그런 작가들은 앞으로 원 소스 멀티유징을 심각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내에서 원 소스 멀티유징은 텍스트 기반 문화의 보편적 현상으로 발전하리라 예상된다. 그럼 텍스트는 어떤 형태로 변화할까. 이야기가 강화되리라는 내용은 이미 위에서 설명했다. 이야기의 강화와 함께 이루어질 변화는 소비자의 욕구를 분석해보면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온라인게임 중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아이온>을 보자.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는 워크래프트라는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을 온라인에 옮긴 것이다. <아이온>은 <리니지> 시리즈에서 얻은 노하우를 토대로 <와우>를 벤치마킹한 게임이다. <와우>와 <아이온>은 모두 방대한 세계관과 넘치는 이야기들을 갖고 있다. 소비자는 가상의 세계에서 한 사람의 유저가 되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하는 동안 크고 작은 이야기를 접하고, 게임의 뼈대를 이루는 전설 속 인물들과 게임을 함께 할 수도 있다. 소비자가 이야기에 참여해 컨텐츠를 즐기는 게 가능한 점이 온라인 게임의 최대 장점이다. 매번 새로운 보스몬스터가 등장하고 이야기가 업데이트 된다. 유저는 보스를 쓰러트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 개발사에서 제공하는 컨텐츠는 유저의 승리와 새로운 이야기의 제공으로 비록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한계를 가지지만, 유저는 게임을 즐기는 것으로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는 대리만족을 얻는다.

미래의 텍스트는 아마도 독자의 의사를 반영하여 온라인 투표 등을 통해 독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작중인물을 이끌거나, 아이디어를 공모해 특별한 사건들을 추가하는 형식으로 발전할 것이다. 기존의 텍스트는 작가 혼자서 모든 것을 창조하고 진행시킨다는 점에서 폐쇄적일 수밖에 없었으나 미래의 텍스트와 작가는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리라 추측해본다. 독자는 이로써 텍스트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작가는 문장과 표현 등으로 자신의 개성을 살린다. 이야기를 표현하고 풀어나가는 것은 오롯이 작가의 능력에 달려있기에 작가는 독자를 텍스트에 참여시키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현대의 산업은 날이 갈수록 분업화된다. 미래의 텍스트는 하나의 작품에서 상품으로 되리라 상상한다. <와우>나 <아이온>의 개발진에는 스토리를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다. 이야기의 큰 틀을 그리는 팀장이 있고 팀장의 지휘아래 부원들이 소소한 이야기와 컨텐츠들을 개발, 종합하여 게임에 반영한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텍스트 생산방식이 등장한다면 철저한 분업화를 바탕으로 제작될 것이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이와 이를 의도에 따라 적절히 재배치하는 이, 작중인물의 성격과 외모 그리고 개성 등을 창조하는 이, 이를 종합해 텍스트로 표현하는 이까지 기존 1인 체제에서 다수의 작가들이 참여하는 텍스트가 상업적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위에서 설명한바와 같은 텍스트의 제작방식은 현재에도 존재한다. 허나 이 제작방식은 일종의 놀이에 가깝다. 릴레이 소설의 창조방식은 다수의 사람이 참여하며 개개인이 하나의 큰 세계를 창조하고 종합해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점에서 미래에 등장할 제작방식과 상당히 흡사하다. 반면 텍스트를 생산하며 확실한 분업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텍스트의 표면을 담당하게 될 문장이 개인에 따라 판이하게 다르기에 앞으로 등장할 제작방식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며 시장에서 프로슈머가 차지하는 위치가 날로 높아지리라 말했다. 이영도가 톨킨의 세계관을 차용해 국내에 도입 <드래곤 라자>를 탄생시켰듯, 미래에는 텍스트에도 프로슈머들이 등장하며 텍스트의 분업화, 독자의 참여도 점점 증가하며 새로운 텍스트와 생산방식이 등장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상상해본다.



끝으로

다가올 미래에 직면하게 될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재 장르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장르들은 무협과 판타지 등이며, 이 장르의 배경은 중세유럽이나 중국의 명이나 청기 등으로 한정되어 있다. 전의 텍스트들에서 장르소설의 한계를 지적하며 충분히 설명했다. 뿌리를 찾고 한국적인 텍스트의 생산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잃고 말 것이다.

장문의 텍스트에서 장르문단과 순수문단의 통합을 이야기했지만 적절한 논지와 많은 설명을 덧붙이지는 못했다. 원 소스 멀티유징이 활발히 진행되기에는 순수소설은 세련된 이야기가 없고, 장르소설은 텍스트의 퀄리티가 떨어진다. 양 문단의 교류가 없다면 멀티유징을 통한 텍스트의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짐작한다. 기존 작가와 학자들이 장르소설에 보다 학문적으로 접근하고, 장르소설이 문학성을 갖추기 시작한다면 한국문단은 진보할 수 있으리라. 장르소설 작가지망생들은 톨킨과 김용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야하고, 독자들은 다양한 텍스트를 보다 넓은 눈으로 받아들여야한다. 이야기의 강화에 몰두해 문학성을 잃어서도 곤란하다.

이 모든 변화가 서서히 진행된다면 그 때 진정한 뉴웨이브 문학이 탄생하지 않을까.




덧. 큰 주제를 가지고 주절거리려니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음.
덧 2. 참고텍스트 및 서적 목록은 불확실하므로 덧글로 대체하겠음

참고서적
<스토리텔링> - 작자 기억나지 않음
<애니메이션과 스토리텔링> - 이종한, 조미라 공저
<문화산업의 이해> - 작자 기억나지 않음
<부의 미래> - 앨빈 토플러
<랑데부 아트> - 작자 기억나지 않음

참고텍스트
[명예의 전당]
<박수영(예) - 해리포터와 불사조기사단>
<황민우(예) - 한국 장르문단의 참혹한 현주소>
[책가지]
<김무준 - 장르소설의 역사>
<김무준 - 장르소설의 한계와 극복>
[칼럼]
<김무준 - 장르소설의 정형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24:53 

 

상병 이재원 
  소비하는 소비자도 문제.. 
유명한것만 따라서 읽어대니, 유명한 사람들만... 
저도 뜨끔하네요. 그나저나 이런글은..무섭습니다..끄응.. 2009-05-30
08:22:33
  

 

병장 김무준 
  하암. 반쯤 술에 취해서 썼더니 영 문장이 구립니다. 이래서야… 2009-05-30
08:36:06
  

 

병장 곽상민 
  세계화로 가는 시대에 뒤돌아보자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글쎄요, 외국문학이 좋은 것도 확실하지만 한국작가도 잘 쓰시는 분들은 넘쳐나거든요. 
문체와 글 작가의 성향이라든지, 코드라던지의 문제가 아닌거 같습니다. 

작은 생각드리자면..아직도 외국문학이 아니, 외국물이 시대트렌드로 보고, 사람들의 심리가 그러한 경향과 추세를 마음속으로 갖고 있는건 아닐까요. 

똑똑한 마케팅과 입소문. 광고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단 책 내용이 좋다는 건 당연하니까요.. 

저같은경우도 편식을 하는 편은 아닌데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같은 책이라면, 한국작가의 책을 많이 보는 편입니다. 물론 우물안 개구리가 되서는 안되겠지만, 요지하자면 우리것을 애용하자는 취지입니다... 2009-05-30
11:04:17
  

 

상병 김태완 
  무준님이 뉴웨이브 문학의 선두주자가 되심이 어떠신지. 
어렵겠죠? 뭐 인생사 쉬운일이 어딨겠나요. 2009-06-01
15:32:08
  

 

병장 김범수 
  해리포터가 괜찮은 작품이긴 하지만, 그 외의 결과를 거둘수 있었던 이유는, 영어문학이라는 이유도 있어요. 한국 문학이 과거 8~90년대에 비해 부진하는 이유는, 단순히 사람들이 책을 안읽는다기 보다는, 기존 문학의 비전달성과 새로운 장르의 인스턴트의 부조화의 이유도 있고요. 귀여니도 (난 이 여자 죽이고 싶지만) 잠깐 반짝했지, 지금은 딱히 N소설이라는게 뜨는 분위기도 아니고요. 
정작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읽히고 전달되야하는 것. 한국에선 참 그게 힘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