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물음에 대한 답변  
병장 김무준   2009-03-06 20:32:16, 조회: 86, 추천:0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으므로 친절하나 친절하지 않게 답변하겠습니다.




1.
깽깽이가 왜 스스로를 깽깽이라 부르는 지는 친절히 설명했으므로 패스.

깽깽이가 텍스트에서 말하는 ‘텍스트’란 있는 그대로의 단어와 문장, 문단의 조합을 일컬음. 이는 깽깽이가 생산한 모든 텍스트에 대해 개인적 주관은 들어갔을 지라도, 자기만족 이상의 의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전제로 함. 실제로도 텍스트를 생산할 시에 1차적 의도는 모두 스스로의 욕구충족에 있음. 이와는 별도로 깽깽이가 소설 및 다양한 문학을 말함에 있어 텍스트 텍스트 하는 건 문학을 할배들이 규정해놓은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대상에 접근하겠다는 의지 표현임.

깽깽이는 독자주의적 비평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지만, 텍스트가 문학이 되고 말고는 우선 생산자의 의도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함. 깽깽이에게 문학이라는 것은 단순한 단어들의 나열이 아닌 ‘예술’임. 이 개인의 미학이라는 것은 분명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임. 때문에 깽깽이는 타인에게 깽깽이가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를 강요할 마음도 없고, 그런 귀찮은 일을 할 정도로 한가하고 심심한 것도 아님. 또한 깽깽이의 텍스트를 통해 대중을 계몽한다거나 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할 마음도 없음. 우선 깽깽이가 텍스트를 생산하는 경우 이제껏 단 한 번도 자기만족이 아닌 다른 의도로 텍스트를 생산한 적은 없음.

텍스트를 수용하는 수용자는 텍스트 생산자의 의도와는 별도로 텍스트를 해석하며 자신의 주관을 포함시켜야만 함. 인간이 불완전하며 절대적 객관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우월성 논쟁>을 참조했으면 함. 텍스트의 해석 과정에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주관이 포함될 수밖에 없음. 깽깽이의 1차 의도와는 다르게, 과연 무엇이 옳은가? 라는 의문을 표출하는 것은 결코 깽깽이가 의도한 것이 아님을 알아주었으면 함.

고로 깽깽이는 지극히 주관적 입장에서 텍스트를 대하고, 스스로를 위해 텍스트를 생산할 뿐이니 해석의 과정에서 탄생한 것에 대한 질문에 답해줄 필요는 없다고 주장함. 텍스트를 생산하고 게시 하는 것은 깽깽이의 자유임. 당연히 깽깽이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도 수용자의 자유이나, 자신의 물음을 타인에게 던지며 답을 내 놓으라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일 수도 있음.

깽깽이는 타인의 텍스트를 읽으며 보통 해체의 과정을 거치지는 않음. 이 해체라는 것이 무엇이냐, 깽깽이가 학습을 통해 얻은 기존의 할배들이 정립해 둔 가치와 이론에 따라 ‘보편적으로 객관적이라 불리는 과정(이를테면 비평과 같은)’을 통해 텍스트에 접근하는 행위임. 그러나 인간은 이성과 감성이 함께 존재하는 복합적 짐승이기에 깽깽이도 이성으로는 이해하나 감성으로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는 것임.

<구회 말 투아웃>을 소설로 쓰고자 했다면 문학적 미를 완성하려 피를 토했을 거임. 깽깽이는 텍스트를 생산함에 있어 보통 문학적 장르를 떠나 있는 그대로 ‘날것’의 느낌을 살리고자 함. [그보다 순문학-장르문학을 꼭 두부 자르듯이 나눠 놓고 요건 재밌고 저건 지루해. 요건 고상하고 저건 천박해. 라고 떠들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필요보다 앞서 그런 방식의 분류가 과연 가능한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는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음. 깽깽이는 환상문학에 관한 논의에서 장르소설이고 순문학이고 나발이고 그딴 분류가 필요한가? 라고 질문했음. 떠들 생각도 없었고 두부 자르듯 나눌 의도도 없었음. 더 이상 손가락을 놀리려니 기존에 다 이야기를 했던 문제인지라 친절을 베풀 필요는 없다고 여김. 끝.

2.
박민규라는 작가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지는 않음. 박민규의 소설에 대한 감정적 의문은 기존 학계와 문단, 대중에 대한 것일 뿐임. 이번 텍스트에서는 그 발화가 박민규의 <카스테라>를 통해 생성되었음. 아직 박민규 소설집을 완독하지 않았고, <카스테라>와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읽은 정도임. 소설집의 제목과 단편의 제목이 동일하기에 약간의 오해가 생긴 듯함. 깽깽이는 타인의 의견과 주관이 틀렸음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 여기는 생명체임. 따라서 타인의 가치관을 존중함. 깽깽이가 순문학이라 생각하는 것을 타인은 장르문학이라 볼 수도 있고, 깽깽이가 글이라고 보는 것을 타인은 그저 텍스트 나부랭이라 볼 수도 있는 문제임.

<구회 말 투아웃>은 텍스트에 불과함. 깽깽이가 2차 의도를 갖고 출판을 위해 소설의 형태를 띨 수 있도록 수정하려하는 것은 맞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출판에는 현실적 문제가 따르기 때문이고 예전에도 설명했듯 <구회 말 투아웃>은 단편으로 끝내려 했던 텍스트임. 굳이 끼워 맞추려는 마음도 없고 처음부터 문학적 장르(소설, 시 따위와 같은)를 떠나서 쓰고자 노력했던 텍스트이므로 ‘이게 무어다’라고 답하지는 않겠음.

의도가 자기만족에 있고 자시고를 제쳐두고, 깽깽이는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기에 ‘독자주의 비평’론 적 접근을 자주 사용하고, 그를 지지하는 편임. 텍스트는 생산 후 생산자에 의해 1차적으로 의미가 부여되며, 타인을 통해 읽히는 과정에서 2차 의미가 생성됨. 그렇기에 생성된 1차 의미와 2차 의미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임. 타인의 의견이 존중되어야 하듯 텍스트 생산자의 의견도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임. 거기다 대고 옳고 그름을 판별하려 애쓰는 것은 지나친 흑백논리에서 출발한 무의미한 행위라 여김.

내글내생각이 아닌 독서후기로 텍스트를 게시한 이유가 여기 있음. 깽깽이는 박민규의 단편 <카스테라>를 읽고 지극히 감정적인 텍스트를 뱉어낸 것에 불과함. 이와 함께 타인에게 깽깽이의 사고와 가치를 제시한 것이지, 강요하려 했던 의도는 없음. 해석에서 오해가 발생한 점에는 분명 깽깽이의 텍스트가 해석 과정에서 다분히 오해의 소지를 제공할 만한 부분이 있었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함. 그러나 깽깽이의 의도 자체가 ‘박민규 이 똥덩어리 난 네가 싫어!’ 라든가 ‘닥치고 장르소설이 최고임’ 따위는 아니었음. 그런 언급도 없음. 귀찮으니 여기까지. 끝.

3.
피카소가 미에 대해 접근한 방법과, 데미안 허스트가 미에 대해 접근한 방법과, 신윤복이 미에 대해 접근한 방법이 모두 다르지만 사회는 이들 모두를 미술의 범주로 포함시키고 있음. 설치미술이냐 회화냐 동양화냐를 떠나 이 모든 예술가들의 행위가 색과 형태 등 시각적으로 의도를 표현하려 했으므로 관념은 이를 싸잡아 미술에 포함함.

깽깽이의 텍스트 생산 방식은 이러한 기존의 가치관들에 대한 의문과 파괴를 반영하려는 발버둥임. 깽깽이의 조잡한 텍스트 <우리는 하루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기억한다.>가 시라고 보는지, 소설이라 보는지, 수필이라 보는지 답변해 줄 수 있는 분은 댓글을 달아주기 바람. 깽깽이는 도저히 모르겠음. 깽깽이도 기존에 확립된 이론을 통해 텍스트의 생산 법을 터득했고, 신이 아니기에 다분히 한 쪽으로 치우친 텍스트를 생산할 수밖에 없는 것임. 그러나 깽깽이는 이 모든 관념과 이론에서 자유롭기를 꿈꾸는 나부랭이고, 평소 그렇게 노력하기에 깽깽이도 이론으로 답하기 힘든 요상한 국적불명의 텍스트들이 탄생함. 그래서 뭐 어쩌라고. 깽깽이가 이 모든 생산된 텍스트에 너는 문학, 너는 장르소설, 너는 시 이따위 분류를 적용시켜야 함? 손가락이 닳도록 설명하지만 깽깽이는 다분히 자기만족을 위해 텍스트를 생산하고 있음. 생산된 텍스트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타인에게 주어지는 자유라고 믿음. 깽깽이는 ‘나’라는 주체의 다양한 사고와 사유를 표현하는 데 ‘문자’라는 도구가 가장 사용하기 편하고 또 익숙하므로 텍스트를 생산하고 있는 것임. 깽깽이가 공부를 잘 하지 않는 건 기존에 구축되어 제시된 객관적 가치와 이론 등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임. 

인간은 자신의 사고와 사유를 타인에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원론적 형태에 가깝게 접근하고자 노력하나, 어떠한 형태로든 이 의意는 변질될 수 밖에 없음. 깽깽이는 문자라는 도구를 주로 사용하기에 단어 안에 생각 자체를 담으려하니 1차 변질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타인에 의해 해석되는 과정에서 2차 변질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어있음. 의도가 어찌되었건 이 변질의 과정 자체가 매우 슬프지만 깽깽이도 어쩔 수 없는 한계임. 이 한계에 최대한 다가서고, 또한 뛰어넘기 위하여 텍스트를 생산하고 또 생산하고 있는 것임. 제인장.

4.
그러나 사회와 관념은 텍스트를 수용하며 기존의 통념을 거치게 됨. 깽깽이도 피해갈 수 없는 딜레마임. 역사에 의해 텍스트는 문학이라는 것으로 정립되었고, 깽깽이의 이상이 어떻건 극복하기 힘든 과제임에는 틀림없음. 문학을 통해 개인이 최고로 치는 가치는 모두 다를 것이며, 깽깽이 역시 수많은 가치 중 하나를 품고 있을 뿐임.

그렇다고 타인이 깽깽이의 가치에 의문을 품는 것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고 대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함. 주관을 늘어놓으며 논의를 하면 갭을 좁힐 수는 있으나 극복하기는 힘든 게 사실임. 이는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이며 최선을 다해 의意를 표하나, 행위를 통해 의는 변질되며 결과적으로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임.

깽깽이는 굉장히 게으른 생명체이며 또한 불친절한 생명체임. 무엇보다도 생명체이기에 기분이 나쁠 수도 있음. 모니터 너머에는 컴퓨터가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가 앉아있는 것임. 인간은 완벽할 수 없음. 허나 대부분의 인간은 타인에게 완벽에 가까운 것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요구하기 마련임. 이해하는 부분이나, 이성과 감성을 함께 갖고 있는 생명체가 바로 깽깽이인지라 감성적으로는 화가 나는 것임.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고 생각함. 더 친절을 베풀지는 않겠음. 기분이 나쁘기에 완성형으로 문장을 마무리하지 않았음. 깽깽이는 유치함. 또 소심함. 그러니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음.

한 게임에 등장하는 몬스터는 이런 대사를 내뱉음. 

[님아 가드 올리셈]

깽깽이에게 가드를 올리도록 만들지 말아줬으면 좋겠음. 깽깽이는 소통을 좋아하고 사랑하나,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대화형식의 논의는 싫어함. 차라리 가급적 깔끔히 완성된 자신만의 텍스트로 예의를 갖춰 덤벼준다면 친절히 답변드릴 수 있음. 버뜨. 지금 충분히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있는 상태이므로 당분간 친절을 베풀지는 않겠음. 깽깽이는 까칠하니까.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19:42 

 

병장 김대운 
  아아-. 
어렵습니다. 두세번은 더 읽어 봐야 되나. 
까칠한 어투라서 더 어려운가? 2009-03-06
20:51:34
  

 

병장 김무준 
  단어 선택이 더러워서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