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무대 위의 아리랑  
상병 김무준   2008-11-21 23:21:15, 조회: 160, 추천:1 

애인의 홈페이지를 두리번거리다 고등학교 시절 연극부 후배들이 올해도 어김없이 최우수 동아리상을 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연기가 하고 싶고, 무대에 서고 싶고, 노래를 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없다. 아직도 적지 않은 계약기간이 남아 있으니까. 

중학교 3학년 마지막 기말고사를 삼백 오십 분의 삼백 사십 일 정도로 치르고, 당당히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성적을 잘 받을 수 없었던 게 이미 고등학교에는 합격했었고 교지를 만드는 일에 빠져 겨울을 보냈던 탓이다. 교지편집부도 아닌 내가 편집 일을 맡았던 건 글이 좋아서가 아니라 편집실에는 따뜻한 난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해 겨울은 무척이나 따뜻하게 보냈고 엉망인 성적표를 들고도 당당할 수 있었다.

나는 날라리였다. 수업을 쌩까는 일은 점심 밥 챙겨먹는 것 보다 많았고 점심때면 농구코트에 미친 듯 뛰었고 양아치라 손가락질 받는 친구들과 노닥거렸다. 길을 걸으며 담배를 폈고,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 술을 사다 먹었다. 비오는 날에는 삼겹살에 쐬주 한 잔이란 공식을 일찍이 터득했다. 지난 삼 년 간의 뻘짓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아. 어쩜 그렇게 열심히 놀았을까. 참 웃겼던 것이, 그렇게 놀면서도 선도부장과 부회장을 맡아 학생회를 드나들었다. 아마 학교 역사상 제일 날라리였던 학생회 임원이었겠지. 졸업식 장에서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울었다. 그저 죄송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쫄딱 망하면서 꿈을 꿀 수 있는 기회도 사라졌다. 예고는 외고로 바뀌어버렸고, 집은 반에 반 토막이 났고, 차는 팔렸고, 빚쟁이들의 전화는 오고, 살림살이에는 법원의 빨간 압류 딱지가 붙었다. 나는 놀았다. 놀 수밖에 없었다. 이 악물고 공부를 할 정신머리가 꿈을 잃은 소년에게 남아있을 리 없다. 그래도 부모님의 기대에는 부응해야겠다 싶어, 욕을 먹어가면서도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양아치 삘’이 난다는 이유로 화랑이라는 태권도부에 끌려갔다. 태권도부, 축구부, 농구부 삼종 세트에 가입하게 되었고 어째 저째 태권도부 선배였던 이의 손에 이끌려 연극부에까지 끌려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태권도부는 신입생 군기 잡는 물갈이 이후 해체되었지만 연기라고는 수업을 째기 위해 아픈 척 하는 짓 밖에 할 줄 모르던 나는 발성이며 발음 등을 학습해야했다. 4대 동아리가 뭔지. 지들끼리 정한건지 아니면 학교 역사상 내려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크게 지원을 받는 몇 안 되는 동아리였다. 선배 중에는 개그맨도 있다. 철없는 신입생 시절 점심시간에 맞아가며 연기를 배웠고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은 삼학년 선배들의 애드립 강의를 터져가며 들었다.

연극부에 신입생을 모집할 때만 해도 오디션을 보러 온 남자 신입생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홍일점’으로 최소한의 배우를 끌어들여야 했고 정확히 여섯 명의 친구를 동아리에 가입시켰다. ‘연기는 할 필요 없어, 배경 같은 거나 만들 면 된다니까?’ 로 시작된 유혹은 말짱 황이었다. 다들 무대에 서기를 꺼렸고 당연히 주연은 내 차지가 되어야만 했다. 십일월의 어느 날 연극은 시작되었다. 크나큰 강당에서 마이크 없이 복식호흡으로 모든 대사를 전달해야했고, 대사에도 없던 애드립을 날렸다. 방황하던 청소년들이 경찰소 유치장에서 만나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보호자에게 돌아가며 과거를 반성한다는 훈훈한 내용이었다. 연극은 성황리에 끝났고, 선배들이 말했던 것처럼 내게는 제법 많은 수의 애프터 신청이 들어왔다.

그렇게 삼년을 무대에 올랐다. 이년은 주연으로, 이년은 힙합동아리의 보컬로 무대에 올랐다. 무대체질 이라는 게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몇 달을 준비하고 이십분 남짓한 공연을 하는데 모든 것을 쏟아 붇고. 자리에 앉은 모든 이들이 나를 쳐다보는 짜릿한 쾌감은 잊을 수가 없다. 김제동이 사회를 진행하며 행사가 끝날 때 모두를 제 편으로 만들 듯, 공연이 끝날 때는 모두가 내 관객이었으니까.

그렇게 다시 고등학교 삼년을 팽팽 놀았다. 놀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고, 내 마음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꿈은 저 기숙사 산 아래로 내던졌다. 대학에는 떨어졌다. 일찍 사회에 발을 디뎠다. 냉혹한 사회의 창을 만나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중학교시절 질풍노도의 시기를 오토바이 타듯 내질렀던 녀석들은 학교를 때려치우거나, 나보다도 일찍 사회에 몸담거나 했다. 짜장면이나 피자를 시킬 때면 친구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고, 콜라 한 잔주며 인사했다. 밤 깊은 동네의 피씨방은 죄다 친구 녀석들에게 의해 돌아갔다. 한편 고등학교 친구들은 수도권의 잘나가는 대학에서 미팅이며 엠티 따위를 다니고 있었고 레포트를 쓰느라 계곡에서 물놀이 가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어졌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피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그 누구도 우리를 링에 올라가라 말한 적 없지만 우리는 링 위에서 세상이란 놈과 무규칙 격투기를 치르고 있다. 개중에는 일찌감치 수건을 내던지고 세상을 떠난 녀석도 있고, 나와 함께 청춘을 소비하다 불치병으로 죽어버린 녀석도 있고, 술을 처먹고 오토바이를 타다 마후라의 불꽃처럼 산화해버린 녀석도 있었다. 나처럼 링 위에 서기를 거부한 채 자신만의 삶을 사는 녀석들도 있었다.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관광공사 비정규직 직원으로 입사했다. 일 년하고도 육 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 돌이켜 보건데 나는 열아홉 겨울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있다.

친구들보다 많이 일찍 입사한지라, 힘들어 죽겠다는 녀석들의 푸념을 들어주는 편이다. 욕 한바가지를 목구멍에 꾸역꾸역 차오르도록 퍼부어주고, 힘내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돌려보낸다. 아직 입사하지 않은 녀석들은 여전히 넘쳐나는 레포트와 과제에 파묻혀 살고, 혹은 삶과 피터지게 싸우며 생존의 끈을 부여잡고, 또는 밤이면 밤마다 거리를 헤매며 술에 취해 청춘에 취해 돌아다니고 있다.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 무대에 서며, 우리가 최우수 동아리로 뽑히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질 않았다. 그리고 상을 받았다. 우리가 최고로 뽑힐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연극을 즐긴 덕분이리라.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고, 어설펐지만 열정을 쏟아 연기했고, 박수를 받았다. 그 전통이 이어진 덕일까. 후배들도 좋은 모습으로 동아리를 지켜나가고 있었다.

靑春 푸른 봄이라. 우리는 인생의 푸르른 봄을 보내고 있다. 이 년짜리 비정규직으로 관광공사에 묶여 사는 나. 하지만 날로 푸름을 더해가는 내 청춘. 오스카 와일드는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살지만 우리 중 몇몇은 별을 바라본다’ 고 말했다. 나의 삶이 시궁창일지도 모른다. 나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시궁창의 맨홀 뚜껑으로도 별빛은 새어 들어온다는 사실을. 하루가 힘들고 다시 힘에 부치더라도 또 하루를 살아간다. 우리 스스로 올라선 링 위에서 피터지게 나뒹굴더라도 또 다시 일어선다. 삶이라는 전쟁이 언제 끝날지, 승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오늘도 하루를 살아간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 몸뚱이란 M I C를 들고 노래를 부른다. 

나의 무대는 이제 시작이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한다. 늘 그렇듯. 공연이 끝날 때쯤에는 모두가 나의 관객이 되어있을 테니까.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3:57:52 

 

상병 양 현 
  네, 그 관객들 중 한명은 저네요. 
그리고, 제 공연에도 와주실꺼죠? 
제 공연도 이렇게 화려하진 않지만, 
그래도 볼만은 할꺼에요. 아마도요. 2008-11-21
23:25:34
  

 

병장 김낙현 
  아, 이거 좀 좋은 곳에 쓸일이 있는데 가져가도 될까요? 2008-11-22
00:21:11
  

 

병장 이동석 
  역시 11월의 트렌드는 김무준-이로군요. 
요새 영 재미가 없어서요. 글 맛이 참 좋네요. 역시. 2008-11-22
02:55:38
 

 

상병 김지웅 
  참 무준님의 글은 뭐가 끌리는 맛이있네요 허허 
저같이 초급 글쟁이한텐 좋은 모티브가 될꺼같아요 허허 

앞으로도 좋은글 감사합니다 히히 2008-11-22
03:34:08
  

 

병장 김현민 
  글 잘읽었습니다. 
양아치면 어떻습니까. 
무대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한몸에 받은 당신은 챔퓌온 
소리질르는 니가~ 챔퓌온~ 2008-11-22
03:53:24
  

 

상병 김용준 
  무준님 먼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웃음) 
음...이 이야기 정말 제 가슴에 기쁘고 힘들고 슬펐던 예전 일이 생각나네요. 흑흑. 
과거 회상과 추억을 되살리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하. 2008-11-22
06:57:02
  

 

상병 이우중 
  정말 요새 무준님 물 오르신듯? 
꾸준히 많이 나오는군요. 좋아요. 
잘 읽었습니다. 허허. 2008-11-22
07:21:05
  

 

병장 정병훈 
  일전에 무준님을 낚아본 강태공이 말하겠습니다. 
'무준님 요새 알이 꽉 찼습니다.' 

이상. 2008-11-22
07:44:37
  

 

상병 김무준 
  출처만 표기해주신다면 얼마든지 가져가셔도 상관없습니다. 2008-11-22
07:58:31
  

 

병장 장상원 
  출처를 표기한다면 펌질을 '승락'한다는 무준님의 코멘을 보고- 

당근섭취 후 제 싸이로 옮겨가도 될까요? 

사바세계로 옮겨가는건데 괜찮을지요. 2008-11-22
10:00:05
  

 

상병 김무준 
  예. 글쓴이와 출처만 명확히 해주시면 괜찮습니다. 2008-11-22
10:02:58
  

 

병장 장상원 
  http://www.cyworld.com/maniadecrose 링크- 
이곳의 diary 게시판에 [靑春 푸른 봄이라. 우리는 인생의 푸르른 봄을 보내고 있다. 이 년짜리 비정규직으로 관광공사에 묶여 사는 나. 하지만 날로 푸름을 더해가는 내 청춘. 오스카 와일드는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살지만 우리 중 몇몇은 별을 바라본다’ 고 말했다. 나의 삶이 시궁창일지도 모른다. 나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시궁창의 맨홀 뚜껑으로도 별빛은 새어 들어온다는 사실을. 하루가 힘들고 다시 힘에 부치더라도 또 하루를 살아간다. 우리 스스로 올라선 링 위에서 피터지게 나뒹굴더라도 또 다시 일어선다. 삶이라는 전쟁이 언제 끝날지, 승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오늘도 하루를 살아간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 몸뚱이란 M I C를 들고 노래를 부른다. 

나의 무대는 이제 시작이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한다. 늘 그렇듯. 공연이 끝날 때쯤에는 모두가 나의 관객이 되어있을 테니까.] 

이 부분을 발췌해서 출처와 성함을 밝히고 쓰겠습니다 (웃음) 2008-11-22
13:30:53
  

 

병장 이동석 
  허허, 퍼갈때 이렇게 퍼갔으면 좋겠군요. 사바세계에서는 게시물을 도용하는 일도 있었답니다. 그것도 공모전에 출품해서 돈까지 받았더군요. 허허. 2008-11-22
16:30:31
 

 

병장 이동석 
  아, 여기 글을 밖으로 퍼가서 공모전에 내서 상금을 받은일이 있었대요. 무시무시하군요. 2008-11-22
16:31:04
 

 

병장 정병훈 
  와우... 2008-11-22
17:12:46
  

 

병장 장상원 
  헉. 그런 무시무시한 일이.. 

가져갈때 정말 출처를 표기해야겠군요 (덜덜) 2008-11-22
17:31:28
  

 

상병 양동민 
  병영문학상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죠 큭큭. 


개인적으로, 예술쪽에 종사하시는 분들을 참 좋아합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열정과 순수함이 몸에 베어있거든요. 2008-11-22
19:0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