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만담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9-01-13 10:52:20, 조회: 172, 추천:1
펑.
컵 마을의 평화로운 점심시간은 오늘도 역시 폭발음에 의해서 무너져내렸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갑자기 들려온 폭음에 놀라기는 했어도 폭발음이 들린 곳을 찾는다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당황해서 접시에 담긴 것을 쏟아버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컵 마을 주민들에게 폭발음이란 시도때도 없이 울리는 종소리와 비슷했거든요. 아, 바쁜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습니다. 마을치안유지대 대장인 카세트씨입니다.
"빨리! 빨리 움직여!"
"빨리 소화차에 시동을 걸어!"
"출동! 출동!"
카세트씨는 굉장히 다급했지만 치안유지대 대원들 역시 느긋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폭음은 5분안에 출동해야하는 훈련상황보다도 긴장감이 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가자! 가!"
사람들이야 급하건 급하지 않건 룬엔진으로 달리는 자동차는 엑셀을 밟으면 달려나갔습니다. 치안유지대의 자동차 다섯 대는 자연스럽게 마을 외곽에 있는 티백씨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폭발이 일어날 만한 곳은 그곳 뿐이었거든요.
치안유지대가 티백씨의 집에 도착했을 때, 티백씨의 오두막은 검은 연기를 모락모락 내뿜으며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소화차 준비! 준비!"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도 다급한 것은 카세트씨 뿐이고 나머지 대원들은 느릿느릿 움직였습니다. 사실 대원들은 불을 끄는 것보다 다른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하하하, 이거 또 실패했네."
대원들이 원하던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아, 스승님! 그렇게 상큼하게 넘어갈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쳐다보면 무섭잖아, 믹스."
"죽을 뻔 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쳐다봐요!"
"죽을 뻔 하기는, 이렇게 멀쩡한데."
사실 천연덕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불길을 뚫고 걸어나오고 있는 티백씨와 믹스씨는 멀쩡한 차림이었습니다. 그들이 입고있는 흰색가운도, 돋보기 안경도, 곱슬머리도 멀쩡했습니다.
"믹스씨! 이건 또 무슨 일입니까!"
"오, 카세트씨.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잘 지내셨죠? 잘 지내셨죠?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아아, 여전하시군요. 하지만 오랜만에 뵈었는데 안부인사도 없으면 섭섭하지 않습니까."
"으으으으으!"
"죄송해요! 저희 스승님이 또 바보같이 실수를 저질러버려서요."
"믹스! 스승님에게 바보같다니!"
"아, 스승님은 사과부터 좀 하세요!"
대원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는 카세트씨와 믹스씨와 티백씨의 만담을 즐겁게 지켜보았습니다. 사실 오두막은 이미 잊혀진 지 오래였습니다. 그리고 잊더라고 별로 문제될 건 없었습니다. 저 두 남자는 사실 마법사였거든요. 저번주에는 어디 지하수라도 건드렸는지 창문으로 물이 콸콸 넘쳐흐르는 집에서 물에 쫄딱 젖은 꼴로 탈출했고, 저번달에는 하룻밤새 돋아난 20m가 넘는 나무의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오두막에서 살려달라고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언젠가는 산더미만한 크기의 새가 날아와서 오두막을 '사냥해'가기도 했습니다. 새를 쫓아 애처롭게 달려가던 두 사람의 모습은 마을의 전설로 남았지요. 자잘한 폭발이야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났고 그들은 언제나 멀쩡하게 걸어나왔습니다. 완전히 박살난 오두막조차 다음날이면 멀쩡한 모습으로 새로운 파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시 마법사, 라고 할 수 밖에 없었지요.
결국 넋놓고 구경하던 대원들 때문에 오두막은 전소되었습니다. 오두막에게 입이 있다면 살인방조라며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었습니다. 어쨌건 더이상 태울 것이 없어진 불은 자연히 꺼졌고 치안유지대는 더이상 할일이 없었습니다. 아, 카세트씨는 할 일이 있었습니다. 원인조사였죠.
"도대체 이번에는 뭐가 터진겁니까?"
"아, 그게 전구....요."
"방금 귀찮아서 생략한 겁니까?"
티백씨는 카세트씨의 천적이었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고를 치면서 막상 사고의 원인은 알려준 적이 없습니다. 마법실험 중 일어난 실수에 의한 폭발-이라고 말해줘도 좋을텐데 티백씨는 늘 '빵을 구우려다가'라거나 '화단에 물을 주던 중', 혹은 '벌레가 지나가서'라는 카세트씨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알려주었고 결국 카세트씨는 매번 치안유지대 출동보고서에 비어있는 출동사유 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몇 시간이고 고민하다가, 고민하다가, 고민하다가, 이를 악물고 '해충출몰'이라고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뇨, 생략한 게 아니라 정말 전구가 터졌어요."
"무슨 전구가 터지는 데 그렇게 큰 소리가 납니까!"
"아무래도 전구로 가는 룬이 좀 강했던 것 같아요."
"아니, 뭐 얼마나 강하면 전구가 터져서 집이 폭발하냐는 말입니다!"
"한 100만 룬정도?"
카세트씨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습니다. 길거리에 차일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구리보다도 흔했던, 마법사들의 축복으로 여겨졌던 마력이 담긴 돌인 룬이 일반인에게도 도움이 되기 시작한 건 100년이 채 안됐습니다. 룬엔진이 개발되어 룬을 동력원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룬은 전 세계의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룬엔진은 마법사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저급 룬으로도 충분한 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대중화 된 자동차의 경우에는 100룬이면 충분히 달릴 수 있었습니다. 100만 룬이라니, '룬 출력 과다로 인한 폭발사고.' 모처럼 출동사유에 제대로 된 이유를 적을 수 있게 된 카세트씨는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모든 일에 열심히인 카세트씨조차 사고 뒷처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티백씨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거짓말이죠?"
멀어지는 자동차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믹스씨가 말했습니다.
"응."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며 티백씨가 대답했습니다.
"왜 그랬어요?"
"나의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빼앗길까봐."
"그 혁명적인 아이디어가 뭔데요?"
"아무리 너라도 알려줄 수 없어."
"앞으로 설계 안해드립니다?"
사실 사람들이 알고있는 것은 반만 옳았어요. 티백씨가 마법사인 건 맞지만 믹스씨는 마법사가 아니었거든요. 믹스씨는 그저 엔지니어였답니다. 티백씨가 떠올리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어떻게든 현실적인 것으로 붙잡아 실현하려 했던 수많은 기계장치들의 설계자였지요. 그리고 믹스씨는 그 설계의 댓가로 티백씨에게 마법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멀었지요.
"영원히 필라멘트가 끊기지 않는 전구를 만들고 싶었어."
"제가 설계해드린 장치는 그런 게 아니었는데요."
믹스씨가 잿더미가 되어버린 오두막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응, 마지막에 약간의 마법을 더했거든."
티백씨가 손을 까딱하자 검은 연기만 간헐적으로 뿜어내던 잿더미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리고는 불길이 점점 커지며 내려앉았던 오두막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모습이었지요. 불길이 창문을 타고 집 안으로 빨려들어간 후에는 언제나처럼 멀쩡해진 오두막이 서있었습니다.
"그 약간의 마법이 어떤건지 여쭤봐도 되나요?"
"필라멘트에 어떠한 외부적 영향도 닿지 못하도록 마법을 걸었지. 그러면 끊어질 일이 없잖아."
"그러면 100만룬이라는 어마어마한 힘이 흘러나갈 곳이 없잖아요."
사실 티백은 지독한 기계치였습니다. 손짓하나로 시간을 되돌릴 정도로 어처구니없이 뛰어난 마법사였지만 마찬가지로 어처구니없이 과학에 대하여 무지했습니다.
"에휴."
믹스씨는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들어섰습니다. 얼핏보면 정신없이 어질러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치밀하게 어질러진 내부가 믹스씨와 티백씨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습니다.
"믹스군, 배고프지 않아?"
티백씨가 가운을 벗으며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실험은 끝인 것 같군요.
"그러게 점심 먼저 먹고 테스트하자고 했잖아요."
"점심은 갓 구운 따끈따끈한 빵이 좋겠어."
"말라비틀어진 빵이라면 있습니다만."
"나가서 사오면 되잖아. 프림 아주머니네 빵은 정말 맛있다구."
"지금 가면 보나마나 이번엔 무슨일이냐고 달려드는 동네 꼬마들때문에 무지하게 피곤할거에요. 그냥 마른 빵 드시죠."
"내가 이럴 줄 알고 준비해 둔 게 있어. 부엌 찬장을 열어봐."
티백씨가 바닥으로 늘어지며 말했습니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도 누울 장소가 있다는 것 자체가 치밀하게 어질렀다는 증거였습니다. 믹스씨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부엌으로 향했습니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도 발을 딛을 곳이 있다는 것 또한 치밀하게 어질렀다는 증거였지요.
"이거요? 이게 뭔데요?"
찬장속에는 이상하게 개구리를 닮은 쇳덩어리가 들어있었습니다. 물론 믹스씨가 설계하고 만든 물건은 아니었습니다.
"따끈따끈오븐 2호란다."
"이름말고요, 뭐에 쓰는 거냐구요."
"과학과 마법의 운명적 만남, 0.2룬의 동력만으로 언제 어디서나 마른 빵을 따끈따끈, 촉촉한 빵으로 만들어주는 신비의 기계지."
"오, 스승님!"
믹스씨가 감탄의 눈빛으로 티백씨를 바라보았습니다. 엉뚱하긴 해도 마법실력만은 초고급! 그의 마법은 절대로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실험해 볼까?"
티백씨가 자신만만하게 몸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믹스씨의 몸은 굳었지요.
"실험이요?"
"아, 걱정 마. 이번이 첫 가동이긴 하지만 자신있다구!"
"잠깐만요, 2호라고 했죠? 1호는 어디있어요?"
"1호?"
믹스씨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습니다. 행복했던 지난날을 회상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저번 주에 어디선가 갑자기 물이 쏟아져 나온 날 기억하니?"
"집안 가득 물이 차올라서 익사할 뻔 한 날이요?"
"그 물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프림 아주머니네서 사올게요."
믹스씨는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하루에 두 번 사고를 치느니 동네 꼬마들을 상대로 과장 하나 없지만 누구나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해주는 편이 나았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오렴."
티백씨에게는 평소와 같은 평온한 오후의 시작이었습니다.
덧. 그러니까, 심심했어요. 음.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02:58
병장 김민규
지난번에 나온 물, 그거 누가 그랬을까? 누가그랬을까?
낄낄낄, 티백 하니까, 녹차 티백이랑, 프리즌 樗 그 티백 아저씨가 눈앞에 계속 아른거려서 대강 0.2룬만큼의 찌릿함이 대뇌를 타고 흘러 시신경을 교란했어요. 필라멘트가 팔리아멘트로 보인건 절대로 그것 때문이었답니다.
암요. 고로 이게 다 기화씨의 마법 때문이다? 2009-01-13
11:07:07
병장 이동석
우어, 댓글을 날려먹다니 아마추어같이. 그런데, 이건 불가항력- (서버가 불안정함돠)
암튼, 헤-하며 잘 봤어요.
이렇게 댓글이 날아다녀서 요새 댓글달기가 좀 겁나긴 하더군요. 2009-01-13
11:24:04
일병 송기화
민규님/
이름짓기가 지독하게 어려워서 그냥 눈에 보이는 걸 가져다가 썼습니다.
그러니까 녹차티백이에요.(웃음)
동석님/
전 제가 올린 글이 책마을을 마비시켰다는 얼토당토하는 초능력을 상상하고있었어요. 헤- 2009-01-13
11:33:04
병장 김민규
푸하하하, 100만룬짜리 실험으로 인한 서버의 다운?
제발 그것만은.... 2009-01-13
11:35:29
병장 이우중
허허허.
녹차티백과 커피믹스는 알겠는데 거긴 카세트도 있는 건가요? 우와- 잘 읽었습니다! 2009-01-13
11:37:22
병장 전백학
재밌습니다.
이름들이 다 특이해서 더 웃기네요.(웃음) 2009-01-13
12:46:23
상병 차종기
아아 , 나의 조회수 0의 상큼함을 db접속 에러로 날려버렸어요, 흐윽
어쨌거나 유쾌한 글이네요. 히히 2009-01-13
13:35:06
일병 송기화
우중님/ 장식품과 비슷한 개념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답니다.
백학님/ 멀쩡한 이름 좀 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까마득한 작명의 벽(멍)
종기님/ 요즘들어 에러가 참 잦더라구요. 이게 다 저의 초능력때문이죠(응?) 2009-01-13
18:46:21
병장 이동석
이것이야 말로 기화효과(?)
송기화님이 글을 올리면 갑자기 트래픽량이 급증하고, 수 많은 이들이 찬탄의 댓글을 달기에 책마을 서버가 일시적으로 마비된다는 그 기화효과? 2009-01-14
10:46:46
일병 송기화
그 댓글이 정말 찬탄인지 어쩐지는 둘째치고,
그냥 초능력이라고 해주시면 안되나요(웃음) 2009-01-14
11: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