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마지막 고백
병장 김무준 2009-06-03 14:15:54, 조회: 169, 추천:0
배터리 한 칸에 백일 미만자를 상징하는 노란 견장을 달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야 농담처럼 후배들에게 입사와 동시에 배터리 네 칸을 채우고 공사생활을 시작하는 거 아니었냐고 농담을 던지지만 그랬던 때가 있다. 일과는 엄청나게 바빴다. 기상방송이 울림과 동시에 전등을 켜고 커튼을 열어젖힌다. 침구류를 가지런히 정리해두고 환복을 한다. 전투화를 신고 내려오기 까지가 이분이다. 밖으로 달려 나가 빗자루와 밀대걸레를 챙긴다. 자기 전에 건조하다는 이유로 바닥에 뿌려놓았던 물을 두 개의 빗자루를 들고서 화장실까지 쓸어낸다. 밀대걸레로 다시 바닥을 닦고 청소도구를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여기까지가 오 분 이내. 정수기에서 시원한 물을 두 통 받아두고 세면을 실시한다. 이를 닦고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돌아온다. 이쯤하면 기상 후 십 분 정도가 지난다. 식당으로 달려가 식기건조기에서 식기를 꺼내는데, 번호 주기가 되어있는 대로 낮은 선배들은 식기대 구석으로, 높은 선배들은 식기대 앞 쪽으로 식기를 정리해둔다. 그리고 점호를 취하러 운동장으로 나가면 십오 분 정도가 되고 부서 인원을 파악해 팀장에게 전달한다. 아침에만 이 정도였다. 하루 종일 뛰어다니는 게 일이었다. 이십이 시. 취침과 동시에 곯아떨어져야만 했다.
누구나 다 옛 시절을 회상하면 그 땐 이랬지 하면서 푸념을 늘어놓는다. 시간이 쏜살처럼 지났다. 새 거, 신삥, 뉴 타입 따위로 불리던 내가 이제는 석기시대 유물이 되어버렸다. 후배들은 옛사람으로 취급하거나, 민간인이라든가 날백수로 부르기도 한다. 지난 칠백여 일의 생활을 돌이켜본다. 꿈을 꾸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내가 권력을 휘두를 때가 오면 반드시 이 썩어빠진 세상을 바꾸고야 말리라. 혁신에 진보를 더한 변화를 가져오겠다고 다짐했었다. 변화는 찾아왔다. 다만, 내가 시작한 변화는 아니었다. 몸담고 있는 관광공사 성남 지부에 변화는 급격하게 찾아왔다. 대빵이 바뀌면서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을 선포했고 인위적이고도 강제적인 조치들이 취해졌다. 세 칸이고 네 칸이고 한 칸짜리 후배와 하는 일이 별 차이가 없어졌다. 누구나 리모콘을 잡을 수 있고, 침상 위 가로 본능을 펼치게 되었고, 손빨래 문화는 사라졌으며, 팀장에게 보고 없이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자리 잡았다.
보통 시키면 하질 않고, 내버려두고 방목하듯 키워야 능률이 오르는 내게 급작스런 변화는 힘겨운 것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나름 변화에 적응했다. 할 일은 남에게 돌리지 말고 직접 하자는 주의인지라 비교적 열심히 지내왔다. 부여된 것이 부당하다 생각 될 때면 가끔 반감을 표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결국에는 했다. 공사생활의 모토가 후배와 선배 모두, 그리고 내 자신에게 당당하자였기에 그렇게 지내고자 최선을 다했다.
이제 삼일 남짓한 시간을 남겨두고서 약간의 회의를 품었다. 많이 나아졌대도 여전히 바빠 보이는 신입사원의 모습에서, 과연 무엇이 변했는지를 고민했다. 이 년 전과 비교했을 때 생활은 굉장히 편해졌다. 각종 부조리와 악폐습, 폭력들이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신입사원들은 여전히 긴장 속에 하루를 보낸다. 여기저기 눈치 보기 바쁘다. 높은 선배로 대우를 받을만한 후배들이 일 년 육 개월의 공사생활을 지냈음에도, 단지 늦게 입사했다는 이유로, 후배보다 선배가 월등히 많아 막내와 다름없는 생활을 한다. 그네들의 생활이 편해지고 우리의 생활이 불편해졌다 해도 변한 게 무얼까. 뭔가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한 모습으로 생활하는 후배들에게서 아무것도 바뀐 게 없지 않나 생각했다. 수동적인 변화가 닥쳤다는 이유만으로 능동적인 변화를 포기했다. 내가 한 게 아니니까, 라는 변명과 함께. 오히려 변화 앞에서 이를 더욱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면, 진심으로 후배들에게 다가갔다면 모두 좀 더 밝게 지내고 있지 않았을까.
며칠 전 잠자리에 누워 후배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다. 유난히도 생활을 못해 진심으로 혐오했던, 갖은 욕설과 잔소리를 퍼부어댔던 동갑내기 후배에게 힘겹게 사과의 말을 꺼냈다. 미안했노라고. 미운정이 들어버린 탓일까. 착하다 못해 바보만큼 순박하기 만한 녀석을 죽이려 들었었다. 네가 정말 싫었지만 내가 이곳을 떠난 후에, 생활을 잘 하던 후배들보다 네놈이 더 보고 싶을 거라고,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곰처럼 큼지막한 몸을 뒤척이면서 녀석은 한참을 웃었다.
무엇이 정말 힘들지 않은 것일까. 뭐가 편한 걸까. 단순히 생활이 편해지면 모든 게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배터리 네 칸을 채우면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던 이 생활이. 사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힘들기 마련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지난 시간동안 몸이 편해졌으니 내 할 일만 하면 된다고 자위하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당당하고 싶다는 걸 핑계로, 나도 힘겹다는 변명으로, 이기적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건 아닌지. 씁쓸함이 가슴 가득 퍼졌다. 잠자리에 누워 했던 미안하다는 말을 조금만 더 일찍 했더라면. 스스로를 좀 더 낮출 수 있었더라면. 먼저 손을 내밀었더라면. 우리는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많이 웃을 수 있지 않았을까. 배터리 한 칸 두 칸이던 이들이, 지금도 이 년 전의 나와 같은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몰랐다. 현실을 바꿔 모두가 편해지는 걸 꿈꿔야 했던 게 아니라, 후배들이 더 이상 나와 같은 꿈을 꾸지 않도록 노력해야했음을.
아직도 말을 높이고 있는 동갑내기 후배들에게. 그리고 형과 아우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지 못함에 뒤늦은 용서를 빌며,
미안하다.
그래서,
사랑한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25:07
병장 차종기
후회는 어느 곳에나 있기 마련입니다.
무준씨는 최선을 다하셨어요.(짝짝짝)
이글을 프린트 해서 후배들에게 보여드리면 어떨까요, 후후 2009-06-03
14:40:12
상병 진수유
수고하셨습니다. 2009-06-03
15:30:03
상병 김태완
결국은 미안하다 사랑한다. '피스'로 결론짓자 다짐하셨군요.
고해성사란 말을 보고 천주교이시란 것을 새삼 깨달으며 아직 1/4정도 남았지만 원래 궁생활이 다 그런거지요라고 말씀드립니다. 2009-06-03
15:30:39
일병 송성문
아..이제 가시는건가요//수고하셨습니다-
...음..과연 어떻게 선후배를 대해야 잘하는걸지...고민하게되는군요 2009-06-03
18:28:04
병장 이동열
몸서리 쳐질 만큼 유사한 과정을 겪었군요. 우리는-
저도 후배들에게 고맙다는 말 남겨야겠습니다. 2009-06-04
09:31:39
일병 엄재하
나는 몰랐다. 현실을 바꿔 모두가 편해지는 걸 꿈꿔야 했던 게 아니라, 후배들이 더 이상 나와 같은 꿈을 꾸지 않도록 노력해야했음을.
///뭉클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2009-06-04
16:01:32
상병 최한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