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마더, 망각의 기계들의 제의  
상병 홍명교   2009-06-12 210302, 조회 156, 추천0 

되도록이면 스포일러를 노출하지 않으려 노력하였습니다. 아직 보지 못한 많은 분들을 위해서.

지난 휴가였다. 영상원 영화과 동기들중 항상 술을 같이 마시던 둘과 밤새 술을 마셨다. 새벽 4시에야 잘 수 있었는데 4시간만에 일어나야했다. 어지럽고 속도 좋지 않았다. 불굴의 의지로 피카디리로 향했다. 땡전한푼 들이지 않고 구매()한 조조 영화를 봐야하기 때문이다. 복귀 하루전이었다. 그 영화만은 놓치기 싫었다. 봉준호의 네 번째 장편영화 마더. 어느새 그에 대해선 막연한 기대가 생겨버린 것이다. 봉준호가 내 최고의 감독은 아니었지만, 꼭 짚고 넘어갈 수 밖에 없는 텍스트가 된 것은 엄연할 사실이다. 그는 상업영화, 장르영화의 바닥 위에서 유연하게 뛰어놀면서 아슬아슬하게 정치적 맥락의 줄타기를 놓치지 않고, 빗겨나가지도 않는다. 그가 '머리'로 영화를 만들고, 구조를 짜고, 직조해낸다는 증거다. 그의 이런 점에 무한한 인간적 매력을 느낀다. 아무래도 나는 고다르나 허우샤오시엔처럼 타고난 천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누벨바그의 태동과 함께 창간되어 예술로서의 영화를 위한 기조를 잃지 않고 있는 모던시네마의 역사 그 자체, 또는 현존하는 사가들의 집단)의 저명한 평론가는 봉준호를 마이클 만과 비교하곤 했는데, 내가 보기에 봉준호는 한국의 하네케처럼 느껴진다. 훨씬 더 대중적이고 유연하며, 한국적인 하네케.
금년도 칸느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하얀리본의 감독 미카엘 하네케는 늑대의 시간, 퍼니 게임, 미지의 코드, 피아니스트(이자벨 위페르 주연) 등 때로는 충격적이고 언제나-항상 센세이셔널을 일으켰던 영화들의 연출자. 오늘날 죽어가는 유럽 아트영화의 가장 중요한 중심.)

1. 수와 미의 제의적 대응

마더는 첫장면과 마지막 장면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영화이다. 첫번째 씬에서 엄마역의 김혜자는 들풀이 가득한 들판 위를 미친듯이 걸어오다가 춤을 춘다. 탱고풍의 노래가 비장하게 흘러나오는데, 엄마는 이 음악에 맞는듯 맞지 않는듯 제멋대로다. 그런데 그 춤이 너무도 처음보는 것만 같은 괴이스러움이 가득한 것이어서 관객은 의아함을 감추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이 음악소리는 씬 내적인 것은 절대 아니며, 그저 bg사운드 설정으로 들리는 것인데, '엄마'가 저 음악소릴 들을 수가 있는것인가, 하는 의아함도 생긴다. 보통 영화 속 인물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그 무엇의 장치 역시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이 장면에선 그런 것이 없다. 
마더의 영화적 충격은 이 압도적인 첫장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체 이 영화 뭐야 대체 무슨 얘길 하려는거지 말하자면 영화의 장르적 재미, 관객의 흥미를 끌어모으는 에너지는 이런 강력한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봉준호는 그 점에서 대단히 탁월하다. 이 순간부터 '나'는 시각과 촉각, 청각을 곤두세우고 스크린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봉준호 역시 비주얼리스트다. 만약 봉준호와 박찬욱, 그리고 김지운의 오늘을 '비주얼'로서 평가한다면, 도리어 비주얼리스트라는 수식을 달고 있는 김지운이나 박찬욱보다는 봉준호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놈놈놈과 박쥐의 핵심적인 장면들은 모두 대단히 비주얼적 야심을 갖고있는 것이었지만 마더에서 '엄마'(김혜자 분)가 춤을 추는 처음과 끝의 두 장면에는 못미친다. 대단히 비주얼적인 첫장면에서 나는 약간의 의구심을 가졌더랬다. 혹시 봉준호가 얄팍한 욕심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야기와 플롯을 장인의 솜씨로 직조해내는 상징화법의 대가 봉준호는 비주얼에 있어서도 비등한 성취를 이루어낸 것이다.
'엄마'의 춤은 비로소 마지막에 가서 제의성을 갖고 돌아온다. 나는 마치 이 모든 비극에 대해 죄를 뉘우치는것처럼 그녀의 '미친'춤사위를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 미쳤다. 그녀는 미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무엇이 그녀를 미치게 한것일까

2. 할 수 있는자가 구하라!

원빈(도진 아마 극중 이름이 원빈의 본명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은 시골마을의 20대 청년이지만 어딘가 조금 모지란 녀석이다. 동네사람들에겐 남자 취급, 어른 취급 받기보다는 어리기만하고 어리석기만 한 '바보'취급을 받는다. 한약재를 파는 엄마는 그런 아들이 항상 걱정이다. 댕강댕강 자르는 한약재 작두에 손가락이 잘릴세라 문밖의 아들만 감시하고 걱정하느라 하루를 다 보낸다. 그런데 이 아들 녀석이 어느날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는 것이다. 이 지극정성의 엄마에겐 사방이 캄캄하고 눈이 다 뒤집힐 일이다. 세상에나, 아무리 좀 모자라다고해도 심성만은 착한 아들인데, 살인사건 용의자라니. 분명 아닐 것이다. 엄마는 아들을 구해내기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온갖 수단을 다 쓴다. 어릴때부터 제 자식처럼 봐온 형사녀석(형사 역시 '엄마'에게 '어머니', 또는 '엄마'라고 부른다.)을 타이르기도, 빌기도, 화내기도 하고, 그마저도 힘들자 돈 밝히는 동네 변호사를 찾아가 거금을 바치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나 항상 '봉준호-월드'의 권력체계가 그러했듯 그들은 '우리'의 편이 아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제 일을 대할뿐이며, 전혀 이 절체절명의 사건을 제 일처럼 여기지도 않는다. 
살인의 추억의 형사들이나 괴물의 의사들, 경찰들, 방역당국의 행태를 보라. 그들은 다소 우스꽝스럽게 요란을 떨면서도 결국은 위기의 상황에 닥친 이 평범한 이들을 더 옥죄기만 했을 뿐이다. 플롯의 이 지점에서 봉준호-월드의 코드가 던져진다. 할 수 있는 자라 구하라! 영화는 관객에게 말한다. 급박한가. 당신이 구하라! 이미 세상은 당신의 모든 것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당신을 구해줄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원빈의 유일한 친구()였던 동네 양아치 진구의 조언이 그녀로하여금 동하게 한다. 엄마! 지금부터 엄마는, 아무도 믿지마! 엄마 자신만 믿어! 나도 믿지마! 

3. '엄마'를 따라가는 장르적 여정

급기야 엄마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범인을 잡기로 한다. 이 지점에서 봉준호의 주특기인 스릴러 장르의 역할극이 시작된다. 엄마는 범인을 찾아떠나고, 사건의 면모는 하나하나 잡힐듯 잡힐듯하면서도 잡히지 않고 도망간다. 이 숨막힐듯 짜여진 추격극에서 엄마는 구조 안에서 스스로를 구제하려는 행동자로, 그리고 '엄마'가 만나는 다양한 인물들은 사건의 어렴풋한 실마리로서 지나쳐간다. 그러나 사건의 궁극적 지점에 다다르기까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도록 그 의미망들은 어렴풋하게 얽혀있다. 얄팍한 추리극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극적 긴장감은 점점 강해지고 보는 이로하여금 심장을 조여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이 장르적 여정을 마음껏 따라가고 즐겨라. 이 순간이 되면, 설사 영화를 '머리'로 읽으려는 자들도 그냥 넋을 놓고 무작정 따라가는게 옳다. 그래야 영화가 말하는 감정의 궁극적 지점까지 도달하여 그 춤의 기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봉준호 영화가 말하는 이 극읽기의 매뉴얼대로 순응적으로 따라가주었다. 영화는 있는그대로 즐기는 자에게 고스란히 그만큼의 감정과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니.

4. 제거된 여성성

이택광의 평론에 적극 동의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그리고 핵심코드는 여성성과 섹스, 그리고 엄마이지만 이 영화의 여성들은 이미 '여성'이 제거되어있다. 요컨대 봉준호는 그 '여성'이 제거된 현실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세계에는 오직 비극뿐이다. 공동체 안에서 쌀떡녀라고 불리는 여고생은 비극적으로 죽임을 당했고 그 살인사건은 이 영화의 극적 발단의 계기이자 이야기의 핵심축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 극의 주체는 여자인 '엄마'이다. 그러나 '엄마'도, '쌀떡녀'도 여성으로서가 아닌, 그저 만인의 엄마로서의 '엄마'이며, 공동체 남성들의 주체할수없는 욕망의 분출구인 '쌀떡녀'일뿐인 것이다. 이 끔찍한 남성들의 공동체에서 여성이란 만연한 피해자의 모습으로서 등장하지도 않지만 비극적 세계의 어떤 진앙지처럼 다가오게 만든다. 그러니까 여성=피해자의 공식을 수립시키는 모습을 갖진 않으면서도 오늘날 현대의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당도한 문제인 성차의 문제를 비극이라는 형식을 빌어 대단히 상징적인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엄마는 이 모든 비극의 무너질 듯한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안았고, 죽임당한 여고생은 보란듯이 살해당해 동네 한복판에 그 시체가 전시되었다. 

5. 망각의 기계들

사람들은 자신의 죄있음을 되려 앙갚음으로 망각하려한다. 그 제사는 다분히 폭력적이다. 뺨따구를 때릴수도, 폭력적으로 취조할수도, 그리고 무작정 비난할수도 있다. 또는 가난한 소녀가장을 죽음에 이를 정도로 집단적 폭력을 가해 몰아넣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이행과정을 통해 그 집단적 광기와 폭력성을 지극히 개인적인 폭력의 지점, 광기로 옮겨놓는다. 도저히 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시간이 왔음을 나도 모르게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어찌 하겠는가. 나는 종반부 내내 그녀가 자살하고말거라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자살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지적 설정의 모호함이란!
그러나 울리는 탱고 음악. 엄마는 춤을 춘다. 슬프게, 슬프게. 모든 사건이 마무리 되고 영화가 끝날때, 나는 도저히 편한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올 수 없다. 그 인상적인 엔딩 음악을 들으면서 미칠듯이 심란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영화관을 나왔다가도 다시 또 돌아가고, 또 돌아간다. 망각의 기계인 내 자신의 죄있음을 용서받길 원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나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영화관을 떠나는게 이처럼 힘들수가 없었다. 우리는 모두 망각의 기계가 되고말것이다. 나는 하루종일 심난했고, 궁에 있었던 그 어느때보다 흡연하고 싶은 욕구가 목구멍 위까지 치밀어올랐다. (나는 2년여전에 담배를 끊었다.) 나는 다음날 슈가 복귀때까지 그 불편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런 불편함은 입대 하루전에 본 아워뮤직(2004, 장 뤽 고다르) 이후 처음이었다. 어느새 내가 조금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서도 여전하다. 그래서 자신있게 말하건대, 마더는 우리가 꼭 봐야할 영화이다. 당신이 불편해지길 바란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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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이재원 
  캬-악- 좀있음 설탕찍어먹으로 가는데, 보고나서 이글 한번더 읽어봐야겟어요. 
영화나 책이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읽는 분들이 참 신기해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저같은 바보는..(웃음) 200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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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김태완 
  흠. 영화 다 봤군요. 예고편을 봤을 때는 '마더'를 아들의 무죄선고를 위해 엄마가 직접 범인을 찾아다니는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저런 씬들과 의미들이 내포돼 있었다니. 생애동안 지었던 죄들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제의하게 만들거라는 이 영화보기가 갑자기 두려워졌습니다. 인류의 원죄까지치면 아마 제가 지은 죄는 어마어마할테니 말이죠. 죄를 물으려는 듯한 부리부리한 눈을 치켜뜨고 제쪽으로 고개를 획 돌리는 김혜자의 모습이 갑자기 머리에서 튀어나옵니다. 200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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