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대장장이3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9-01-12 16:40:13, 조회: 86, 추천:1
삐걱.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온다.
"여행자 녀석 왔느냐?"
"어찌 아셨습니까?"
여행자가 웃으며 대답한다. 여전히 이곳 저곳의 옷을 마음대로 걸쳐 여러모로 어색한 차림새였다.
"네녀석 말고 멋대로 문열고 들어올 녀석이 또 어디 있다고."
대장장이가 미소를 지으며 모습을 보인다.
"앉아. 들어오기는 멋대로 들어오면서 왜 매번 그리 멀뚱멀뚱 서있는 거야?"
"그것도 그렇군요."
"또 어디서 칼 주워온 게냐?"
자리에 앉으며 대장장이가 물었다. 지금 꿈을 한 사발 뜰지 칼을 보고 뜰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예, 또 우연히 한 자루 주웠습니다."
여행자는 낡은 가방에서 천에 쌓인 꾸러미를 하나 꺼냈다. 작은 크기였다. 꾸러미를 풀어헤치자 짧은 칼 하나가 보였다. 손잡이보다 칼날이 짧은 이상한 칼이었다.
"허, 욕심쟁이 칼이로구만?"
"욕심쟁이요?"
흥미롭다는 듯한 여행자의 눈길과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한 대장장이의 눈길이 동시에 칼에 닿았다.
"욕심으로 만들어 가진 칼이니 욕심쟁이 칼이지. 대단했다고, 그때 마음의 빛깔은."
대장장이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있었다. 지난 날을 떠올리는 듯 했다.
"죄가 많은 녀석이었어. 나야 상관 안하지만 자기 입으로 그렇다고 말하니 그런 녀석이겠지."
"어떤 죄였습니까?"
"도적패의 우두머리로 할 짓 못할 짓 다 하고 다닌 모양이야. 어쩌다가 정신을 차렸는지 손 털고 나왔다더구만."
"그러면 이 칼은 무엇을 베는 겁니까?"
"그 욕심쟁이 녀석을 향한 감정을 베는 녀석이야."
"감정이요?"
"그래, 감정. 사랑이든 미움이든 가리지 않고 베어내는 칼날이야."
대장장이는 아무래도 목이 메인다는 듯이 탁자옆에 놓인 동이와 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동의를 구한다는 듯이 여행자를 바라보았다.
"길지 않으면 마저 말씀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칼을 보면서 듣고 싶습니다."
"흠."
아무래도 아쉽다는 듯이 입을 다시며 대장장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냥 감정을 베는 거야. 그게 무엇이든. 사랑, 원망, 화. 베어 낸 것의 색을 보고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있게 됐지."
"감정만 베는 건가요? 그게 무슨 소용이죠?"
"사람이란 건 감정에 크게 좌우되는 거야. 아무리 옳은 일을 머리로 수천, 수만번 생각해도 마음에서 감정이 일지 않으면 행동하기는 쉽지 않아. 옳지 않은 일이라도 감정이 충동질하면 쉽게 행하지."
"하, 그래서 그랬군요."
여행자가 뭔가 알겠다는듯이 말했다.
"그래서라니? 무엇이?"
"이 칼의 주인이었다던 사람 말입니다. 고아원을 세워서 아이들을 잘 키웠다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잘 먹이고 잘 키운 아이들이 막상 떠날 때는 별 미련 없이 휙 하고 떠났다고 하더군요. 다시 찾아와서 인사하는 일도 없고. 마지막에는 꽤나 쓸쓸하게 살았다고 하더군요."
"베었구만, 아이들을. 그저 자기를 키워준 사람으로 '기억'될 뿐이었겠지. 자기 나름대로 받는 벌이었겠군."
"벌이요?"
"칼을 받을 때 말했어. 이 칼로 자신에게 원한을 갚으려 오는 사람들에게서 자기를 지키겠다고. 그래서 내가 농담삼아 말했거든,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는 게 맞지 않냐고."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자기는 너무 많은 사람에게 죄를 지어서 한 명에게만 벌을 받는 건 오히려 공평하지 못하다고 하더군. 자신의 벌은 알아서 받은 거로군. 독해."
"그정도 마음이니까 칼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드셔도 됩니다. 뭘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대장장이가 기쁜 표정으로 칼을 동이에 넣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대장장이는 동이에서 자극적인 향기를 풍기는 꿈을 두 사발 퍼내어 여행자의 앞에 한 사발을 내려놓았다. 자신의 앞에 놓인 꿈을 보며 여행자가 말했다.
"감사합니다만 듣고싶었던 이야기도 다 들었고, 전 이만 가봐야 겠습니다."
하지만 대장장이는 아무 대꾸 없이 꿈을 들이키고 있었다.
"저, 어르신?"
대장장이가 사발에서 입을 떼었다.
"네가 관심있을 만한 일이 아직 하나 남았다."
"예?"
"찾아봐, 무얼까?"
대장장이는 다시 꿈을 홀짝였다.
"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여행자가 탄성을 내뱉었다.
"새로운 칼이군요."
"눈썰미 하나는 기가막혀."
대장장이가 감탄했다.
"세상을 보고 다니는 여행자가 눈썰미가 없다면 그것도 비극이겠지요. 그런데, 이거..."
대장간의 벽에는 수많은 무기들이 장식되어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하나하나 늘어난 무기들에 얽힌 많은 이야기를 여행자는 들어왔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새로운 칼이 하나 추가되어 있었다.
"왕이 가져온거야."
대장장이가 걸려있던 칼을 집어들고 말했다.
"왕이요? 왕 말씀이십니까?"
"왜, 왕이라고 하니 이상한가?"
"그게, 아무래도 이 칼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요."
"호오, 그래? 그런데 왜?"
"그때 이 칼의 주인은 아무래도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랬겠지. 말했잖나, 자네가 관심있을 만한 일이라고."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 마시라고."
대장장이가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행자는 이곳을 찾을 때마다, 칼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궁금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처럼 얼빠진 표정을 짓는 일은 드물었다.
"욕심의 맛이라구. 묵직한 게 재밌어."
조바심을 내는 여행자를 놀리는 것도 대장장이의 재미였다.
"았았네, 알았어. 그러니까 이 칼의 주인은 세상과 맞서겠다는 녀석이었어.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칼을 만들었지."
"예. 저와 만났을 때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허공에 검을 휘두르고 있더군요."
"세상의 목을 베겠다는 자였으니. 세상의 목을 찾아 다니고 있었겠지. 어쨌건 벨 수 없는 자를 만났다더군."
"그게.."
"자네겠지. 자네가 여행을 할 땐 세상의 틈에 걸쳐져 있지 않나. 세상을 베는 검으로도 벨 수 없었던 거지. 재밌는 얘기를 했다면서?"
"세상을 죽이면 비명이 끊길 것 같냐고,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 말에 꽤나 자극을 받은 모양이네. 그 길로 나라를 하나 세운 모양이야."
"나라를요?"
여행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본래 관찰을 즐기는 여행자가 남에게 조언을 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 한 나라의 건국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괜찮았겠지. 폭우가 내리면 비구름을 베어버리고, 폭풍이 불면 천둥 번개를 베어 없애고, 적국의 침입? 말도 안되지. 대단한 나라 아니었겠나?"
"그건 말도 안되는 나라입니다. 그런 말도 안되는 힘으로 세운 나라는 그 힘이 사라지면 무너져요."
여행자의 표정은 어두웠다. 나라가 무너지면 그 나라의 백성들은 어떻게 되는지, 그는 많이 보아왔다.
"이 칼이 지금 여기, 내 손 위에 있지않는가."
대장장이의 표정은 온화했다.
"그건.."
"내가 벽에 장식해두는 무기는 주인이 가지고 돌아온 무기 뿐이야. 이 칼도 직접 나에게 전해주었지."
여행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모르겠다는 표정 또한 같이 떠올랐다.
"왕이 그러더군. 이 칼로 왕국의 성은 얼마든지 두 동강 낼 수 있겠지만 이 나라는 벨 수 없을 거라고. 온 백성을 베어 없애도 나라는 남을 거라더군. 정말 굉장한 표정이었어. 내 질리도록 오래 이곳에 있었지만 그런 자신만만한 표정은 또 처음이었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는건가?"
"예?"
"가서 보고 와. 자네가 여행자 아닌가.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지, 자네가 보고 오면 되지 않는가?"
"아."
"자네 그렇게 넋나간 표정은 처음 보겠네. 왕이 자네를 꼭 한번 다시 보고 싶다고 하더군. 한번 가보게나."
여행자가 서둘러 일어났다.
"자네, 아직 한 모금도 안 마셨는데?"
대장장이는 아쉽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음번에 올 때는, 제 꿈을 함께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호오, 이제 그만 걸을텐가?"
"왠지, 이번 여행으로 평생 볼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때는 지팡이도 필요 없겠지요."
"허허."
대장장이는 오랜 친구를 잃는 것 같아 아쉬워하는 모습이었다.
"아, 어르신. 여쭈어 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행자가 문을 열며 고개를 돌려 물었다.
"뭔데?"
"왜 하필 날붙이입니까?"
"무슨 소리야?"
"어르신께서 만드신 것들이 왜 모두 날붙이인지, 무기인지를 여쭈었습니다."
"아, 그거? 별 거 아니야."
대장장이가 멋쩍게 웃었다.
"이곳을 찾는 자들은 모두 무언가와 싸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야.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무언가와 맞서려고 하는 사람들이지. 싸울 때 필요한 게 무기 아닌가."
쾅.
대장간의 문이 닫혔다. 여행자는 지팡이를 꺼내 휘둘렀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무자비한 변화와 싸우고 싶었던 자가 자신의 해답을 찾으러 걸음을 옮겼다.
덧.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다 지워버리고 급마무리.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02:31
상병 김예찬
기화님의 글은 정말 훈훈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09-01-12
17:31:59
병장 이동석
우어엉? 뭘 다 지워버리신건가요?
아, 정말 이래서 기화님의 글에는 손이 절로 간답니다. 다음편이 궁금해서 댓글 다는데도 조바심이 나는군요. 어서 다음편으로- 2009-01-12
19:38:06
병장 이충권
대장장이가 간만에 열렸군요 끊긴줄 알았어요. 후훗
지팡이의 이름은 "브뤼슬리앙드" 잠에서 깨어날때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보호막이 되어주
는 좋은 무기.
나는 이것을 들고 어둠속에서 알 수 없는 적들과 싸운다. 2009-01-13
07:28:11
상병 차종기
"사람이란 건 감정에 크게 좌우되는 거야. 아무리 옳은 일을 머리로 수천, 수만번 생각해도 마음에서 감정이 일지 않으면 행동하기는 쉽지 않아. 옳지 않은 일이라도 감정이 충동질하면 쉽게 행하지."
아아 , 공감입니다. 역시나 라고 밖에 할 수 없네요. 기화님의 글 반갑습니다.~ 2009-01-13
09:27:15
병장 정영목
19째 줄에 마침표가 없는 구절이 있네요.
"지난 날을"
뒷 구절을 지운 흔적인 것 같네요.
역시 잘 읽었습니다. 2009-01-13
09:31:13
일병 송기화
으아, 부끄럽습니다. 수정했어요.
라기보단 사실 무슨 말이 쓰고싶었는지 기억이 안나서 그저 수습.
실수없도록하겠습니다. 2009-01-13
09:3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