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대장장이 2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8-12-31 11:30:18, 조회: 159, 추천:1
삐걱.
"계십니까?"
"그런 건 문 열기 전에 물어봐."
"계셨군요, 어르신. 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
대장간을 찾은 이는 여러모로 어색한 옷차림이었다. 오른쪽 어깨에 이상하게 달려있는 작은 손칼도 이상한 모양이지만 각 옷들이 서로 다른 문화의 것들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 내가 어디 갔겠어? 일단 앉아."
대장장이가 탁자에 앉으며 말했다. 거친 말투였지만 반가운 기색이 묻어났다.
"그나저나 여행자 네녀석이 여기는 왠일이야?"
"제가 뭐 못 올 곳을 왔습니까? 여행자가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여행자라는 남자는 대장장이와 퍽 친해보였다. 꽤나 오래 알고지낸 사이 같았다.
"네녀석이 여행자니까 이상한 거다. 이런 세상의 끄트머리에 뭐가 있다고 찾아오냐?"
"이곳이 어찌 세상의 끝입니까.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올 수 있는 세상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대장장이 어르신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꿈 한잔 안주십니까? 세상 곳곳을 돌아다녀도 꿈만한 것이 없더군요."
"흥, 쉬어터진 꿈밖에 없다. 요즘은 쓸만한 아이가 없어. 이거라도 마실테냐?"
대장장이가 동이에서 꿈을 한사발 퍼올렸다. 검고 시큼한 향이 풍기는 액체였다.
"허어. 이건 좀 심하군요. 어쨌건 그렇다면 제가 가져 온 것이 좋은 선물이 될 수 있겠네요."
말을 마치며 여행자는 가방을 열었다. 손수 만든 것인지 투박하면지만 여행자의 손에 딱 맞아 보였다.
"어디서 좋은 술이라도 가지고 온게냐?"
대장장이가 입맛을 다시며 여행자의 가방을 바라보았다.
"하, 그런 건 아닙니다만. 세상의 저쪽 먼 곳에서 발견했습니다."
여행자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천에 둘둘 말린 단검이었다. 날 가운데가 달 모양으로 비어있는 모습이었는데 여기저기가 많이 깨지고 상한 상태였다. 독특하게 날과 손잡이가 하나의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허어. 이건."
대장장이가 단검을 바라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르신께서 만든 단검일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 내가 만든 검이야."
"이 검은 어떤 사연으로 만들어진 것입니까?"
여행자가 대장간을 찾은 이유는 이 단검 때문이었다. 그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드물게 대장장이가 만든 검을 발견하면 그에게 돌려주곤 했다. 어차피 제 주인이 쓰지 않으면 아무리 대장장이가 만든 검이라도 힘을 발하지 못하기에 욕심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다.
"크흠. 이 녀석도 상당히 오래 된 녀석이야."
대장장이가 쉬어빠진 꿈을 들이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 이 칼을 만들어달라고 찾아온 녀석도 꽤나 먼 곳에서 왔었지. 어차피 이곳이야 찾으려고 마음 먹고 헤매다보면 언젠가는 도달하게 되는 곳이니까 찾아온 것 자체는 신기할 것 없지."
대장장이의 목소리에는 시간이 담겨있었다. 그의 말대로 오랜 역사를 가진 칼인 듯 싶었다.
"밤을 베어내고 싶다고 했어. 어둠을 걷어내고 싶다고 했었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여행자는 이렇게 대장장이가 만든 칼에 담긴 사연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한 아이의 아비였어. 딸아이가 언제부턴가 밤에 잠을 못 이룬다고 했어.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면서 밤이 무섭다고 우는 모습이 너무 딱해서 찾아왔다고 하더군. 어찌나 그 마음이 강했던지 이 곳까지 오는 데 이틀이 걸렸다고 하더구만. 자네가 여기까지 오는 데 4달이 걸렸다고 했지?"
"아비의 마음이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여행자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조금 전 그들의 대화에서처럼 이 대장간은 온 세상의 시작이자 동시에 끝이었다. 이곳을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찾을 수 있었다. 어디에서 출발하건, 어느 방향으로 떠나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간절한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는 도달하게 되는 곳이었다.
"그 자는 그 자리에 앉아 울면서 이야기를 했지. 엉뚱한 소리인 것은 알지만 밤을 베어낼 수 있는 칼을 만들어 줄 수 있냐고. 밤을 베어버릴 생각을 하다니 참 엉뚱한 이가 아니냐? 하하하!"
"불을 밝힐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건 아닐 텐데요."
"그는 딸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거다. 불빛으로 어둠을 밀어내어 불이 꺼질까 걱정하며 날이 밝을때까지 버티는 모습이 아니라 당당하게 어둠을 베어 없애버리고 싶었던 거지. 괜찮은 마음이었다. 마음의 빛이 꽤나 영롱했으니."
"그것으로 만든 칼이었군요."
"그래. 이가 빠지고 날이 상한 걸 보니 자기 역할을 톡톡히 해낸 모양이지. 제 주인이 원한 바를 이루어 주었으니 좋은 칼이다."
"재미있는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그러면 전 이제 가보겠습니다."
"허허. 벌써 가는가?"
대장장이가 아쉬운듯이 말했다.
"떠돌이 여행자가 한곳에 진득하니 붙어있을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래, 이번엔 또 어디로 갈텐가?"
"어디든 좋지 않겠습니까. 시시때때로 변해가고 있는 세상이니 갔던 곳이라고 해도 익숙하긴 커녕 낯설기만 합니다. 변하지 않는 곳은 이 대장간 뿐이군요."
"그래, 가보게나. 이봐, 지팡이. 주인을 잘 인도하라고."
여행자의 어깨에 매어져있는 손칼이 잠깐 빛을 내었다.
"그래, 그래. 넌 최선을 다하고 있단다. 하하하!"
대장장이가 대견하다는 듯이 칼에게 말을 건내었다.
쾅.
대장간의 문이 닫혔다. 여행자는 지팡이라는 이름을 가진 칼을 꺼내 허공을 저었다. 온 세상을 제 눈으로 바라보고 알고싶다는 꿈을 가졌던 남자가 갖게 된 칼은 공간을 잘라내고 밀어내는 능력을 가졌다. 현실과 허공의 틈새에서 추위도 더위도 모르고 낮도 밤도 없이 걸을 수 있게 해주는 든든한 지팡이였다. 여행자는 또 새로운 세상을 눈에 담으려 걸음을 내딛었다.
대장장이는 탁자위에 놓인 단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허허. 네가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구나. 네 주인과 지낸 날은 즐거웠느냐?"
단검이 희미하게 빛을 내뿜었다.
"그래, 넌 네 역할을 다 해내었다. 그럼 이제 꿈으로 돌아가렴."
대장장이가 단검을 집어 동이 안에 넣었다. 잠시 빛이 번쩍이고 흑빛의 액체는 백색 빛으로 변해있었다. 대장장이는 꿈을 사발에 담아 들이켰다.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맛이 일품이구나."
대장장이가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덧. 게시판이 나뉘고 나서는 한 쪽에 한 개씩 글 올리려면 꽤 기다려야 겠더라구요. 그래서 포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여러분.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01:41
상병 김예찬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008-12-31
13:11:05
병장 이충권
음? 연재인가요옷? 3편도?
탁자위에 놓인 단검 그 이름은..천재지변검.
착용효과 : 한번 찔르면 찔린사람은 온몸이 하늘과 땅이 뒤틀린 것처럼 내장파열을 일으킴. 2008-12-31
13:17:04
병장 정영목
굿굿. 천일야화 같은 느낌이 나는군요. 2009-01-02
13:41:14
상병 차종기
내 꿈은 어떤 맛일까, 꼴깍, 2009-01-02
13:47:17
일병 송기화
예찬님/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충권님/ 음? 배탈이 나는 거군요!
영목님/ 어익후. 이런 칭찬을(안절부절)
종기님/ 시원한목넘김(응?) 2009-01-02
16:42:54
병장 김민규
시원한 목넘김, 낄낄낄낄 2009-01-02
16:44:28
병장 김민규
역시 단단한걸 때릴 때는 다마스커스가(퍽퍽) 2009-01-02
16:46:54
병장 이동석
아아,
사랑합니다. 기화님. 정말 이 말밖에 할수 없어요.
기화님 글 못보는게 아쉬워서 집에 가는게 1그램쯤 아쉽답니다. 2009-01-04
18: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