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다양성의 다양성에 대한 폭력  
상병 김소망   2009-07-07 083353, 조회 110, 추천0 

1. 다양성과 주체의식의 관계
  사회 민주화의 척도를 따지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다양성에 대한 사회구성원의 인식수준이다. 왜냐하면 다양성은 인간 사회를 풍족하게 하는 원천이며 동시에 사회적 존재의 주체성 실현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의 요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나는 나'라는 인식을 갖게 될 때 스스로를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기 시작하며 이를 자기 실현의 시발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나가 아닌 또 다른 나의 존재에 대한 설정을 필요로 한다. 즉 '나'가 나를 관찰자의 입장에서 대자적(對自的)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흔히 말해 자신을 대상화하여 반성적으로 관조할 때), 거기서부터 자기 주체성 확립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아닌­나'(주 1)의 관계설정을 통한 자기인식은 '나'를 타자화 시키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는데, '나'를 타자화 시키는 과정은 궁극적으로 '너'라는 타자와의 관계에 입각하여 진행된다. 즉 '너', '그', '그녀'라는 말로 표현되는 타자의 존재에 대한 인식과 그로부터 나오는 타자성에 대한 관념이 있기 때문에 나를 나와 '아닌­나'(타자화된 나)로 인식하여 주체성 확립의 시금석을 놓을 수 있는 것이다.(주 2) 그런데 '너', '그', '그녀'의 타자성에 대한 인식은 '나'와 '너', '그', '그녀'의 다름을 인정하는 단계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나'와 '너', '그', '그녀'의 존재의 다름을 하나의 특성으로 간주할 때, 우리는 그 특성을 '다양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나와 타자의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직결되는 것이다. 즉 타자와 나의 관계를 통해 나는 나의 주체를 형성해 가고, 타자와 나의 관계는 타자를 나와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의 주체의식 형성의 출발은 '다양성'의 인정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2. '다양성'과 밑도 끝도 없는 상대주의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尺度)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통해 그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철학 비전공자에게 이 발언에서의 인간은 '인류'로 해석된다. '인간'을 개체로서의 인간이 아닌, 범주로서의 인간으로 이해하여 이를 '인본주의의 발로'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해는 잘못된 것으로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은 철저히 '개체적'인 것이었다. 즉 세계의 모든 개개인이 만물의 척도라는 것이다. 개개인의 다름에 대한 인식과 다양성의 인정에 바탕을 둔 이 발언은 개개인의 감관(感官)에서 오는 세계인식을 중시하는, 그렇게 함으로써 인식의 상대성에 무게를 두는 소피스트들의 철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적 인식은 프로타고라스의 의도와는 달리 밑도 끝도 없는 상대주의, 즉 지적 허무주의로 흘러가면서 학문의 특성을 학문 그 자체의 목적성이 아닌, 권력지향성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는 소크라테스 시대에 절정에 달하여 수사학, 변론술, 웅변술 등 출세에 도움이 되는 2차적 학문만이 집중적으로 연구되는 편향성을 보였다. 당시의 아테네는 겉으로는 웅변가와 사상가의 시대로 발전된 학술문화를 자랑하는 듯 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지적 갈급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에 의해 철저히 비판받았으며 그에 의해 소피스트 전체가 '궤변론자'로 분류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1.에서 살펴보았듯 다양성 인식은 주체의식 형성의 시작점이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의 다양성 인식은 오히려 지적 허무주의를 탄생시켰다. 지적 허무주의는 개인적 안심입명(安心立命)주의로 흘러가면서 출세주의에 빠진 인간의 비본래적인 모습을 탄생시켰다. 이와 같은 예에서 볼 수 있듯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왜곡될 경우 그것은 오히려 대자적인 자아의 설정을 통한 자기성찰과 이를 통한 주체형성을 방해함으로써 인간의 자아실현을 저해하는 양상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다양성 인식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탐구의지와 자아에 대한 관심을 방해하는 비본래적 다양성 인식이다.

3. '다양성'의 다양성에 대한 폭력­비본래적 다양성 인식
  1.에서 논한 것처럼 타자와 나의 다름을 인정함을 통해 다양성을 받아들인 자아는 '너', '그', '그녀'들을 '다른 사람', 즉 타자로 인정하기 시작함으로써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와 타자의 관계에 입각하여 나를 인식할 또 다른 나―대자적 자아를 설정하여 '나는 나'라는 인식 하에 주체의식을 형성한다. 그리고 주체의식을 형성한 '나', '너', '그', 그녀'들은 자신의 주체성을 바탕으로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이 인식한 다양성이라는 단어에 걸맞게 그들의 세계 인식도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나', '너', '그', '그녀'―다시말해 '우리'들은 자신들의 세계관과 인식의 방법론을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나누게 되는데, 우리 사는 세계의 담론은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눔을 통해 우리는 또 한 번 서로의 다양성을 인식하게 되며 그것은 다시 자아 실현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타자와의 나눔은 또 한 번 나의 세계관과 인식의 방법론을 발전시킬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2.의 경우에서와 같이 우리는 종종 다양성 인식이 도리어 주체형성을 방해하는 모습을 본다. 이 글의 제목 '다양성의 다양성에 대한 폭력(혹은 억압)'은 바로 이 같은 비본래적 다양성 인식이 주체와 주체 사이의 나눔에 등장할 때 시작된다.(주 3) 앞서 보았듯이 비본래적 다양성 인식은 밑도 끝도 없는 상대주의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지적 허무주의로 귀결된다. 이러한 지적 허무주의는 자아실현의 중요한 원동력인 주체와 주체 사이의 나눔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측면에 있어서 주체의 자기실현을 방해하는 것이며 동시에 나눔을 통한 또 다른 다양성의 인식을 억압한다는 측면에서 억압적이기도 하다. 지적 허무주의는 나눔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려는 주체들의 창의성을 박탈하고, 나눔의 장을 파괴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매우 폭력적인 것이다. 비본래적 다양성 인식은 다양성을 창의와 자아실현의 도구가 아닌 지적 허무주의의 핑계로 만든다는 점에 있어서 비본래적이다. 예컨대 각각의 토론자들이 인간의 본성을 논하는 자리에서 서로의 의견을 토해내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어차피 이건 느끼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 아닌가'라고 말하는 순간 그 논의는 결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 '느끼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 아닌가'라는 말은 매우 당연한 다양성의 진리이다. 그러나 그러한 발언은 '느끼는 사람에 다라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우리가 이 자리에서 이를 논할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피곤한 논쟁은 집어치워라'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4. 다양성을 다루는 우리의 태도­'다양성'이 아닌 다앙성에의 주목
  너와 나의 다름을 인식하는 것, 즉 다양성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은 주체 형성의 첫걸음이며 동시에 자아실현의 첫걸음이다. 그리고 개인이 자신의 확고한 주체를 갖고 그 주체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이 추구하는 자유이며 민주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다양성에 대한 인식 정도가 사회 민주화의 중요한 척도라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양성은 이중적이다. 다양성은 비본래적 형태로 우리의 자아실현을 방해하기도 한다. 다양성이 비본래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다양성의 언어적 의미(다양한 특성)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그 자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다양성이 '다양성'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다양성의 외연만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다양성이 언어적으로 인식되는 순간 그것은 단순히 언어적인 의미만을 지닐 뿐 실질적 다양성을 구현하는 도구가 되지 못한다.(주 4) 오히려 그것은 지적 허무주의의 핑계거리를 만들어줄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소통에 있어 가장 강한 도구임과 동시에 최대의 약한 고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주 5)
  우리는 다양성 그 자체에 주목함으로써 다양성의 본래적 성질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을 자아실현의 도구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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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나와 아닌-나의 개념은 김상봉이 서구의 홀로주체성 개념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서로주체성 개념을 설명하면서 만든 개념이다. 이 글에서는 김상봉의 서로주체성 개념에 입각하여 주체성 형성의 과정을 논할 것이다.

(주 2) 여기까지의 설명, 즉 우리가 있기에 나가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김상봉의 서로주체성 개념이다.

(주 3) 억압은 주체와 주체 사이에의 교류, 즉 나눔을 통해 등장한다. 결코 그것은 사회와 외따로 떨어진 인간에게는 나타날 수 없는 현상으로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나눔을 통해 등장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스스로에 대한 억압--예컨대 강박증과 같은 것--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철학과 사회학의 영역에서보다는 심리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고, 필자에게 이를 다룰 능력 또한 없으므로 굳이 논하지 않는다.

(주 4) 노자의 말,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의 의미를 잘 되새겨 보자.

(주 5) 우리가 다양성이라고 입으로 내뱉거나 글로 써내는 경우 그것은 다양성의 본래적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의도일 수도 있고 동시에 다양성을 핑계로 지적허무주의를 강조하려는 사악한 의도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본래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언어로 표현되는 대상 그 자체이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7-20
084112 

 

병장 김범수 
  내가 한국 사회를 싫어하는 이유가 다양성이 참 부족하다는 거에요. 

한국에선 나와 다른 것들은 모두 적이다(배척하자). 이런 분위기 거든요. 
나와 다른 존재를 인정이나 존중은 커녕 배척하죠. 주류의 횡포라고 해야하나, 
한국에선 비주류는 참 살아가기 힘든 곳이네요.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 (꽤나 많은 나라들이 있네요)는 나와 다른 부류를 좋아하거나 
따르지는 않아도, 항상 존중 하거든요(피해만 끼치지 않는 다면). 근데 한국은 
특히 이 곳은 더욱 그렇지 않네요. 그냥 나와 다르면 모조리 죽여라, 라는 
쇼가나이,,, 2009-07-07
084940
  

 

병장 양동훈 
  아악. 일단 프린트 할게요. 2009-07-07
101749
  

 

상병 김예찬 
  주5번이 인상적입니다. 다원주의를 강조하는 입장이 은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지요. 2009-07-07
162216
  

 

병장 김형태 
  다양성이란 절대 한마디로 마무리 지을 수 없는, 말하고서도 뭔가 가슴속이 찝찝한 그야말로 다양성이 부족한 느낌. 2009-07-08
082707
  

 

상병 김태완 
  가지로- 2009-07-09
100625
  

 

상병 윤현상 
  아- 요새 제가 처해있는 아노미상태를 완벽하게 설명해주는 글인 것 같아요. 다양성을 인정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그러다 보니 정작 내 자신은 어디로 가야할 지 방향성을 잃었다고나 할까요. 다양성의 무제한적인 확장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되어있는지를 구분하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요새, 저는. 

그렇지만 다양성 그 자체에 주목하라는 것도 여전히 어렵기는 매한가지에요. 다양성 그 자체가 무엇인지도 파악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철학자가 아닌 저로서는 다양성의 의미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지니는 현실성과 행동성, 변화에의 조건으로써 더 중요하게 기능하기 때문이기도 해요. 으음. 어렵군요. 2009-07-11
070638
  

 

상병 윤현상 
  참, 하나 빼먹었군요. 가지로- 2009-07-11
070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