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나의 하루를 팝니다.
병장 김무준 2009-05-01 08:03:51, 조회: 287, 추천:0
1.
비가 내렸다. 사월의 끄트머리에서 비는 힘없이 늘어졌다. 어둠이 가득 찬 거리에 부슬비가 흩날렸다. 가로등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흔들거렸고 곧게 뻗은 건물 사이로 고요가 비집고 들어왔다. 노란 불빛이 스치는 시멘트벽은 회색빛으로 젖었다. 바람이 외롭게 슬픔을 실어 날랐다. 조용했다. 도시는 침묵 그 자체였다.
노란 불빛 아래로 그림자가 깜빡깜빡 적막을 사르며 걸어갔다. 텅 빈 도시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곤 가로등의 불빛과 그림자 밖에 없었다. 그림자는 긴 머리카락을 흔들어댔다. 우우웅. 정적을 깨고 그림자로부터 묵직한 진동음이 새어나왔다. 여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우우웅. 전화는 계속해서 몸을 흔들었다. 여자는 전화를 들었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여자는 또 라고 짧게 중얼거렸다.
여보세요. 예, 안녕하세요. 인터넷 보고 전화 드렸습니다. 그러신가요. 내일 쯤 시간이 될까요?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토요일입니다. 그럼 괜찮겠네요. 오전 아홉시부터 오후 아홉시까지 가능하신지……? 예, 괜찮아요. 열두 시간에 팔만 원 가능할까요. 그건 좀 적지 않나 싶은데요? 죄송합니다. 대신 모든 금액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여자는 잠깐 답을 하지 않았다. 가로등이 꺼졌다. 어스름한 달빛만이 거리에 물들었다. 멈추었던 걸음을 옮기며 여자는 거래를 마무리 지었다. 일당이 적기는 하지만 요즘은 일거리가 없으니까. 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기분 전환이라 여기자.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빠르게 불 꺼진 거리를 거닐었다.
2.
서면 지하철 백화점 앞 분수대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남자는 오전 일곱시 이십일분에 문자를 보내왔다. 어떤 옷을 입고 있겠다는 설명도, 어떻게 꾸미고 와 달라는 요구도 없었다. 문자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명료했으며 예의가 있었다. 여자는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며 쟈스민 향이 나는 샴푸로 머리를 감았다. 같은 향의 비누로 몸을 씻었다. 옅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곱게 빗었다. 검은색 물결무늬의 하늘거리는 스커트를 입고 흰색 와이셔츠에 회색 카디건을 걸쳤다. 고동색 가죽 가방을 등에 매고 베르사체 향수를 뿌렸다. 은은하게 쟈스민 향기가 흘렀다.
여자는 미인이었다. 지하철을 타거나 역 안을 돌아다닐 때면 으레 남자들의 시선이 고정되곤 했다. 여자는 그런 남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부터 일을 하러갈 뿐이었다. 남자들에게 관심을 끌거나 적당한 수컷을 사냥해보려 치장을 한 게 아니었다. 분수대가 눈에 들어왔고 여자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도착했어요. 어떤 옷을 입고 계시죠?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입니다. 그렇게 입은 사람이 너무 많네요. 이브 생 로랑 티셔츠를 입고 있습니다. 아 보이네요.
남자는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남이었다. 보수는 정확히 오후 아홉시에 주겠다며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묻는 말에만 대답할 것. 둘째, 그 외에는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것. 셋째, 자신에게서 오 미터이상 떨어지지 말 것. 여자는 마지막 조건을 들으며, 보일 듯 말 듯 잠깐 미간을 좁혔다. 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무얼까.
3.
여자는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여자에게서 일 미터쯤 떨어져서 걸었다. 여자에게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지 따위는 설명하지 않았다. 남자는 지하철을 탔고 여자는 뒤를 따랐다. 시청, 온천장을 지나 부산대 역에 다다랐을 때 남자는 지하철에서 내렸다. 여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지하철역을 벗어나 넘치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 나갔다. 남자는 길 한가운데 우두커니 멈춰 섰다. 그리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선남선녀가 길 한가운데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자, 곁을 지나는 사람들이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십분쯤 지나자 모두가 그렇듯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두 사람을 지나쳤다. 남자는 한 시간이 다되어가도록 그렇게 서있었다. 여자는 계속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하지 말라는 조건은 있었지만 한숨 쉬지 말라는 조건은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자 남자는 지하철역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지겹습니까? 좀 그렇네요. 나름 그래도 이 일을 하면서 프라이드는 갖고 있는데. 무슨 말이죠? 데이트로 돈을 버니까, 데이트를 하면서 최대한 상대가 즐거울 수 있도록 배려하거든요. 저는 즐겁습니다만. 말 뒤에 당신은 어떤가요? 라고 물었다고 생각하고 답할게요. 별로 썩 좋지는 않아요. 이럴 시간에 집에 있었다면 푹 자기라도 할 텐데. 이건 보통사람들의 데이트 방식은 아니니까요.
남자는 씩 웃고는 더 이상 묻질 않았다. 여자도 답하지 않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하얗게 깔렸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월 말. 대학가는 파랗게 싹트는 청춘으로 넘쳐났다. 거리에는 형형색색의 싹들이 자라있었고 드문드문 커다란 나무들도 보였다. 나무들은 대나무처럼 하늘로 뻗어있기도, 늙은 소나무처럼 뒤틀려 자라있기도, 담쟁이 덩굴마냥 줄기를 배배 꼬아있기도 했다. 여자는 눈을 비볐다. 숲이 보였다. 부대 앞 골목골목에 오색의 숲과 들이 펼쳐졌다.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열한시 삼십칠분까지 우두커니 서있다 걸음을 옮겼고, 여자의 눈앞에 펼쳐진 숲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남자는 여자에게서 오십 센티쯤 떨어져서 걸었다.
4.
남자는 여자를 데리고 다시 서면으로 돌아왔다. 근사한 데이트가 이어졌다.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와 함께 서너 가지의 와인을 마셨다. 남자는 허영심 많은 사람들처럼 지겨운 와인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았지만, 테이블에서 상대를 배려할 줄 알았고 철저하게 매너를 지켰다. 음식을 주문할 때를 제외하면 단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으나 여자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식사 후에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남자는 여자가 진짜 자신의 애인인 것처럼 마놀로 블라닉의 구두를 신기고, 프라다의 원피스를 입혀보고, 까르띠에의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고, 안나 수이의 향수를 사주었다. 남자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썼다. 또한 여자의 마음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토록 바래왔던 구찌의 핸드백을 사줄 때는 잠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쇼핑이 끝나고 남자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람보르기니 한 대가 도착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집 주소를 물었고 람보르기니의 운전자에게 짐을 가져다놓으라 명령했다. 여자는 당신의 정체가 무어냐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다시 두 사람은 지하철을 탔다. 이호선 해운대역에 도착하자마자 남자는 달렸다. 여자는 영문도 모른 채 남자를 i았다. 지하철역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남자를 놓치고야 말았다. 여자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체 어디 가는 거예요. 택시라도 붙잡고 해수욕장 입구에서 내리시길 바랍니다. 알았어요. 잠시만요. 택시 탔어요. 왜 그렇게 뛰어간 거죠? 조건을 잊었습니까. 질문하지 말 것.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남자는 여자의 손을 낚아챘다. 남자는 화단으로 여자를 이끌었다. 남자는 대리석으로 장식된 화단에 걸터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멍하니 서있었다. 길게 수평선이 어지럽게 늘어졌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에 태양이 떨어져 붉게 타올랐다. 무섭도록 아름다운 석양이 바다를 적셨다. 뉘엿뉘엿 태양은 수평선 너머로 몸을 숨겼고 바다는 다시 파랗게 가라앉았다.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5.
남자는 편의점에 들러 삼각 김밥 몇 개와 음료수 두 개를 샀다. 백사장에 앉아 두 사람은 저녁을 해결했다. 남자는 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거의 말하질 않았다. 오후 여덟시 삼십오분이 되어서야 당신은 세 가지 조건 모두를 어겼노라고 말했다. 여자는 할 말이 없었다. 보수를 줄 수 없다 말했을 때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여덟시 오십칠분이 되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즐거우셨습니까. 네. 색다른 경험이기도 했고요. 저는 이제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뵐 수 있을까요? 아직 아홉 시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남자는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망설임 없이 바다로 걸었다. 신발과 바지가 물에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는 깊이, 점점 더 깊이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여자가 뒤늦게 남자의 뒤를 따라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남자의 몸은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고 말았다. 바닷물에 잠긴 손끝에 남자의 티셔츠가 닿았다. 남은 것이라고는 셔츠 뿐이었다.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6.
여자는 집으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열리고, 내리고, 문 앞에 섰다.
문 앞에는 구찌마크가 커다랗게 반짝이는 핸드백 하나와, 한 낮의 나무처럼 옻칠이 되어있는 이젤 하나가 놓여있었다.
어제 죽은 첫사랑의 사진과 함께.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23:49
병장 김형태
람보르기니와 삼각김밥이라. 으음. 2009-05-01
08:09:58
병장 김상윤
잘 이해가 가지 않아요 .
일단, 여자가 남자를 첫사랑으로 사랑하게 된거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남자는 왜 자살한 거죠.
음. 죽은사람과 닮아서 마지막으로 하루를 보내고 자살한 건가요? .. 2009-05-01
09:41:23
상병 한영빈
저도 잘 이해가... 2009-05-01
13:18:50
병장 김무준
지나치게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시는 군요. 쩝. 앞에 숲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만- 2009-05-01
13:33:17
상병 정근영
이거 뭔가 굉장히 느낌이 좋기는 한데 약간의 의아함이 남기는 하는군요, 으음
람보르기니 운전자는 왜 시키지도 않은 사진을 갖다 놓았는지. 아니, 그 남자가 이미 말해둔 것일까요.
그래도, 돈을 받고 데이트를 하는 행위에 대한 일반적 편견을 날려버리는 글이군요. '천일야화'라든지 '리얼스토리 묘'에서 봤을 때는 너무 그릇되고 퇴폐적인 욕망만을 부각시키는 듯 했는데, 백분의 하나 정도는 위와 같은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얼굴도 모르는 낯선 사람과의 만남은, 때때로 자신도 모르는 깊숙한 내면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기도 하니까요. 2009-05-01
13:33:45
일병 오효섭
흐음,.
잘읽었습니다.
'나의 하루를 팝니다.' ,. 2009-05-01
14:01:57
병장 김무준
깽깽이의 이야기는 대부분 타인의 상상을 존중한다는 데 중점을 두고, 열심히 고민을 해 보시길. 물론 깽깽이가 생각해놓은 이야기는 있지만, 텍스트 읽기의 즐거움은 다양한 사고를 하는데에 있고- 깽깽이는 타인의 의견을 보며 낄낄거리는 변태라는 것.
생략하기는 단점일수도, 장점일수도 있지만 장점이라 주장하렵니다. 하암. 2009-05-01
14:03:06
상병 윤영석
첫사랑으로 죽은 남자가 일하는 남자에게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면서 죽지않았을까요.
여자가 대행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을 알고..
아닌가...(삐질) 2009-05-01
14:47:12
상병 김태완
환상. 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꿈에서 깨는 장면이 없었기 때문에 환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모든것은 환상이었다.
알 수 없는 전화번호가 찍힌 전화가 온 것부터 환상은 시작된다.
첫사랑은 여자가 보는 앞에서 바다에 빠져 죽었다.
'또'라는 표현을 통해 여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해 자주 남자가 돌아온 듯한 환상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상은 전화가 온 순간부터 계속 이어진다.
지하철을 타고, 예전 좋았던 추억들이 실세계와 오버랩된다.
지하철 여행, 쇼핑 후 만난 람보르기니와 운전기사를 본 것, 해수욕장의 수평선 모두 한번씩 겪었던 일들이다.
여자는 추억이 있는 장소를 혼자가 아닌 홀로 다닌다.
그녀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남자 즉, 첫사랑의 환상과 함께 예전에 했던 데이트를 반복해서 한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집에 들어온 여자는 오버랩 되어 있던 추억에서 벗어나자 그가 사준 구찌 핸드백을 털석 떨어뜨리고 주저앉아 한없이 운다.
그녀의 맘을 아는 지 모르는지 이젤에 걸린 첫사랑은 그저 웃고만 있다.
(제 나름의 해석이니 뒤에 내용의 덧붙임 정도는 눈감아 주시길) 2009-05-01
18:46:16
병장 김무준
오오! 2009-05-02
02:40:16
상병 조민석
오우.... 2009-05-02
18:13:55
일병 이선목
김태완님 해석대로 글을 다시보니 새로운 글을 보는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