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나에게 보내는 편지  
병장 김무준   2009-02-12 00:30:37, 조회: 178, 추천:0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고 청아한 선비가 되었으면 되었지, 고아한 귀족 나부랭이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지만 별로 와 닿지는 않는 군요. 나는 내가 스스로를 귀족으로 보이게끔 행동했다는 것 자체가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지금, 파시스트 또는 브루주아가 되고 싶지 않아 조심 또 조심 했음에도 노력 자체들이 헛되이 느껴집니다.

언제나 내가 옳은 것이 아니며, 내 방식은 다듬어지지 않은 소수자의 모습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늘 차이를 인지하고 갭을 인정하는 일은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썩 기분 좋은 일도 아니고요.

방구석에 틀어박히던 나쁜 습관이 도질까 염려하면서, 날로 더해가는 자기혐오를 꾹꾹 누르며 끝없는 인내심으로 나를 깎고 또 깎고 있지마는. 타인과 나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며 이해의 방법으로 텍스트가 이용될 수 없다면 과연 무엇으로, 어떠한 언어로 타인과 대화해야 하는지 묻고 또 묻습니다. 지나간 지식의 장을 펼쳐 과거와 기억과 이성을 만나 그 해법을 찾으려 애쓰지만 답이 보이질 않습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배워온 것인가. 책을 통해 만났던 과학자, 철학자, 소설가와 시인, 수필가, 지식인 그리고 음악, 영화, 사진, 그림 등 모든 것들로부터 습득한 것들이 단지 이상에서 비롯한 것들이었다는 슬픔에 빠져 하루를 또 괴로움으로 보냅니다.

당당한 기품이 서려있는 귀족이 되기보다, 불어오는 바람에 수염을 쓰다듬으며 시 한수를 읊는 선비가 되고 싶었습니다. 세상만사 허투루 받아들이며 홀로 유유자적 살아가는 나그네의 모습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타인이 보는 나와 조우한 순간 내 앞에 선 존재는, 텍스트로 지어진 성에 화려한 옷을 입고 현실을 조롱하는 귀족이자 광대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보이고자 손가락을 놀린 것도 주둥이를 놀려댄 것도 아니거늘 이 빌어먹을 현실에서 턱도 없는 착각에 빠졌던 나 자신이 부끄럽고 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구토를 애써 참으며 현실과 마주합니다. 비릿한 입맛에 쓴 물을 삼키고 현실을 수용합니다. 텍스트라는 폭력을 행사해 온 것은 아니었던가를 묻습니다. 내가 그토록 혐염하던 죽창을 든 시위대와 대체 무엇이 달랐는지 질문합니다. 나는 지식인이었던가, 괴수였던가, 무엇이었나를 고민합니다. 나는 나 자신이고 싶었고 내가 되고자 했던 자태를 갖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헛되이 느껴지는 지금 다시 책을 들어야하나 손가락을 놀려야 하나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물음이 내 안에 있듯 답 역시 내 안에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는 답들은 항상 불규칙적으로 자아에게 돌아옵니다. 계기가 순간이든 흐름이든 어떤 형태를 띠고 있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나는 몇 번이나 무너져 내리고 녹아내립니다. 나를 다시 창조해야하는지 그럼 소멸을 반복하는 내 자신을 이제 무엇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난해한 물음만이 허공을 맴돌고 차가운 밤은 깊어만 갑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18:06 

 

병장 주민호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 
언젠간 타협점을 찾게 되겠죠. 
성장한다는 것은, 
무수히 많은 내안의 또다른 '나'들을 하나씩 죽여가는 겁니다. 2009-02-12
05:19:10
  

 

상병 김요셉 
  [발췌언] 
머리가 더 이상 몸체에 의해 코드화되지 않을 때, 머리가 더 이상 다차원적이고 다성적인 몸체적 코드를 지니지 않을 때, 요컨대 머리를 포함하여 몸체가 탈코드화되고 <얼굴>이라 불리는 어떤 것에 의해 덧코드화 되어야만 할 때 얼굴이 생산된다 
(......) 
그러나 얼굴은, 이제 더 느리긴 하지만 한층 더 강렬한 탈영토화를 표상한다. 그것은 더 이상 상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을 동물뿐 아니라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지층으로부터 머리를 빠져나오게 해서, 그것을 의미생성이나 주체화의 지층 같은 다른 지층들에 연결접속시키기 때문이다. 
(......) 
또한 때때로 어떤 상황에서, 시도가 거듭 실패하더라도 기사는 검은 구멍을 가로지르고 흰 벽을 꿰뚫고 얼굴을 망가뜨리며 언제나 더 멀리 운동을 밀어붙일 수 있지 않을까? 
- 들뢰즈 / 가타리, '0년-얼굴성', <천 개의 고원> 2009-02-12
08:43:06
  

 

병장 김용준 
  삶의 순환되는 고통과 인내의 시간은 어김없이 저희를 방문합니다. 그러함에 저희는 '살고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아닐까요? 무준씨도 말했듯이 이미 답은 나왔으니 무준씨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시간인 것 같습니다... 

Ps. 자연과 술을 벗 삼아 시를 섦 선비를 꿈꾸는 1人으로써 무준씨의 글이 와닿습니다. 
'자기혐오감'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칼럼] 장르소설의 정형화  
병장 김무준   2009-02-23 13:42:59, 조회: 361, 추천:0 

이 텍스트는 책가지에 있는 <장르소설의 역사>, <장르소설의 한계와 극복>에 이어지는 텍스트 입니다. 텍스트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 일부를 위의 텍스트에서 차용해 온 것임을 말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책방에서는 비슷한 소설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부터 대여점을 기반으로 하는 출판시장이 성장을 거듭했다. 비디오와 책 모두 대여점이 주 시장이라 한다면, 비디오시장은 영화나 드라마 시장의 2차 시장이기에 개봉작 추세에 따를 수밖에 없었으나, 비디오와 달리 책은 유행을 타지 않는 품목이었다. 독자층은 출판시기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고 소수의 매니아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독자는 재미나 시간 때우기를 목적으로 대여점에서 장르소설을 소비하기 시작했다.

모든 대중문화가 마찬가지지만 대중문화는 상업성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연관관계에 있다. 돈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이는 장르소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순문학이 예술적 가치와 사회를 반영하는 의식이 포함되어야 한다면 장르소설은 시장에 진입해 꾸준히 소비될 수 있는 무기를 가져야 한다. 장르소설의 무기는 흥미다. 장르소설은 성장과정에서 재미를 극도로 추구하는 형태로 발전했고, 2세대에 접어들며 그 문제가 급격히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장르소설에 대한 대중의 호오는 분명히 갈린다. 그 따위 것들이 소설이냐 돈이 아까워서 볼 가치조차 없다는 부류와, 그래도 장르소설을 싸잡아 매도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니 좀 더 이해가 필요하다는 부류로 나뉜다. 지나친 이분법적 논리일지는 모르나 사회가 판단하는 장르소설 현재는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 듯하다. 전자는 초기 무협을 접한 기성세대와 현재의 장르소설을 접한 우리세대 중 보수적이며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이들이다. 후자는 매니아층을 필두로 하는 이들로 장르소설과 그 성장을 함께한 집단이다. 그렇다면 전자의 의견이 맞을까, 후자의 의견이 바람직할까. 후자의 의견대로 장르소설을 매도하는 것은 사과 상자의 썩은 사과를 보고 ‘상자 속 사과는 모두 썩어있다’고 판단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까?

답이 무엇이건 간에 현실은 참담하다. 장르소설이라는 사과박스 안의 모든 사과가 썩어있다고 할 순 없어도, 절반이 넘는 사과들이 썩어있는 것이 현재의 장르소설 출판시장이다. 시장은 이십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집단의 주장 ‘판타지가 어딜 봐서 소설이냐?’, ‘문학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쓰레기’ 따위의 발언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텍스트를 작성하는 글쟁이가 장르소설을 지지하는 집단에 속해 있으나 이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므로 인정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럼 장르소설시장이 쓰레기장으로 변한 이유는 무엇이며,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에 대한 물음을 갖기 전에 시장의 실태를 확인해보면 시장을 장악하는 주류의 ‘장르’가 판타지와 무협임을 알 수 있다. 시장에는 게임, 퓨전 등 다양한 장르가 존재하고 있지만 게임과 퓨전의 경우 형태만 바뀐 판타지와 무협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시장 점유율을 놓고 해석하면 절반 이상이 판타지와 무협이다. 장르소설시장이 판타지와 무협에 의해 점거된 까닭은 환상문학의 장르적 특성을 통해 풀이가 가능하다.

SF는 과학적 사상을 통해 창작되어야 하기에 기본적으로 텍스트를 생산하는 글쟁이는 과학에 대한 전반적인 기초지식을 갖추어야한다. 진입장벽이 높다는 문제로 한국 SF시장은 크게 발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퇴마도 비슷한데, 무속신앙이나 종교는 과학만큼 다양하고도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소재다. 퇴마는 이우혁과 문성실 이후로 2세대에 이르러 대가 끊기고 말았다. 추리는 지적유희를 목적으로 하기에 이야기의 구조가 탄탄해야하며 문장이나 표현이 독자의 집중력을 끌어내야 하기에 글쟁이는 높은 수준의 문장력을 갖추어야 한다. 역사나 전쟁의 경우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 장르소설에서 주류를 차지하지 못한 장르들은 모두 여러 가지 이유로 글쟁이들의 진입장벽이 높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와 달리 진입장벽이 굉장히 낮은 판타지와 무협, 이 두 장르가 시장을 점령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주류 시장을 형성하는 판타지와 무협은 웹이 등장함과 동시에 텍스트의 엄청난 질적 하락을 겪는다. 익명성을 바탕으로 누구나 손쉽게 텍스트를 생산으로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으므로, PC통신의 장르소설이 지니고 있던 한계인 ‘접근성’과 ‘대량생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웹에서의 장르소설은 게시될 수 있는 공간이 무궁무진했고 그만큼 텍스트의 표출이 용이해졌다. PC통신 게시물의 조회 수가 일만 건 정도였다면 최근 소위 말하는 대박텍스트의 조회 수는 백만 건을 넘나든다. 재미있는 텍스트는 입소문을 타고 급격히 소비됐다.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어있더라는 소리는 현실이 되었다. 삼룡넷에 연재되던 비뢰도의 작가는 비뢰도 하나로 순식간에 명예와 부를 거머쥐었다. 재미있는 텍스트를 생산하기만 하면 노다지를 캘 수 있는 신종 금광이 탄생한 것이다. 이와 함께 낮아진 진입장벽을 넘어 다수의 독자들이 노다지를 꿈꾸며 텍스트의 생산에 뛰어든다.

앨빈 토플러가 <부의 미래>를 통해 예견했듯 위와 같은 변화는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소비와 생산을 함께하는 프로슈머들이 증가하며 출판시장은 제 2의 변화를 맞는다. 낮아진 진입장벽으로 유입된 새로운 글쟁이들은 빠르고 간단하게 텍스트를 생산했고 텍스트의 전체적인 질적 하락을 초래한다. 진입장벽이 낮은 까닭은 장르소설이 ‘환상’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라 해석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환상을 갖고 살아가며 그것이 의식에서 유지되든 무의식에서 유지되든 어떠한 형태로든 환상을 꿈꾼다. 누구나 갖고 있는 환상을 글로 풀어내면 Fantasy가 되기에 텍스트의 생산이 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환상은 판타지와 무협으로 나뉘게 되었으며 틀에 갖힌 모습으로 환상 자체의 생명력을 잃고 있다.

왜일까. 장르소설의 정형화는 달리 말하면 주류를 차지하는 판타지와 무협의 정형화다. 정형화의 원인은 장르소설의 탄생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PC통신에 등장한 초기 판타지는 톨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세대 작가들 대부분의 한계로, 톨킨이 창조한 중간계 세계관을 그대로 차용한 결과 한국의 판타지가 탄생할 수는 있었으나 톨킨의 세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지경에 처하게 된다. 1세대 작가들이 톨킨과 서양신화를 가지고 텍스트를 생산했다면, 2세대 작가들은 1세대가 이루어놓은 것을 그대로 수용했다. 이 순환은 시장과 독자의 요구에 따라 계속되었으며 순환을 통한 정화가 아닌, 부패의 악순환이 되고 말았다.

초기 무협지의 탄생 벼경은 정확히 알지 못하나 한국 무협이 김용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의 아버지세대부터 시작된 무협시장은 판타지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한국무협의 탄생배경이 PC통신은 아닐 것이다. 추측을 통해 <동방불패>나 <의천도룡기>와 같은 홍콩무협영화의 성공으로 원작소설이 국내에 유입되었으며 그와 함께 무협시장이 본격적으로 활성화 되었다고 본다면 지금의 상황을 더욱 쉽게 풀이할 수 있다. 무협지 역시 대여점을 기반으로 하는 시장이었고, 흥미위주의 텍스트 생산이 주를 이루었으며 결과적으로 판타지와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이 아닐까.

웹이 등장하며 새로운 글쟁이들이 등장하며 자연스레 초보 글쟁이를 위한 정보들이 웹으로 유입된다. 톨킨의 세계관 해석에서 출발한 판타지의 이론적 정리는 판타지 자체가 틀에 박히는 지독한 폐해를 가져왔다. <어스시의 마법사>를 쓴 어슐러 르 귄이나 <반지의 제왕>의 J.R.R. 톨킨, <해리포터 시리즈>의 J.K. 롤랑 등 영국 환상작가들과 그들의 세계를 보면 한국 판타지의 정형화된 세계관이 거의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어딜 봐서 (윙 가르디움 레비오우사)나 (익스트로 페트로눔)이 마나를 통해 생성된 클래스 마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나니아 연대기>나 <반지의 제왕>에서의 마법은 한국 판타지에서의 룬마법이나 마나체계를 따른다기보다는 의지를 통해 발현되는 언령 마법에 가깝다. 유럽 환상문학에 대한 이해 부족은 국적불명의 판타지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보의 무비판적 수용 탓이라 볼 수도 있다. 자신의 환상을 풀어 이야기하고는 싶지만 1,2세대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며 환상을 키워온 초보 글쟁이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환상을 품었고 어떤 종류의 환상을 꿈꾸는 지는 불을 보듯 빤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탐구하고 이해하기 전에 기존의 정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수용하는 글쟁이들의 의식부재도 장르소설의 질적 하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무협도 상황이 비슷하다. 김용의 작품은 중원, 즉 중국대륙을 배경으로 한다. 실제 역사적 부분과 사실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김용의 소설들은 대하소설이나 역사소설에 가깝다. 톨킨 세계관의 수용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이 무협에서도 그대로 생겨났다. 무협의 여러 소재들이 동양의학을 바탕으로 하며 동양 무술이 비슷한 체계를 가지고 있음을 생각하면 무협의 세계관 정리는 더욱 손쉬웠을 것이며, 훨씬 체계적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사오십 줄에 앉은 1세대 무협작가들은 김용의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똑같은 무협 세계관을 강요하는 패러독스에 빠지고 말았다.

장르소설의 문제는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비슷한 탁상공론이 이어졌고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대중문화는 자본과 수요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 장르소설 시장은 돌고 돌고 돌아서 썩어가고 있다. 흥미를 끌 수 있는 다양하고도 새로운 소설들은 시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장된다. 출판시장은 철저히 돈에 의해 움직인다.

여러 가지 이유로 대한민국의 환상은 사장되거나, 죽어가고 있다. 환상이 일정한 틀에 끼워 맞춰지면서 문제제기는 계속되어 왔지만 개선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글쟁이와 독자 모두가 왜 자신들의 환상이 ‘중국대륙’과 ‘소드 앤 매직’에 휘둘려야 하는지 원인을 해석하고 의문을 품지 않는다면, 몇 년 이내에 시장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뱀발. 다음 텍스트에서는 장르소설의 문학성 문제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 보겠음.
뱀발 둘. 왜 이러고 있는 걸까. 하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18:28 

 

상병 홍도형 
  ... 이걸 알아주는 글쟁이들이 많으면 좋을텐데 말이죠. 라기보다, 
모두에게 인기 있는 이유는 그 세계관이 그 만큼 재미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려운말은 모르겠지만서도,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는 것 이니. 그 이유가 어디 영원하겠습니까, 곧 다른 흐름이 흐르겠지요. 


우리는 그 흐름을 주도하던가, 따라가던가, 욕하던가, 무시하던가, 넷중 하나를 선택하면 될 것 같습니다. 




으응? 아닌가요? 2009-02-23
14:09:14
  

 

상병 홍도형 
  근데 내가 뭔 소릴 한거지? 2009-02-23
14:09:53
  

 

상병 김예찬 
  D&D룰을 의식했건 의식하지 않았건 결국 표절했던 한국 판타지의 대표 작가들은 자신들의 출세작에 대해 유형 무형의 책임을 져야하겠죠. D/R은 양장판이 나오면서 이를 피하기 위해 살짝 꼼수를 쓴 것 같더군요. 홍정훈의 작품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재밌는건 최근 등장하는 소설 중 많은 작품들은 이제 일본 라노베 계열의 세계관을 차용하고 있다는 거죠.. 그런 행태를 보면 아주 머리가 아픕니다. 장르 문학 팬덤 자체가 적극적으로 씬을 바꾸려는 노력을 보여주어야하는데 또 자기들끼리 무시하고 다투는데 정신이 없기도 하죠. 

예전의 <워터가이드>나 <거울>이 보여주는 시도들이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씬을 근본적으로 바꾸기에는 아직 역량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블로그 서비스들의 보편화가 팬덤의 근간을 이루는 '커뮤니티'들의 쇠퇴를 불러오기도 했구요. 2009-02-23
14:18:38
  

 

일병 송기화 
  요즘은 거의 환상의 정의가 끝나버린 것 같은 느낌입니다. 
옛날에 어디 신화에 나온 얼굴없는 혼돈씨는 얼굴을 그려서 정의하려 했다는 이유로 죽어버렸던데 말이죠. 
아, 그래서 환상이 죽어가는건가요? 2009-02-23
14:21:06
  

 

상병 구진근 
  무준씨가 말하는 정보의 무비판적 수용 중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가까운것은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성이라고 할까요? 우리는 오래전부터 게임을 해 왔고 또한 지금도 지금 시대에 맞는 유행성 게임이 등장하고 거기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게임을 보면 대부분 마법이 등장하고 그 마법에 대해 클래스라던지 특정 속성을 키운다던지 하는 그런 틀이 짜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게임을 하면서 어느새 우리들은 세뇌되어 버린것일지도... 
어릴적부터 우리는 게임을 많이 해 왔습니다. 단순한 던전도마뱀이라던지 XX삼국쥐 등 온갖 마법이 등장하는 그런 게임말입니다. 
물론, 무조건 그것이 잘못되었다기보다 저는 그것이 저희의 생각의 틀을 정해버린것이 아닐까 걱정되는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그러한 마법이라는 것을 상식쯤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일단 가장 시급한 문제는 생각의 틀을 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9-02-23
14:36:51
  

 

상병 김상윤 
  구진근님의 말에 덧대어 설명하자면 클래스 개념의 자리잡음은 리X지가 크게 작용했을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음음. 
장르문학의 대부분은 고등학교때 '수업시간'에 읽는 용도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듯 합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그 선두주자 였고요 2009-02-23
14:41:40
  

 

병장 김무준 
  그 세계관이 재미있기 때문이 아니라, 톨킨의 세계관 자체가 엄청나게 견고해 써먹기 딱 좋기 때문입니다. 좋게 말하면 차용, 나쁘게 말하면 표절이 용이하다는 겁니다.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이 무엇인가는 위에서 말했듯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물음입니다. 한국의 판타지와 무협은 2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듯 돌돌 굴러가고 있습니다. 곧 다른 흐름이 온다고요? 

예찬씨가 지적하신 대로 일본 라이트 노블에서 차용해온 표현과, 세계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국적 불명의 환상소설이 탄생할 뿐입니다. 

던전 앤 드래곤의 경우 원래 D&D라는 보드게임의 설정을 그래픽으로 옮긴 게임입니다. 일본은 전국무쌍 등 다양한 게임을 자국의 색깔에 맞추어 개발하고 있는 반면, 한국 게임업계는 임진록 이후로 이렇다할 한국형 게임을 내놓지 못하고 있죠. 모바일은 그나마 나아서 일지매와 같은 게임이 나오기는 했지만요. 

기화씨가 말하는 혼돈의 이름은 중국 창세신화의 제강일 겁니다. 재미없는 옛날 이야기에 나와있을 거에요. 2009-02-23
15:12:38
  

 

상병 홍도형 
  아무리 써먹기 좋아도, 재미가 없으면 읽혀지지 않겠죠. 
읽혀지지 않으면 존재 이유가 사라지죠. 
게다가 출판사가 읽혀지지 않는 책을 출판해 줄 이유가 없잖아요? 2009-02-23
16:07:48
  

 

일병 신재호 
  환상문학의 정형화는 환상문학이 2세대로 넘어가면서 [소위 이계깽판물이 뜨기 시작할때] 굳어진 현상입니다 그 전까지는 참 참신한 작품이 많이 나왔는대 말이죠 [사실은 환상 문학시장이 너무 작았고 그때까지만해도 환상문학을 출판하려면 그 작품의 수준의 벽이 높았던걸로 알고있습니다 즉 출판사에서 일정 수준이상이 되지 않으면 아예 출판을 해주지 않았던거죠] 그런대 어느때부턴가 점점 출판사가 수준이 낮은 작품에 대해서도 관대해 지기 시작했고 작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겁니다 여기에는 독자의 책임이 크다고 판단됩니다 사실 요즘 세대들은 [물론 저를 포함해서] 책을 거의 읽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수있는 책이 흥미위주인 환상문학이었고 책을거의 읽지 않은 그 사람들 
의 소위 책을 보는 눈이라고 해야되나? 그런게 많이 낮습니다 음..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런겁니다 책을 거의 읽지 않은 제 친구는 귀xx 가 지은 늑x의 x혹 을 아주아주 재미있 
게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정도 책을 본 저의 다른 친구는 그 책을 1페이지만 넘겨보고 라면 받침대로 썼지요 [여담이지만 그때 그 친구의 감상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군요 
"나는 방금 활자 지옥을 다녀왔어"] 너무 극단적인 예인가요? 하지만 다들 느끼시리라고 믿습니다 어쟀든 이런 사람들은 질 낮은 텍스트에 대해서 거부감이 거의 없다 시피 합니다 사실 그게 왜 질이 낮은지 조차 깨닫지 못하죠 이런 사람들이 환상문학의 주 소비층 
이 되버리자 자연히 출판사도 환상문학의 질에대해 관대해 질수밖에 없는것입니다 2009-02-23
16:53:10
  

 

병장 김무준 
  톨킨의 중간계 3부작이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의 환상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입니다. <장르소설의 역사>에서도 설명했듯 기존 1세대 작가들은 톨킨의 세계관을 자신의 소설에 그대로 반영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드래곤라자의 표절과 금전적 문제가 대두되는 건 세계관 자체가 '지적재산'에 해당하기 때문이겠죠. 

상당수 PC통신의 1세대 판타지 작가들이 톨킨이 정립해놓은 세계를 이용했습니다. 일본의 뉴웨이브 문학처럼 다양한 환상이 자라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그렇게 발전하지 못한 것은 웹가 식자층(매니아층)이 악기능을 한 탓입니다. 

출판사의 입장에서 재미있는 책을 출판하고자 하고, 좁은 독자층의 요구는 한결 같기에 시장이 변하지 않는 겁니다. 소수에게는 재미가 있겠죠. 하지만 위의 텍스트에서 언급한 이분법적 논리를 적용할 때 후자의 집단, 장르소설을 옹호하는 집단은 비판집단에 비해 굉장히 작은 소수 집단입니다. 현재 출판시장에서 1만부가 넘으면 베스트셀러라 칭하는 현실이, 어쩌면 음반과 순문학을 포함한 한국 문화에 전반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회수와 매니아층, 대여점 수를 종합해 생각해 볼 때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소 출판사들은 줄줄이 망해가고 있고, 청어람 등 대형 출판사만이 살아남는 실정입니다. 읽혀지는 책을 출판하는 것이 아니라, 읽혀질만한 책을 출판하는 겁니다. 이미 텍스트는 웹에서 1차 소비가 되었고, 책의 소장을 목적으로 2차 소비를 하는 소비자는 극소수. 대여점 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의 정형화된 재미가 시장에 의해 독자에게 주입되는 재미인지, 아니면 진정 독자가 원하는 재미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흥미의 척도는 지극히 주관적일 수 밖에 없으나, 이제는 구매력을 갖춘 기존 독자층의 전반적인 움직임과 사고를 보면 더이상 재미가 재미가 아님을 깨달으셨을 텐데요. 2009-02-23
16:57:58
  

 

상병 김예찬 
  재호님께 태클 거는 건 아닙니다만, 전 가끔 이른바 '판타지 매니아'들의 일부가 가지는 귀여니 류의 인터넷 로맨스 소설에 대해 가지는 알 수 없는 우월감이 그들의 질적 성장을 방해한다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자신들 보다 저급한 장르를 설정해 놓고 자신들의 취향에 대한 자족감을 느끼는거죠. 이건 어떻게 보면 오타쿠 문화의 특징이기도 합니다만. 2009-02-23
16:58:57
  

 

일병 신재호 
  음.. 하나 덧붙이자면 정형화된 "틀" 이란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것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정형화가 榮募째痼 그만큼 그 "틀"에 이점이 있다는 뜻이지요 "틀"속에서도 글쟁이 자신의 실력이 뒷받침된다면 충분히 재미있는 환상소설을 쓸수있다는게 제 지론입니다 
문제는 글쟁이들의 자신의 글에 대한 애착과 독자들이 환상문학을 보는 눈의 눈 높이일 겁니다 2009-02-23
16:59:06
  

 

병장 김무준 
  톨킨이 중간계 3부작을 쓰고 나서 자신의 세계를 사용해도 좋다고 지적재산의 포기를 선언했던 걸까요. 이와 관련한 정보가 필요하나 찾을 방법이 없군요. 쩝. 2009-02-23
17:02:46
  

 

일병 송기화 
  스포어라는 게임의 NDS판은 크리쳐라는 생물을 만드는 걸로 시작합니다. 
수많은 항목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눈, 원하는 팔, 원하는 다리, 원하는 입 등을 모아서 자신이 플레이 할 새로운 크리쳐를 만드는겁니다. 
플레이어는 내가 플레이 할 캐릭터를 내 마음대로 창조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눈도 팔도 입도 정해진 것들 중에서 골랐을 뿐인거죠. 요즘 책들은 다 그런 느낌이더라구요. 2009-02-23
17:04:05
  

 

일병 신재호 
  상병 김예찬//음 제가 귀모양을 예로든것은 장르문학을 한번쯤 접해본 사람이라면 거의다 알고있을정도로 유명한 소설이라서 그런겁니다 2009-02-23
17:05:35
  

 

상병 김예찬 
  네, 재호님의 글과는 상관 없구요, 그냥 귀여니 떡밥이 등장해서 생각해 본겁니다. 가끔 판타지 문학 팬덤이 가지고 있는 인터넷 로맨스물에 대한 편견(약간의 질투가 섞여있다고 봅니다만)을 보면 그들의 성장을 방해하는게 과연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아서요. 오히려 판타지는 어느정도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는 로맨스물에 비해서 은근히 골수 독자층이나 시장 자체가 적은 편이죠... 2009-02-23
17:09:04
  

 

병장 양동민 
  <퇴마록>은 그런 의미에서 좀 이른시기에 변화를 꿈꿨던 소설이 아닌가 합니다. 
이우혁 스스로 말했듯이 '한국형 판타지'를 내세워 만들었고, 그 결과또한 성공적이었으니까 말이죵. (물론 혼세 이후의 스토리는 약간 짬뽕변형된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2009-02-23
18:39:56
  

 

상병 최한들 
  [장르소설에서 주류를 차지하지 못한 장르들은 모두 여러 가지 이유로 글쟁이들의 진입장벽이 높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와 달리 진입장벽이 굉장히 낮은 판타지와 무협, 이 두 장르가 시장을 점령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글쎄요. 동의하기 힘들군요. 무준님께서 말씀하신 듯이 현재 장르 시작은 쳇바퀴 굴리듯 계속되는 한심한 논의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결국 예의 쳇바퀴 굴리는 짓일런지 모르겠지만. 

무준님께서 말하신 것을 그대로 따와 시점만 바꿔보죠. 

판타지와 무협, 두 장르는 쓰기도 쉽지만 읽기 또한 쉽습니다. 작가들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혹은 글을 만드는데 있어서 수고를 아끼기 위해 판타지와 무협을 먼저 손댄다 라 하는데, 

실은 그건 독자가 많이 찾아서가 아닐까요? 

위해서 말하셨듯이 장르시장은 결국 돈이 되는 것을 찾지요. 

독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판타지와 무협은 나올 수가 없어요. 작가가 많이 만들어대기 때문에 독자가 별수 없이 읽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실은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양의 글이 생산된 겁니다. 

라고 생각해요. 2009-02-23
21:00:55
  

 

상병 최한들 
  그리고 무준님께선 이렇게 장황하게 글을 써놓으시곤, 정작 해결책은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론만 주구장창 늘어놓고선 결론은 없다뇨. 이건 좀 슬픈 일입니다. 결국, 당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며 어쩌자는 것입니까. 
읽고 나서 당신이 원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고작 
'이 글을 읽는 사람들만이라도 각성하여 판에 박힌 양성형 글을 쓰지 말자' 
라는 의도인것 같은데. 무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정도로는 판도가 바뀌지 않을 겁니다. 

위에서 밝혔듯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모두 무준님 뜻대로 틀에 박힌 글을 쓰지 않는다 해서, 독자들이 그 글을 찾고 읽을까요? 아뇨, 그렇지 않을겁니다. 

우리는 하얀 로냐프 강이나 조커와 같은 새로운 개념의 판타지 소설들이 - 꽤나 훌륭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널리 읽히지 못하고 묻혀버렸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것을 전재로 했을 때, 우리가 참신한 글들을 배출해 내어도 독자는 외면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죠. 결국 답은? 

독자의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 이겁니다. 

사실 이 명제에 대해선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다할 해결책이 없어요. 독자의 개념을 바꾸기 위해선 작가들이 노력하여 그만한 글들을 써야 하는데, 그런 글들이 써진다 해도 묻혀버리기 일쑤니까요. 2009-02-23
21:06:17
  

 

상병 최한들 
  그렇다면 이쯤에서 제가 미스테리한 질문 하나 하죠. 
왜, 어째서?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같은 환상 문학은 잘 팔렸는데, 
하얀 로냐프강. 조커 같은 우리나라 환상 문학은 망했을까요? 

다시 말해, 비슷한 작품을 내도 어째서 외국 문학은 잘 팔리고, 우리나라 문학은 잘 안팔릴까요~? 

이건 축구의 원리와 같다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암만 K-리그 선수들에게 달려가서 
"니들은 왜 유럽 선수들만큼 축구를 못하니!" 
하고소리쳐봐야 별 수 없는 거예요. 

뭐, 축구와 소설은 분명히 다르긴 하죠. 
우리나라와 유럽의 축구는 확연히 실력차이가 있지만, 소설은 실력차이의 문제도 아니니. 다른 부분에서 원인을 찾아야 겠죠. 

제가 생각키로는, 분위기와 명성의 차이라 생각합니다. 
일본 소설들은 대부분 부드럽고 눅눅한 분위기입니다. 문체 자체가 그렇죠. 유럽의 소설들은? 제가 알기로는(물론 작가간의 개인적인 차이는 분명 존재하지만) 약간 가볍고 붕뜬 느낌이랄까요. 우리나라의 무게감있는 묵직한 글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죠. 
아무리 번역을 잘 해도(혹은 ㅈ같이 해도) 그 분위기는 남아있기 마련일겁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전 우리나라 판타지 소설에는 쉽게 지갑이 열리지 않더군요. 판타지 소설에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만 들어가도 왠지 우습게 보여요. 

이건 우리의 뇌속에 박혀 버린 무의식 속의 관념이 아닐까요. 


뭔 횡설수설인지. 죄송합니다. 글을 못써서. 2009-02-23
21:25:06
  

 

병장 김무준 
  저기... 위에서 언급한 두 텍스트를 읽고 오시지 말입니다. 

계속해서 톨킨의 예를 드는데, 대한민국의 많은 초기 판타지들이 톨킨의 세계관을 차용해 생산되었음은 <드래곤라자>와 <비상하는 매> 등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로도스 전기>는 기억하기로 D&D 진행된 게임의 기록에서 출발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서양의 환상문학이 기사도 문학에서 시작된 자연발생적 문학이라면 동양의 초기 유럽형 판타지는 톨킨과 D&D 게임의 스토리보드에서 출발했기에, 매니아층의 팬덤 문화가 가져온 일종의 부산물에 가깝습니다. 한국의 무협과 판타지 모두 시작부터가 타인의 세계를 차용해오는 형태로 출발했기에 두 장르가 틀에 박힌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독자층은 새롭게 생겨난 환상문학이라는 ‘장르’에 흥미를 얻었지만, 그 흥미만큼 다양한 연구를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과정이 작용하고 있는 지는 대충 위의 텍스트들 <장르소설의 역사>, <장르소설의 한계와 극복>, <장르소설의 정형화>에서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웹이 등장하면서 PC통신의 1세대 판타지보다 매니아층은 증가했으나, 텍스트의 소장을 원하는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기존 순문학이 문예지나 신문을 통해 텍스트로의 발현이 이루어졌던 것과는 달리, 환상문학은 대부분 웹을 통해 최초의 발현이 진행됩니다. 거기다 불법 텍스트 공유 등 웹에서는 통신에서보다 어둠의 루트를 통해 정보를 가져오는 것이 무척 쉬워졌죠. 때문에 장르소설시장에서 '책을 산다'는 의미는 '소장한다'는 것에 가깝게 해석됩니다. 웹을 통해 1차로 소비한 매체를 책이라는 아날로그적 장치를 통해 2차 소비하려 하는 소비자들이 많을까요? 대다수 소비자들의 목적은 재미 찾기, 시간 때우기에 가까워 책이 구매되는 2차 소비는 쉽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깽깽이가 텍스트를 생산하는 목적은 입이 아프도록 짖어 왔습니다. 단순한 자기만족을 위한 텍스트이기에 특별한 목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판도를 바꾸려 했다면 다시 뜻 있는 사람들을 모아 웹에서부터 문제를 뜯어 고치려 전문적 지식을 쌓고 있었을 겁니다. 생산된 텍스트는 각종 거대 장르소설 사이트에 게시했겠죠. 현재 깽깽이가 생산중인 장르소설 시리즈는 이해가 부족한 비판집단과, 자신들의 문화가 어떤 것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옹호집단 둘 모두를 위한 이야기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였으며, 무엇이 문제인가를 이야기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모든 칼럼이 변화나 개혁, 계몽을 말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떠한 형태로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앞선 텍스트에서 이미 이야기했으므로 생략하겠습니다. 

‘제대로 된 환상문학을 생산하자‘는 논지의 논설문을 쓰고자하는 목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미 지난 몇 년간 아무리 짖는 들 말 그대로 소수의 울부짖음은 개소리에 가깝게 해석됨을 깨달았고, 독자와 시장 텍스트의 생산자 셋 모두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인지했습니다. 적당히 하겠습니다. 

분위기와 명성을 떠나서 외국 환상문학이 천대받지 않는 건, 그게 재미있기 때문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소설이라는 장르는 기사도 문학에서 탄생한 것으로, 기사도 문학의 출발을 이해한다면 (참조 - [060520]황민우(예)- 노벨라(Novella)와 『돈 키호테 데 라 만차』) 설명이 빠르겠습니다. 유럽에서의 판타지는 신화의 발생, 소설의 탄생에 이어지는 단계적 변화의 과정에서 탄생했습니다. 한국의 유럽형 판타지는 유럽의 그것을 가져와 소비하는 과정에서 탄생했고요. 기존 문학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이례적이고도 갑작스런 일이 ‘한국 장르소설의 발생’입니다. 

한국의 무협과 판타지는 타국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유럽의 판타지가 유입되어 새로운 독자층에 제공되면서부터, 새로운 독자들의 환상은 ‘중세 유럽’과 ‘중국대륙’에서 시작합니다. 이러한 독자들이 후에 텍스트의 생산자로 발전하며, 시장은 다시 전체 대중에 비해 지극히 소수인 독자층을 위하여 텍스트를 선별하고, 출판합니다.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왜 이런 악순환이 생겨났느냐 하면, 장르소설의 탄생 자체가 이례적이고 갑작스러웠기에 순기능을 해줄 식자층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평가됩니다. 소수 아마추어 비평집단이 있었지만, 장르소설을 하나의 학문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부족했습니다. 기득권을 쥔 세력은 제 밥그릇 챙기기 바빴습니다. 평론가나 비평가는 부족한데, 이들 평론가와 비평가의 논지를 받쳐줄 이론적 장치는 순문학에서 그대로 가져와야만 했고, 결국 시장을 비판하고 평가해 줄 이들이 사라집니다. 독자층에 의문을 품게 해줄 식자층이 전멸했습니다. 비판적 수용이 함께하지 못하기에 장르소설은 웹을 통해 2세대로 넘어가는 발전 과정에서 기형적 형태로 자라났습니다. 

한국에서 톨킨, 롤랑, 르 귄의 책이 팔린 까닭은 유행에 편승한 탓입니다. <반지의 제왕>, <게드전기>, <나니아 연대기> 등 세계 3대 판타지라 불리는 작품들이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되었고, 기존 매니아층이 주도하던 시장에 대중이 유입되면서 흥미를 품은 대중들이 소비자층으로 변환되었습니다. <해리포터>야 말할 것도 없이 유럽에서 먼저 붐이 일어났고요. 이들의 명성이 높아서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광고와 언론매체들의 지원사격 덕이라 생각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작품들 중 <해리포터>를 제외하면 매체에서 때려대기 전에(혹은 영화화 되기 전에) 한국에서는 장르소설의 매니아층에게서만 알려져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실험적 소설, 독창적 소설이 출판되지 않는 건 모험을 감행하려는 마음이 없는 출판시장의 잘못입니다. 소비자층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참신하고도 흥미로운 텍스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1세대 독자층이 구매력을 갖추었지만, 2세대 3세대 작가들의 텍스트가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큼 우수한 것은 아닙니다. 이영도와 윤현승의 <드래곤라자>, <폴라리스 랩소디>, <하얀 늑대들> 같은 소설이 양장본으로 재탄생 한 건 그만큼 수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장을 목적으로 책을 소비하는 매니아층은 1세대에 그랬던 것처럼 ‘새롭고도 흥미로운’ 텍스트가 제공된다면 얼마든지 지갑을 열게 될 겁니다. <드래곤라자>, <묵향>, <비뢰도> 등은 그런 측면에서 수십만 권이 팔렸죠. 

말이 길어졌습니다만 이정도면 한들씨의 물음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나머지는 전의 텍스트들과 내글/후기에 있는 <반지제왕 보고서>, <환상소설과 문학의 범주에 대한 선전포고>를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더 설명하기도 귀찮아요. 2009-02-24
03:20:07
  

 

상병 홍도형 
  ... 파전이든 해물파전이든 김치전이든 똑같은 밀가루에서 탄생되었다고 해서 그 녀석들이 맛있다는 사실이 변하는건 아니잖아요. 

뭐 그러다 사람들이 그거에 질리면 녹두전도 먹고 하겠죠. 

왜 꼭 파전을 밀가루로만 만드느냐 하고 욕하기보단 다른 요리법을 소개해 보아요. 2009-02-24
08:33:53
  

 

상병 김호균 
  이전의 2개의 글 참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또 써주셨군요 
천천히 잘 읽겠습니다 


 [일상이야기] 다마고치  
병장 김무준   2009-03-05 15:31:30, 조회: 266, 추천:0 

그 날은 주말이었다. 깔깔이를 입고 침낭에 들어가 엎드려 있었다. 싸이도 확인했겠다, 주변 친구들과 전화도 몇 통 했다. 후배와 두던 장기는 질려버렸고 무료함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이 황금 같은 휴일 오후 무엇을 하느냐. 결국 리모컨을 잡고 티비를 켜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다. 쩌업. 프리미어리그 재방송도 안 하고, 태연도 나오질 않으니 무얼 볼까.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멈췄다. <록키 발보아>라. 어렸을 적 록키를 본 기억이 있다. 내용은 거의 기억나질 않지만 실베스타 스텔론 하면 언제나 록키 발보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록키 시리즈의 최근작인 <록키 발보아>는 개봉 된지가 꽤 지났다. 개봉당시만 해도 어떻게든 극장에서 보려고 쏘다녔지만 시간이 나지 않았다- 는 말은 핑계고, 이렇게 보고 싶어 했지만 보지 못한 영화가 어디 한 둘이던가. 말이야 바로 해야 하니 못 본 게 아니라, 게으른 탓에 안 본 거겠지만. 

빠밤 빰. 빠밤 빰. 빠바바바 바밤. 빠바바바 바바바 빰빰. 록키의 오에스티를 들어보지 못 한 이가 있을까. 기억의 향수라는 게 으레 그렇듯 아련한 것이고 무료함을 달래보자는 생각에 영화를 시청했다. 혼자 누워 불을 끄고 침낭 안에서 꼼지락 거리며 보는 영화. 으으 슬프도다.

영화와 현실이 미묘하게 겹쳐졌다. 아직 이십대 꽃다운 청춘이기에 퇴물 복서의 심정을 이해하겠냐마는 뭐 그랬다는 거다. 공사에 입사한 후 많은 것을 잃었다. 날로 썩어가는 피부, 나빠질 대로 나빠진 오른쪽 무릎, 굳어가는 대가리는 물론이요 육체적 공간적 자유, 사람과 사람의 관계 같은 것들. 록키의 경우는 그게 세월이 흐르며 자연스레 사라진 것들이지만.

현실과 이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십대에서 이십대로 넘어가는 그 순간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 그게 착각이라는 걸 아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 건 아니었다. 타협이 나쁜 것만은 아닐 테니 기왕 잃을 거 마음 편하게 잃자. 현실의 한계를 수용함이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그렇게 살아왔다. 요즘 들어서야 벽이고 나발이고 일단 부딪혀보자는 자세로 마음을 바꾸었어도,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한 순간에 바뀌던가. 바뀌는 부분도 있고 바뀌지 않는 부분도 있으니까, 침상에 누워서 뒹굴 거리는 게지. 쩝.

록키는 은퇴했었다. 그리고 불패의 챔피언과 경기를 준비한다. 주변에서는 다들 미쳤다고 록키를 말리고, 심지어 그의 하나뿐인 아들마저 록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록키는 현실에 분노한다. 그리고 싸운다. 하고픈 일을 하라는 영화의 주제야 개소리로 흘려듣고, 실베스타 스텔론의 늙지 않는 몸매를 엎어둔 채 머릿속에 맴도는 건 록키 발보아의 한마디였다.

내 안에 야수가 살고 있어.

두 시간 넘게 영화를 보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이 대사밖에 기억나질 않는다. 나태해질 대로 나태해져 침낭과 한 몸이 되어버린 슬픈 벌레를 발견했다. 에잇 젠장. 기분 좋은 영화를 봤지만 괜히 울적해졌다. 이건 슬픈 것도 아니고 화나는 것도 아녀. 우울한 것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녀. 그저 입맛이 더럽게 써서 담배를 피러 나갔다.

가슴 속에 짐승을 키웠던 적이 있다. 가슴에 살던 늑대는 옆집 누렁이가 되어버렸다. 고독을 즐기며 우수에 찬 눈빛으로 외로움을 울부짖는 재수 없는 늑대는 아니었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곰이나 호랑이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는 멋진 늑대도 아니었지만, 현실이라는 사냥꾼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몸을 웅크리고 있던 늑대였다. 그런 녀석이 옆집 누렁이가 되어있었다.

에잇. 이건 절대로 슬픈 게 아녀.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19:08 

 

병장 손정훈 
  제 후배와 똑같은 TV관념을 갖고 계시네요. 

태연 아니면 프리미어리그. 그는 지금 티비황제라 불리고 있습니다. 모르는 채널이 없어요. 그가 설탕을 나가면 우린 무슨채널을 틀어야 할지 모르겠답니다. 2009-03-05
15:34:40
  

 

병장 김무준 
  라리가나 세리아도 챙겨 봅니다. 나는 펫도 챙겨보고요. 태연을 보려고 보는 게 아니라 가끔 따라나오는 제시카를 보려… 

아. 아저씨 냄새난다. 2009-03-05
15:40:15
  

 

상병 김예찬 
  크, 귓 속에 록키 테마곡이 울려퍼지는 것 같습니다. 록키 발보아는 시대와 싸웠던 영웅의 귀환이었죠. 젊고, 위대했던 아메리카가 이제는 늙고 병들어 안팎으로 위기에 처했던 상황에 대한 영화적 반영이라고 느꼈어요. 정치적 공정함을 떠나서, 그냥 아름답더군요. 2009-03-05
16:10:17
  

 

병장 최동준 
  오락프로그램은 본방사수를 목표로 해서 다 보고 음악프로그램도 주워듣는데 안나오면 영화나 내셔널 지오그래픽...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재미없다고 넘기는 이들은 뭔가 문제있다니깐요. 

것보다, 오늘 KBS2에서 누들로드 한거보신분?? 이거 재밌던데. 2009-03-06
01:10:39
  

 

상병 차종기 
  저 제목에 다마고치는 그 다마고치가 아닌가요, 2009-03-06
09:52:52
  

 

일병 배광언 
  다마고치는 비유인가요? 밥먹이고 똥치워주고 하는 그 다마고치요. 아뭏튼 여기 또 한마리 백구 추가합니다. 얘는 자기가 시베리아 늑대개였었지요 2009-03-06
20:23:30
  

 

병장 정해룡 
  저희 궁은 프리미어밖에 나오질 않네요 ..주말에는 티비와 함께 하는 신나는 ...(?)궁생활! 2009-03-06
23:04:32
  

 

상병 장형순 
  Eyes of Tiger" 테마곡 제목이 이거 아니었나요. 

록키와 람보.라는 영화는 스텔론.의 연기를 넘어서 미국 그 자체의 상징이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다시 만들어진, 마치 스텔론 스스로 찬란했지만 이제는 저물어버린 배우 인생을 마무리하는 듯한, 두 영화의 연이은 개봉은 추억속의 영광과 승리의 방식은 저물었으며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었다. 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주름살의 스텔론이 여전히 머리띠를 두르고, 복싱 글러브를 끼고 피와 땀에 절어 촛점없는 눈으로 승리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네요. 2009-03-07
01:54:30
  

 

일병 배광언 
  아뭏튼->아무튼 
 [독서후기]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으로 만들어진다.  
병장 김무준   2009-03-05 22:27:27, 조회: 269, 추천:0 

1.
끝내주게 심심했다. 심심할 때는 뭘 해야 할까. 뭐라도 해야 하는데 때마침 성남시 도서관에서 새 책이 대여되었다. 인사담당부서에 찾아가 후배직원을 닦달해 잠긴 서고의 문을 열었다. 단골손님에게는 문을 개방할 수밖에. 일체의 협박 따위는 없었고 어디까지나 합법적으로 서고를 열었다. 아멜리 노통브. 무라카미 류. 얘들은 뭐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호기심에 책을 챙겼고 <문화산업의 이해>를 챙겼다. 한 권만 더 빼갈까. 음? 박민규? 박민규라……. 이게 작가 이름이든가 먹는 거던가. 일단 챙겼다.

사무실 서랍에 고이 꽂아두고 심심할 때마다 보기로 마음먹었다. 늘 그런 식이니까. 그리고 다이어리를 열었다. 이곳에 들어오게 되면서 무엇이라도 남겨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고, 기록을 남기기로 결심했다. 재작년 시월부터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으니까 올해로 꼬박 삼년 째 다이어리를 쓰고 있다.

뭐든 하다보면 룰이 생긴다. 다이어리를 정리하는 법을 깨달았다. 다이어리는 잡기장으로 변신했고 패션디자인 이론이나 독후감, 상념의 조각, 잡지 스크랩, 술에 대한 정보들, 사진 등이 들어갔다. 그래도 분류는 나뉘어져있고 부분마다 색깔 테이프로 표시를 해뒀다. 말 그대로 정리를 해야 하니까. 그래야 읽기 편하다. 기록이 모든 삶을 기술할 수는 없지만, 하루하루 기록된 삶을 통해 흘러간 시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흘러간 삶이 뒤죽박죽이 되어서는 곤란하니까. 정리한다.

손에 글씨가 번졌다. 비누로 씻고 또 씻어도 지워지질 않는다. 일단은 내버려 둘 밖에.

2.
박민규의 <카스테라>를 읽었다.

맹세컨대 이제까지 박민규나 김애란 따위의 소설가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무슨 소설을 썼는지 알지 못했다. 본 적이 없으니까. 삶은 유통기한이 지난 카스테라처럼 퍽퍽했고, 때로는 뜻하지 않게 냉장고에 들어간 코끼리마냥 난폭하게 날뛰었다. 밟히지 않으려면 튀어야했다. 밟히면 죽는 거니까. 살아야 했다구. 제-인-장. 박민규가 뭐지? 먹는 건가? 살아야했다. 돈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 영화 도쿄의 메르드가 일문국화를 씹어 먹듯 돈을 씹어 먹어야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돈을 벌었고, 돈을 벌었고, 또 돈을 벌었다. 박민규가 뭐든 간에 밥 먹여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관심이 없을 수밖에.

책을 읽다말고 주변을 둘러보니 엉망이 된 책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책상에 틀다 만 비디오와 디브이디와 다이어리와 달력과 마시고 난 우유팩과 윗옷과 카메라와 전선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다이어리를 쓰며 터득한 정리의 기술은 그대로 삶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많은 것들을 정리하는 습관이 들었고 습관은 조금씩 병적인 수준으로 번지고 있다. 뭐 어때. 그래도 깔끔한 게 좋잖아.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웬만해선 하질 않으니 자연스레 습관을 인정하게 되었다. 정리하는 습관은 좋은 습관이다. 내버려 두면 후배들이 해야 하니까.

정리는 끝났고 박민규의 <카스테라>를 다시 읽었다. 손에 번진 글씨는 아직도 지워지질 않았다.

3.
아니 그러니까, 표지에 박민규 소설 <카스테라> 면 당연히 장편이어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냐? 책을 펴고 차례를 보니 딱 필이 온다. 이건 소설집이다. 설마 소설집인데 소설이라고 구라를 쳤겠어. 이건 분명히 장편일 거야. 심심했고, 그 대단하다는 박민규가 진짜 대단한 건지 궁금했고, 문학의 희망이니 어쩌니 저쩌니가 진짜인지 알고 싶어서 읽었다. 더군다나 표지에는 무려 이외수 선생님의 서평이 실려 있었으니까!

어라, 이건 뭐야. 왜 내가 평소에 텍스트를 생산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소설이 이어지는 거지. 대화는 따옴표 없이 처리되어 있었고 문단과 문단 사이에는 엔터가 두 번 들어갔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텍스트가 진행된다니. 이건 o미? 꼭 내가 박민규인가 뭔가 하는 양반의 텍스트를 읽고 그에게 홀딱 반해 비슷하게 텍스트를 생산한다고 착각할 시츄에이션이잖아. 나는 주제 사라마구의 텍스트와, 그 리얼리즘에 흥미를 느껴 그처럼 텍스트를 생산하고 있지 박민규라는 양반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니라고요.

순문학에 대해서 알레르기성 거부반응이 있었고, 거부감이 있지만 장르문단의 발전을 위해 순수문예비평이론을 공부한 거지 아름다운 문학을 하자고 공부한 게 아니었다. 나는 순문학을 거의 읽지 않았다. 왜 이 사람이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받는 거지? 글쎄다. 요즈음의 문학도 손대지 않는 통에 트렌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럼 어쩌겠어. 궁금한 건 죽어도 알아야하고, 호기심이 생기면 잠을 잘 수 없는 게 내 성격이다. 잠은 자야하니까, <카스테라> 해체에 들어가려는 찰나 청소가 시작되었다. 에라이- 청소나 해야지.

아직도 손에 번진 글씨가 지워지지 않았나 싶어 쳐다보니 손끝에도 잉크 비슷한 것이 묻어있다. 쓰는 펜의 잉크가 번지는 모양이다. x.

4.
다시 책을 폈다. 그리고 다 읽었다. 이게 뭐야? 이게 요즘 촉망받는 현대문학의 흐름이자 문학의 희망이라고? 그래. 순문학이 예술위해 나아가며 문학이 제 기능을 위해 현실을 반영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려 노력한다는 건 알겠어. 근데 이야기를 꼭 이렇게 배배 꼬아서 써야하는 거야? 그러니까 냉장고가 어쨌다구.

난해하다면 난해하고 더럽다면 더럽다. 할배들과 대중은 이것을 보고 문학이요 예술이라 칭송하고 떠받들고 있는 건가? 왜? 뭣땀시?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문학이면 다 아름답고 비유적으로 치장되어야하나? 그런 건가?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그래도 호기심이 쉽사리 해결되지는 않았다. 이게 왜 아름다운가. 정독은 끝냈으니 텍스트의 해체를 위해 작업에 들어갔다. 이건 순전히 습관 때문이다. 정리하고 구분하려는 습관. <카스테라>와 함께 고른 <문화산업의 이해>는 제목을 통해 추측한 내용이 아니라 영상과 미디어, 그리고 현재의 흐름에 대한 해석과 방향제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낚시라면 낚시다. 앗싸 월척이구나. 이건 떡밥인 줄 모르고 물어댄 인간의 잘못인가. 화가 나서라도 텍스트를 해체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읽었다. 난해하기는 마친가지. 그래서 뭐 냉장고고 세계고 카스테라가 뭐 어쨌다는 거야. 

짜증이 솟구쳐 담배를 피러 나갔다. 어디서 묻었는지 모를 잉크가 손에 여기저기 번져있다. 이런 씨벌헐.

5.
텍스트를 해체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으니 텍스트의 내적 비평이다. 이것이 무엇이냐. 말 그대로 텍스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비평하는 작업이다. 비평은 사물의 미추를 구별하여 제시하는 것이 정의고, 그에 맞게 텍스트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게 요즈음 인정받는 소설인가? 뭐 그렇다 치자.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꼴은 갖추고 있는데다 여러 복선과 효과적 비유, 현재에 대한 문제제기는 물론 이 모든 것이 잘 버무러져 있으니 아름답고도 문학적인 텍스트라 할 수 있겠다. 근데 이걸 꼭 이렇게 난해하게 꼬아서 제시해야해?

텍스트는 상당히 난해한 편이었고, 결국 외적 비평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박민규라는 인간이 어떻게 텍스트를 생산하게 되었는지 배경을 추적하고 그의 살아온 삶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이야기를 하려 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해석에서도 말하듯 박민규는 단편집<카스테라>에서 첫 단편 <카스테라>를 통해 자신이 텍스트라는 냉장고에 자신의 세계를 집어넣고, 해석하려 노력한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 과정이 문학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에 평단과, 문학을 사랑하는 대중은 박민규를 높게 치켜세우는 거겠지.

그러나 문학을 싫어하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게 왜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문예비평이론을 통해 아름다운 문학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문학의 예술성이 어떠한 것들을 통해 발현되며, 그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지, 감성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뭐, 그래도 식자의 입장에서 보면 재미는 있네. 그렇고 그런 요즘 문학보다는 적당히 특별하고 신선하니까. 그래도 순문학을 하고 싶은 건 아냐. <구회 말 투아웃>의 출판이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마당에 다른 곳에 스트레스 받을 여유가 없다구. 문학을 하고 예술을 하며 미를 추구하고 싶은 마음은 어디에도 없단 말이야. 

웁스. 고개를 들어 모니터를 보니 모니터에 비친 얼굴에 잉크가 덕지덕지 묻어있다. 이건 다 어디서 온 거야.

6.
손가락을 놀리다 손가락이 이상해진 것을 발견했다. 손이 종이가 되어있다. 이게 뭐시깽?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모습에 경악했다. 눈이 삔 건가. 헛것이 다 보이네. 거울 앞에 서니, 머리에는 길고 긴 끈이 하나 붙어있고 몸은 마치 종이처럼 얇아져 인간이 아닌 종이인형이 되고 말았다. 셧 더 뻑. 설상가상으로 등에는 두꺼운 무언가가 장판처럼 덮였다. 이건 그러니까,

마치 책과 같았다.

종이로 변한 몸 구석구석에는 갖가지 문장이 넘쳐났다.

눈이 있어야 할 곳에서는 이영도와 전민희와 홍정훈과 어슐러 르 귄과 제이 케이 롤랑과 제이 알 알 톨킨과 알랭 드 보통과 귀욤 뮈소와 오쿠다 히데오와 황석영과 원재훈과 우석훈과 히로코 무토와 오치아이 마사카츠와 장광효와 김지민과 허원영과 황민우와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수많은 인간들이 뒤죽박죽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으아아악 이게 뭐야!

거기다 이마에는 주제 사라마구라고 떡하니 박혀있다.

거울 뒤에서 박민규가 씩 웃는다.

나는 책이 되어 있었다.

0.
그러니까 이따위 것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게 느껴진다구. 나도 이런 류의 텍스트를 쓸 수 있단 말이야. 누구는 할 줄 몰라서 하질 않는 게 아니라구. 근데 문학이라는 게 꼭 스크류바처럼 삑 삑 꼬아서 써야하는 거야? 이래서 내가 문학이 싫다는 거지. 뭐가 아름다운 건데? 문학이 예술이라면 예술을 하느니 나는 차라리 더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겠어.

그렇게 오늘도 <구회 말 투아웃>을 쓴다.





뱀발. 박민규를 사상 처음으로 접했음에도, 
그의 텍스트가 약간의 재미는 있지만 
대체 왜 인정받는지 감정적으로는 이해가 가질 않음.
뱀발 둘. 그래, 심심했다 이겁니다.
뱀발 셋. 뭐 그래도 솔직히 객관적으로 봐도 깽깽이가 
박민규씨보다 텍스트를 잘 쓴다고 생각지는 않음.
뱀발 넷. 으어어 목표로 한 1차 데드라인까지 열흘 밖에 안 남았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19:33 

 

병장 정문환 
  난해한 글입니다. 저로써는 생각 할 수 없는... 2009-03-05
23:58:15
  

 

상병 김요셉 
  카스테라의 인기비결이요. 음. 
<카스테라>때의 박민규는, 뭐랄까. 독자가 텍스트를 해체하기 이전에 이미 텍스트가 해체되어 있다랄까- 그런 맛이 있었어요. 아버지를 기린과 동일시하고 세계를 냉장고 속에 집어 넣기 위해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서사와 언어를 해체해 새로 구성해야만 하는 것이겠지요. 

그게 (지나치게) 과하지도 않았던데다가,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박민규가 이미 보여 준 바 있는 그 탁월한 서사능력 덕분에 대중들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텍스트를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심지어 일부 대중들은 박민규가 개인적으로 느껴 글에 담았을 현실적 페이소스를 별다른 수용의 과정 없이 그대로 공감- 할 수도 있었지 않나. 싶기도 하구요. 2009-03-06
08:04:22
  

 

상병 정근영 
  클클, 역시 적당히 시니컬하면서도 유쾌한 글이군요. 
저도 책마을에서 박민규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꽤 됐는데,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손이 잘 안 가더라구요. 독서후기에 박민규에 관한 글이 올라온건 오랜만인걸요. 동석씨가 있었으면 재밌었을텐데. 
그런데 읽다보니까 무준씨의 '텍스트해체'에 관해 좀 흥미가 가는데, 위에 언급하신 부분을 제외하고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지 알려주실수 있나요? 저는 문예비평이니 뭐시기 하는 것 따위 하나도 몰라서, 독서후기 쓸때면 뭔가 즉흥적인 느낌으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필이 안 오면 글이 써지지가 않아서 문제더라구요, 으음. 기왕이면 칼럼으로 한 편 올려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흐흐 2009-03-06
08:10:50
  

 

상병 김형태 
  '꼭 내가 박민규인가 뭔가 하는 양반의 텍스트를 읽고 그에게 홀딱 반해 비슷하게 텍스트를 생산한다고 착각할 시츄에이션이잖아. 나는 주제 사라마구의 텍스트와, 그 리얼리즘에 흥미를 느껴 그처럼 텍스트를 생산하고 있지 박민규라는 양반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니라고요.' 제목을 좀 깊게 설명해주신건가요? 하하 

정말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으로 만들어진다.'에 공감 +100%입니다. 
저도 박민규에 빠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2009-03-06
09:52:36
  

 

병장 이우중 
  이병주는 '제4막'에서 "굳이 변명을 해야만 소설로서 통하는 소설을 쓴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도리가 없다. 소설도 나 자신도 어쨌건 성장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 같아요. 
사라마구의 환상적 리얼리즘도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건 아닐 것이고, 박민규의 문체가 지금 볼 때 실험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단순히 재미있는 것 이상으로 만들어 주는 게 스토리 외의 서술 방식이나 조금은 배배꼬였다고 느낄 수도 있는 메타포가 아닐까 싶어요. 2009-03-06
10:19:20
  

 

병장 이우중 
  그리고 물론 문학이라는 게 꼭 스크류바처럼 삑삑 꼬아서 써야 하는 거라고는 생각지 않을 뿐더러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런 이유로 문학이 싫다고 하시는 건 이해하기 어렵네요. 그러면 무준님이 쓰신 '구회말 투아웃'은 문학이 아닌가요?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미술 작품인 것처럼 '올가의 초상(제목이 정확한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역시 미술 작품이지 않던가요. 2009-03-06
11:25:47
  

 

병장 김무준 
  위에서의 문학은 순문학입니다. 2009-03-06
12:15:31
  

 

병장 김무준 
  그리고 나는 내가 문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텍스트는 텍스트일 뿐입니다. 2009-03-06
12:16:11
  

 

상병 강정훈 
  개인적으로는 신들린듯이 온갖 알수 없는 인용과 미사여구를 동원한데다 사상자체도 '일부러 그렇게 써놓은듯한'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글들을 증오합니다. 

저에게는 물론 어렵지만, 그런 의미에서 즐거운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김무준씨의 생각에 찬성. 저도 만들수 있게 힘을 줘요. 2009-03-06
13:43:36
  

 

상병 강정훈 
  아, 그리고 저는 가지로를 외치겠습니다. 

<가지로> 2009-03-06
13:50:00
  

 

병장 이우중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네요. 그러면 무준씨는 텍스트 중의 일부는 순문학이며 일부는 장르문학, 나머지는 그냥 텍스트-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럼 대체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구회말 투아웃'은 텍스트일 뿐이라지만 굳이 끼워맞추자면 장르문학인가요?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같은 경우는 순문학인가요 장르문학인가요 아니면 어디까지나 텍스트일 뿐인가요. 그보다 순문학-장르문학을 꼭 두부 자르듯이 나눠 놓고 요건 재밌고 저건 지루해. 요건 고상하고 저건 천박해. 라고 떠들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필요보다 앞서 그런 방식의 분류가 과연 가능한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그런데, 앞서의 글들에서도 조금씩 느껴 왔던 바입니다만 무준씨가 하고자 하는 말이나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이 사실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아요. 같은 단어가 서로 다른 뜻을 품고 발화되는 것 정도의 차이가 있으려나요. 2009-03-06
14:25:57
  

 

상병 김요셉 
  저 역시도 무준씨가 순문학, 장르문학, 텍스트. 를 구분하는 기준이 궁금합니다만. 답변해 줄 수 있으신가요. 2009-03-06
15:28:36
  

 

병장 이동열 
  본문도 본문이지만은 댓글들에 더 눈이 갑니다. 그런덕에 주시하고 있던 글이기도 했는데 적절하게 댓글진행이 되고 있는 것 같네요. 저 역시도 무준님의 기준이 궁금합니다. 무준님의 말씀만 보면 박민규는 '순문학'이고 김무준은 '텍스트'인데- 난감합니다. 특히나 요즘 뉴웨이브문학이라는 말까지 나와서 더욱 혼란스럽기 짝이 없군요. 아무튼 저로서는 어떤 글이든지 먼저 재미가 선행되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단순한 유쾌함이든- 지적 희열이든- 2009-03-06
16:44:42
  

 

병장 김무준 
  지극히 주관적인 답이라도 듣고 싶으신 모양인데 조만간 텍스트로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2009-03-06
18:14:53
  

 

병장 김무준 
  답변은 달아 놓았습니다. 우석훈씨에게 다시 원고를 제출하려는 날짜가 일단 15일 이전이라 후딱 <구회 말 투아웃>을 써야하는데, 이거 영 키보드가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시놉시스 다 짜놓고 표현에 들어가질 못하다니. 에라이- 

인물들을 열명 넘게 집어넣고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텍스트를 풀려니 각종 애로사항이 꽃핍니다. 아주 만개하는군요. 집중해야 하기에 추가되는 물음에 대해서는 답해 드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2009-03-06
20:4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