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나에게 보내는 편지  
병장 김무준   2009-02-12 00:30:37, 조회: 178, 추천:0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고 청아한 선비가 되었으면 되었지, 고아한 귀족 나부랭이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지만 별로 와 닿지는 않는 군요. 나는 내가 스스로를 귀족으로 보이게끔 행동했다는 것 자체가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지금, 파시스트 또는 브루주아가 되고 싶지 않아 조심 또 조심 했음에도 노력 자체들이 헛되이 느껴집니다.

언제나 내가 옳은 것이 아니며, 내 방식은 다듬어지지 않은 소수자의 모습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늘 차이를 인지하고 갭을 인정하는 일은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썩 기분 좋은 일도 아니고요.

방구석에 틀어박히던 나쁜 습관이 도질까 염려하면서, 날로 더해가는 자기혐오를 꾹꾹 누르며 끝없는 인내심으로 나를 깎고 또 깎고 있지마는. 타인과 나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며 이해의 방법으로 텍스트가 이용될 수 없다면 과연 무엇으로, 어떠한 언어로 타인과 대화해야 하는지 묻고 또 묻습니다. 지나간 지식의 장을 펼쳐 과거와 기억과 이성을 만나 그 해법을 찾으려 애쓰지만 답이 보이질 않습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배워온 것인가. 책을 통해 만났던 과학자, 철학자, 소설가와 시인, 수필가, 지식인 그리고 음악, 영화, 사진, 그림 등 모든 것들로부터 습득한 것들이 단지 이상에서 비롯한 것들이었다는 슬픔에 빠져 하루를 또 괴로움으로 보냅니다.

당당한 기품이 서려있는 귀족이 되기보다, 불어오는 바람에 수염을 쓰다듬으며 시 한수를 읊는 선비가 되고 싶었습니다. 세상만사 허투루 받아들이며 홀로 유유자적 살아가는 나그네의 모습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타인이 보는 나와 조우한 순간 내 앞에 선 존재는, 텍스트로 지어진 성에 화려한 옷을 입고 현실을 조롱하는 귀족이자 광대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보이고자 손가락을 놀린 것도 주둥이를 놀려댄 것도 아니거늘 이 빌어먹을 현실에서 턱도 없는 착각에 빠졌던 나 자신이 부끄럽고 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구토를 애써 참으며 현실과 마주합니다. 비릿한 입맛에 쓴 물을 삼키고 현실을 수용합니다. 텍스트라는 폭력을 행사해 온 것은 아니었던가를 묻습니다. 내가 그토록 혐염하던 죽창을 든 시위대와 대체 무엇이 달랐는지 질문합니다. 나는 지식인이었던가, 괴수였던가, 무엇이었나를 고민합니다. 나는 나 자신이고 싶었고 내가 되고자 했던 자태를 갖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헛되이 느껴지는 지금 다시 책을 들어야하나 손가락을 놀려야 하나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물음이 내 안에 있듯 답 역시 내 안에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는 답들은 항상 불규칙적으로 자아에게 돌아옵니다. 계기가 순간이든 흐름이든 어떤 형태를 띠고 있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나는 몇 번이나 무너져 내리고 녹아내립니다. 나를 다시 창조해야하는지 그럼 소멸을 반복하는 내 자신을 이제 무엇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난해한 물음만이 허공을 맴돌고 차가운 밤은 깊어만 갑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18:06 

 

병장 주민호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 
언젠간 타협점을 찾게 되겠죠. 
성장한다는 것은, 
무수히 많은 내안의 또다른 '나'들을 하나씩 죽여가는 겁니다. 2009-02-12
05:19:10
  

 

상병 김요셉 
  [발췌언] 
머리가 더 이상 몸체에 의해 코드화되지 않을 때, 머리가 더 이상 다차원적이고 다성적인 몸체적 코드를 지니지 않을 때, 요컨대 머리를 포함하여 몸체가 탈코드화되고 <얼굴>이라 불리는 어떤 것에 의해 덧코드화 되어야만 할 때 얼굴이 생산된다 
(......) 
그러나 얼굴은, 이제 더 느리긴 하지만 한층 더 강렬한 탈영토화를 표상한다. 그것은 더 이상 상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을 동물뿐 아니라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지층으로부터 머리를 빠져나오게 해서, 그것을 의미생성이나 주체화의 지층 같은 다른 지층들에 연결접속시키기 때문이다. 
(......) 
또한 때때로 어떤 상황에서, 시도가 거듭 실패하더라도 기사는 검은 구멍을 가로지르고 흰 벽을 꿰뚫고 얼굴을 망가뜨리며 언제나 더 멀리 운동을 밀어붙일 수 있지 않을까? 
- 들뢰즈 / 가타리, '0년-얼굴성', <천 개의 고원> 2009-02-12
08:43:06
  

 

병장 김용준 
  삶의 순환되는 고통과 인내의 시간은 어김없이 저희를 방문합니다. 그러함에 저희는 '살고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아닐까요? 무준씨도 말했듯이 이미 답은 나왔으니 무준씨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시간인 것 같습니다... 

Ps. 자연과 술을 벗 삼아 시를 섦 선비를 꿈꾸는 1人으로써 무준씨의 글이 와닿습니다. 
'자기혐오감'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