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깨끗한 힘, 원자력.  
병장 조현식   2008-11-24 14:31:07, 조회: 200, 추천:0 

신선했던 05학번의 시작. 언제나 내 속에서는 여름이었던 강원도로 향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산을 넘다가 속이 안 좋아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내 기대와는 다르게, 버스는 산은 단 하나도 넘지 않고 춘천에 나를 내려놓았다. 그 곳에서 본 너무나도 두꺼운 눈과 두꺼운 추위와 허름한 집들. 여긴 도대체 어디야. 나는 서랍장에서 몇 년 전에 산 아주 두터운. 너무 두꺼워서 입을 생각도 않을 잠바를 꺼냈다. 아이고 추워. 이런 곳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반갑다. 특히 남자들은 의무 가입된 동아리가 있다.」


첫 동아리 소개 시간, 05학번이 역대 최악이라는 소개 속에서 나는 알지도 못하는 동아리에 이미 가입되어 있었다. 의미심장하게 이야기하는 선배의 목소리가 낯설다. 어째서 남자만 가입되어 있는 것일까? 의문만을 남긴 채, 나는 춘천이 싫어서 의무 가입되어 있다는 동아리 외에는 아무 것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 해가 시작하고 몇 개월 동안은 학생회비를 내라는 3학년 누나의 성화에 시달렸다. 등록금하고 기성회비도 다 냈는데 어째서 학생회비를 내야 하죠? 저는 학생회 주관하는 행사에 참석한 적이 없는데요. 아, 건방진 신입생이여. 선배가 내라면 내야 될 것이 아니냐. 결국 인문대학 1층 대자보에 대문짝만하게 학생회비를 내지 않았던 내 이름이 걸리고 나서야, 그리고 그 아래 ‘이름을 지우고 싶다면 학생회로 회비를 가지고 올 것’ 이라고 반 협박조의 글귀를 보고 나서야. 나는 내가 거지도 아닌데 이런 걸 마치 돈 없어서 안 냈다는 오해를 받을까 싶어 3학년 학생회 부회장 누나. 그 분을 데리고 바로 돈을 찾아 건네주고야 말았다. 대체 수업료를 안 냈어도 학교에서 이렇게 대자보로 붙이는 반인권적인 짓은 하지 않을 텐데, 이름 크게 써 놓고 지우고 싶으면 돈을 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야 안 내고 싶어서 안 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어쩔 수 없는 형편에 내지 못했던 내 동기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는 그 날 밤, 아마도 내 돈으로 학생회 여러분들이 회식을 하고 있었으리라 짐작되는 그 날 그 대자보를 떼어 학교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아직 어렸던 나의 2005년. 아직 살아있었던 나의 2005년.




이렇게 처음부터 꼬이며 시작된 나의 학교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고 지금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갑자기 04학번 선배가 낸 나와 내 동기들의 스캔들 때문에 나는 뭐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CC의 꿈을 포기했다. 술 취한 동기를 집으로 데려다 줬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별 감정도 없는 동기에게 찝쩍대다 차인 걸로 되어있었다. 술 마시고 고백한 나의 ‘05학번은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발언 때문에 여자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 우리 학과에서 나의 입지는 그저 좁고도 좁았다. 그나마 03, 04 학번 누나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나마도 ‘그녀와 사귀면 학과 생활 끝난 줄 알아라’ 라고 협박해주시는 선배 분들 덕분에 접었다. 대학교를 왔는데 고등학교 때보다 더 유치찬란하고 저급한 학과 분위기는 나를 참을 수 없게 했다. 나름대로 내가 선택해서 이 학과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여자 아이들은 선생님을 꿈꿨고 남자들은 국어보다는 음주가무에 능했다. 소설이나 시로 토론 할 수 있는 여건은 단 1%도 없었다. 그나마 토론 좀 한다는 00,01년 형들은 너무 운동R이거나 너무 보수적이어서 서로 토론으로 시작해서 주먹다짐 직전에서 끝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래도 김수영의 시를 읊으며 어깨동무하며 나서는 형들은, 남들이 보기에는 바보 머저리였을지 몰라도 우리 학과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었다.




뒤늦게, 처음 동아리 소개 날 가입된 동아리의 정체를 알았다. 이름은 원자력. 예비역들이 만든 동아리인데 조교선생님은 물론 어쩌다가는 80년대 학번도 나온다고 한다. 동아리의 서열은 당연히 군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예비군 0년차, 예비군 1년차, 예비군 2년차.. 등등 군대와 같은 계급 사회로 이루어져 있는 희한한 동아리였다. 예비군 2년차들은 1년차들은 완전 빠졌다며 도로 중앙선에 1년차들을 세워놓고 노래를 시켰다. 반동은 앞에서 뒤로~ 하나앗~ 두울~ 반동간에에~ 군가한다~ 군가제모옥~ 여기에~ 섰다~ 군가가 끝난 이후에는 학교 정문에서 후문 까지 선착순으로 달리기를 시켰다. 도대체 뭐하는 거지? 나는 낄낄 웃으며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담았다. 도대체 뭘까. 왜 이런 곳이 대학 동아리로 있는 걸까. 내 데이터베이스 안의 그 어느 학교를 검색 해봐도 이런 곳은 없었다. 한 마디로 우리 학과의 남학생들은 군대를 나와서 다시 군대에 들어가는 셈이다. 겨우 겨우 빠져나가는 것이 군대에 아직 가지 않은 사람들인데 ‘현역’ 이라고 부르고 어느 정도의 자유를 줬다. 하지만 예비군 0년차, 올해 제대한 사람들은 자비가 없었다. 나는 그 순간, 더 이상 이 학과에 대한 미련이 남지 않았다. 그래도 춘천은 아름다운 도시여서 그 작은 도시가 예쁘지만 않았다면 나는 학교를 바로 도망쳤을 것이다.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국어국문학과가 나에게 해 줄 것이 없으니 나도 국어국문학과에게 바라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2학년을 버티는 동안, 우리 학과를 나온 그나마 등단에 성공한 남자 시인이 ‘학교에서 나에게 알려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라는 인터뷰를 했다. 교수님들은 격분해서 그의 학창시절 리포트와 시집들을 꺼내 인문대 잔디밭에서 모두 불에 태워버렸다. 때마침 국립대간 통합소식이 알려지자 족보도 모르는 삼척의 한 대학교와 우리 학교가 합병될 위기인데 모두 나서자고 하며 교수님들은 광장에 컨테이너를 세우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래저래 바쁘시군요 교수님. 그런데 왜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S대와의 합병 루머 때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컨테이너를 아무리 두드려봐도 문은 열리지 않는 것이 아마도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최고로 나에게 유용한 소식은 내가 군대에 가기 직전에 찾아왔다. 그동안 궁금했던 예비역 동아리 ‘원자력’의 1급비밀 - 이름의 유래를 알게 된 것이다. 


「현식아 들었냐? 원자력의 유래.」

「궁금했었는데.. 유래가 뭔데?」

「원초적인 자X의 힘. 줄여서 원자력.」

「..........」





나는 그 이름을 듣고 미련 없이 군대에 들어왔고, 참으로 애석하게도 선진 병영문화 정착과 함께 밖의 군대인 원자력도 와해됐다는 소식이 편지로 들어왔다. 너무나 애석한 나머지, 웃음이 나왔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4:06:15 

 

병장 김동훈 
  재밌네요. 국문학 전공이신가봐요. 2008-11-24
14:46:35
  

 

병장 정영목 
  제 대학 생활은 좀 느슨한 분위기였는데 글을 읽으니 사뭇 다르군요. (허헛..) 저 같아도 환멸을 느꼈을 듯. 

복학하고는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2008-11-24
14:50:34
  

 

병장 김민규 
  허허, 청정에너지 원자력의 특성과 활용에 대해서 현식님 특유의 학식으로 풀어 주실 줄 알았더니 그보다 더한 것이 들어 있었군요. 
왜 그토록 고대하던 사회로 돌아간 이들이 이곳에서의 악습에 향수를 품고 상아탑에서 그것을 내리물림하는걸까요. 그나마도 이제는 지나가버린 옛 이야기가 되었겠지만. 

오히려 제가 다니고 있는 학교는, 그런 '전통'들이 너무도 희미한 나머지 콩가루, 내지는 모래알로 불리니깐 말이죠. 군기를 안 잡아서 그런건가요? 그렇담 학교로 돌아간 후 그 랭크의 상층부를 선동하여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해야 할 것인지요.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이것저것 돌아볼 여유를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 과거의 악령들과 조우하니 어디에 초점을 둬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대학다운, 상아탑다운 지성과 토론의 모습은, 그저 공상에 불과한 것인지요.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08-11-24
14:52:01
  

 

병장 김우열 
  하하하. 
정말 즐거운 글이군요. 

잘 읽었습니다.(웃음) 2008-11-24
15:07:27
  

 

병장 이동석 
  전 서울쪽에서 신입생 생활하다 낙향해서 전남대로 다시 신입생 생활을 했는데, 현식님과 체험이 묘하게 겹치는군요. 

처음엔 지방대 다니는 친구들과 이야기 하면서 나라면 뒤집어 엎었을꺼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막상 제가 그 처지에 놓이니 뒤집어 엎기는 커녕 정나미가 떨어지고 저도 대학의 궤도에서 나가떨어져버린 그야말로 명왕성이 되버렸습니다. 작년에 쓴 글이 있는데, 한번 올려봐야겠네요. 

전 아직도 신입생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이나 여기 주민분들의 글을 볼때마다 기묘하게 가슴 한구석이 쓰립니다. 2008-11-24
15:34:06
 

 

상병 이준혁 
  원자력이란 단어를 보고 환경적인 논의가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며 글을 읽어보았지만, 마지막 원자력의 뜻의 서스펜스가 척추 4,5번뼈를 자극하는 군요. 괜찮았던 허리가 더 아퍼집니다. 원초적인 줏대의 힘이라..... 있는 그대로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문장인데 왜이렇게 웃기죠(웃음웃음) 

글의 내용을 보니, 막연히 동경을 하던 어릴적이 생각나는군요. 자유로움과 책임감을 등에 지고 살아가야하는 밀림 탐험가의 첫 걸음마였는데, 막상 동경했던 것들을 찾아보려하니 그보다 납득이 안가는 부조리함들이 오감을 자극하고 덥쳐 오더랍니다. 정글은 호락호락하지 않더군요. 덕분에 어릴적 어미 젖을 차기하기 위한 경쟁보다 사냥감을 포식하기 위한 경쟁이 더 치열하다라는걸 깨닫게 되었죠. 당연한 수순인가요? (웃음) 2008-11-24
17:12:31
  

 

병장 정병훈 
  과연 지금의 마음이 저녁밥을 먹고 변하지 않을까요. 휴- 그냥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이에요. 2008-11-24
20:12:16
  

 

병장 김낙현 
  학과전공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점 말고 지금의 우리나라 대학교가 갖는 의미는 뭐가 있을까요? 2008-11-25
00:51:38
  

 

병장 고동기 
  그런 일이 있었군요. 2008-11-25
08:25:59
  

 

병장 박성훈 
  대학교가 직접적으로 수업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크지 않다고 봅니다. 

단지 사람이 있을뿐이지요 2008-11-25
09:3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