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기륭의 1000일
병장 이동석 [Homepage] 2008-12-13 20:09:25, 조회: 193, 추천:1
기륭의 1000일
‘지난 세월 참 고단했다’ 푸념이라도 했더라면 조금은 덜 미안했을 것을, 대안이라는 말, 타협이라는 말, 실리나 실용이라는 말을 앞세워 ‘이 정도면 됐다’며 싸움 접자던 사람들의 말이 ‘사무쳤다’ 했더라면 덜 부끄러웠을 것을. 잊지 않고 찾아와줘 고맙다며 반갑게 맞이해주어서, 많은 이들 때문에 행복한 싸움을 하고 있다며 환히 웃어주어서 더욱 미안했다. 도망치듯 농성장을 나서며 한참을 울었다. 서러웠다. 울면서 투쟁할 순 없지 않냐던 그네들의 웃음이. 서러웠다. 1천 일이 되기 전에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며 싹둑 자른 머리카락이. 서러웠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끝 모를 투쟁이. 참 서러웠다.
200명 싸움은 10여 명으로
매출 1700억원, 당기순이익 220억원이라는 중소기업 기륭의 신화는 파견 노동자들의 눈물과 한숨 위에 세워졌다. 생산직 직원 300여 명 중 파견직 노동자만 250여 명이건만, 회사 쪽은 파견직 노동자들을 투명인간 취급했다. 눈길은 고사하고 인사조차 받지 않았다. ‘남의 집 살이 간, 쓸개 다 빼고 하는 것’이라 다독이며 일해도 월급은 최저임금 기준보다 겨우 10원 많은 64만 1850원에 불과했다. 매달 70~100시간의 잔업과 특근을 마다하지 않고 일했지만, 여성이기에, 파견직 노동자이기에 월급봉투는 항상 남성보다, 정규직보다 얇았다. 기혼자는 출산 때문에 3개월, 미혼자는 결혼 때문에 6개월짜리 계약서를 받아들어야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버티고 싶었던 건,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는 열심히도 잘랐다. 건의사항을 말했다고 해고했고, 아파서 병원에 간다고 해고했다. 오늘은 무사히 보냈다며 특근까지 마치고 회사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휴대전화 문자로 ‘더 이상 나오지 말라’며 해고를 통보했다.
그렇기에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시작한 건 선택이 아니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자신이 일회용 소모품이 아님을,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2005년 7월에 시작된 싸움은 세번의 봄을 지났다. 공장 점거부터 단식, 삭발, 농성, 삼보일배까지 해볼 건 다 해봤다. 회사 철문에 쇠사슬로 몸을 묶어보기도 했고, 구조물에 올라 고공시위도 해봤다. 구사대에게 머리채를 잡힌 것도, 고소와 고발, 손해배상 소송을 당해 경찰서와 법원을 드나든 것도 수십 차례.
어설펐던 팔뚝질이 익숙해지고 입 안에만 맴돌던 구호가 씩씩해지면서, 힘겨운 투쟁도 웃으며 맞이할 수 있는 투사가 됐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진 게 없다. 회사는 요지부동이고, 200명으로 시작한 싸움은 10여 명으로 줄었다. 회사 쪽의 회유와 협박, 휘청거리는 삶의 무게에 많은 이들이 떠나갔다. 미안해서 차마 ‘어렵다’는 말, ‘오늘이 마지막’이란 말도 못하고 철야농성까지 다 마치고 작별인사도 못한 채 떠나간 사람들. 때로는 섭섭하기도, 아쉽기도 했지만 들리는 소식에 콧등만 시큰해진다. 대부분 구로공단의 또 다른 사업장에서 죽어라 일하고, 해고당하고, 내쳐지기 때문이다. 해서 싸움을 멈출 수가 없다. 사람답게 일하고 사람처럼 대우 받는 것이 정의이기에, 우리마저 물러서면 다른 노동자들의 희망이 꺾이기에, 기륭은 오늘도 싸운다. 그렇게 KTX 승무원들이 800일을 싸우고 있고, 그렇게 뉴코아•이랜드 여성노동자들이 300일을 훌쩍 넘기며 외롭고 참담한 싸움을 계속한다.
무한경쟁, 우리는 무엇과 싸우나
하지만 그들은 또한 우리와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변에 노동자 한 명, 비정규직 한 명 없는 이 없건만, 바로 그 자신이 그러하건만 남의 일처럼 터부시하는 우리와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한경쟁의 시대, 내가 이기지 못하면 죽으니 피도 눈물도 없이 뛰어야 한다는 개똥철학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안 될 거라는 패배감, 나라도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며 질끈 눈감아버린 이기심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대보단 정책과 대안을 운운하며 관전평만 내놓는 운동 사회와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투쟁이 한창일 때 밀물처럼 밀려들다 한순간 썰물처럼 빠져나와 무용담처럼 읊조리는 나의 식어버린 열정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물을 닦고, 마음을 새로이 다진다. 다시금 싸울 게다. 세상은 내가 변해야 달라지니, 이제 그들의 고통이 아닌 동지가 되어 함께 나설거다.
동참하시라! 혁명에, 새 세상에.
유해정 (인권 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한겨레 21 제 711호 (2008.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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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로부터 수개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들은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이 글 자체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긴 말은 않으려고 했습니다. 저도 못하면서 말로만 남을 가르치려고 들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거 하나만은 분명하다는 말은 해야겠습니다. 본문에 나왔듯이 주위에 노동자 없는 이 없고, 알바를 포함한 비정규직 없는 이도 없습니다.
당신이 영위하는 삶이 저 따위 노동자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롤스로이스를 몰며 몽블랑 만년필로 서명을 하며, 아르마니 수트를 입고 다니는 것이라 해도, 묻겠습니다. 그 것들중에 온전히 당신에 의한것이 있습니까? 당신과는 관계'없는' 이들이 없어진다면, 당신은 롤스로이스 바퀴라도 만들수 있습니까?
이건 어쩌면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물론 당장에 뛰어가서 팔둑질을 하라는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중 대부분은 노동자가 될겁니다. 우리나 주위의 누군가는 비정규직일겁니다. 그저 이 땅 어딘가에서 투쟁을 하는 사람이 있다-정도만 아는것조차 무리일정도로, 우리는 무한경쟁해야합니까?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8:49:45
상병 김지웅
뭔가 가슴속에서 울컹이는 무언가가 느껴지는데, 할 말은 정작 없군요,
정작 나도 무관심했고, 앞으로도 나먹고 살기 바뻐 무관심할테니 말이죠, 2008-12-13
20:16:24
상병 김무준
대한민국이 일 퍼센트를 뺀 나머지 구십구 퍼센트의 이십대들은 가방 끈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좌파 우파에 상관없이 겁에 질려 있어요. 이것이 아이들을 관통하는 딱 하나의 코드인 것 같아요. 이를테면 비정규직 사업장 같은데 가보면 진보신당이나 민노당 애들 같은 경우에는 이러다가 영원히 나가떨어지겠지 하는 식의 공포감에 질려있고, 그렇다고 토익점수가 구백점이 넘고 확실하게 대기업에 갈 수 있는 애들은 겁에 안 질려있느냐면, 나보다 잘난 놈이 있겠지, 나보다 시집 잘 가는 애가 있을 거야, 나보다 더 예쁜 여자를 차지할 수 있는 잘난 놈이 있겠지. 이런 식의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사실은 부모 세대에게 계속 주입을 받은 욕망이거든요. 실제로 자기 욕망이 없고 아이들을 계속 초조하게 만드니까…… - 김현진 '청춘의 종언' 中
젠장. 2008-12-13
20:59:54
병장 김민규
아무리 인용이라지만, 센데요.
그건 그렇고 이건 뭐 어떻게 해야 좋은건지. 1등도 꼴지도(석차제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숫자의 배열상) 공포감으로 살아가는 세상.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은 '노력의 부족'이라고 말하는 사회의 말을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기며 내면화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는군요. 잠이 오려나 모르겠습니다. 2008-12-13
22:39:48
상병 양동민
루트는 세가지입니다.
공포감에 질려 자멸하거나
공포감을 극복하거나
공포감을 무시하거나.
... 저는 삼자네요. 킥킥. 2008-12-13
22:51:36
병장 문두환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 어느새 텅 빈 거리여
칠흑같은 밤 /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2008-12-13
23:47:53
병장 이동석
두환/ 예전에 그 노래를 부르는 13살 많은 누나(?)에게 반했었습니다. 껄껄.
생각이 많아집니다. 2008-12-14
00:13:43
병장 문두환
/동석
저는 동석님이 올린 이 글 때문에 잠이 오질 않습니다. 이제 어쩌실 건가요?
200명으로 시작한 싸움이 10명으로 줄었다.
‘지난 세월 참 고단했다’ 푸념이라도 했더라면 조금은 덜 미안했을 것을, 대안이라는 말, 타협이라는 말, 실리나 실용이라는 말을 앞세워 ‘이 정도면 됐다’며 싸움 접자던 사람들의 말이 ‘사무쳤다’ 했더라면 덜 부끄러웠을 것을.
참 미칠 노릇이군요. 정말 참 오래 잊고 있었던 많은 것들이 갑자기 터져나와버린 느낌입니다. 행동이 정의를 가질 수는 없지만 현실에 대한 부딪힘으로 그 대안을 찾아가는 방향을 제시해 줄 수는 있습니다. 어쨌든 이 세상의 순환구조속에 뛰어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싸움이 '그들'의 싸움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2008-12-14
00:55:05
상병 이지훈
무섭습니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단지 자신의 피부를 직접적으로 해치는 것이 아니기에 그 고통을 모르고 아니, 모르는 척하고 고민없이 편하게 아무 생각없이 살까봐요..
지금까지 그래왔고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눈앞에 당장 무서운 악귀가 튀어나올것만 같은 두려움 가득하지만 눈은 뜨고 있으렵니다. 공포는 눈을 감은자에게 온다고 하잖아요...아 무슨말이지.. 2008-12-14
02:38:12
일병 김태경
제가 당근을 씹을때마다 팩스로 날라오던 일일집회신고서에 매일 이름이 올라가 있는 '기륭전자'가 어딜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알게 되네요. 얼마전에 '소통'이 화두로 올라왔었잖아요. 그들의 집회장에서 말하는 이만 있고 듣는이는 없다해도 이렇게 힘든 삶의 현장에서 노력하고 희망하는 우리, 또는 다른 누군가와는 분명 소통이란걸 하고 있겠죠? 근데 이러면 너무 감상적이기만 한건가요? 2008-12-14
08:36:25
병장 김동욱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자신이 일회용 소모품이 아님을,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얼마전 kbs 시사360(프로그램명은 불확실)을 보고 있었습니다. 홈플러스와의 병합 등으로 해서 새로 선출된 사측이 농성을 하던 이랜드 노동자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몇몇의 지도부를 제외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지도부는 이를 수용해서 나머지 분들만 복직) 그 프로의 한꼭지가 다시 직장으로 돌아간 그 분들을 촬영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 뇌리속에 선명히 박힌건 그분들의 환한 웃음이었습니다. (웃음-이라는게. 너무 형식적인 말로 들리진 않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측의 협박을 견뎌내고, 불법이라고 몰아대는 언론플레이 속에서 그들이 얻고자 한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남들이 부러워 할만한 돈, 자동차? 아니면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존경받는 일자리?
그들이 그곳으로 돌아가 가장 즐겁게, 웃으면서 한 일은 가게에서 과자나 식품들을 진열하고, 손님들이 구입한 식품들을 정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좋은 일자리decent job를 얻기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한 채로 대부분의 시간을 영어공부나 자격증을 따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그런 일자리를 구하려하는 우리들이 보기에는 어쩌면 별 전문성도 없고 자기 실현이니 그런 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는 일자리였습니다. 그들이 몇달을 시위하며, 언론의 뭇매를 맞고, 애들의 도시락도 챙겨주지 못하면서 얻고자 한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는 거죠.
그렇게 자기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권리. 내일이면 해고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 일이 자기 실현을 위한 - 자기 꿈과는 약간 벗어난 일일지라도 자기가 하는 일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권리.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몇달간의 시위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인지.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2008-12-14
17:10:36
병장 김동욱
저도 기륭전자 소식은 한겨레21이나 시사인이나 몇몇 인터넷 매체에서만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줌의 보탬도 되어드리지 못했지만) 그러던 것을 c일보에서 그 뉴스를 접할 수 있었는데, 그 타이틀은 "어떻게 한 유망한 중소기업이 과격한 노조활동으로 망가질 수 있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뭐. 2008-12-14
17:24:01
병장 이동석
씁쓸합니다.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세상은 내가 변해야 달라지니, 다른 거창한게 혁명이 아니고, 나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혁명입니다. 2008-12-14
19:50:33
병장 이동석
그들의 고통이 아닌, 우리 모두의 고통- 계속 아파할수 있게, 덜 아프게 움직일수라도 있게, 끊임없이 이를 갈렵니다. 2008-12-14
19:51:26
일병 김예찬
그래봤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어떤게 있을까, 라고 자조하지 않고 정말로 실천적일 수 있는 무엇인가 - 예를 들어서 시민적 권리의 진정한 시민을 위한 행사라던가 - 라도 찾아서 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책마을이 시민에게 시민이 아님을 강요하는 곳에서 시민적 상식을 보호할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2008-12-15
11:28:40
상병 이우중
아, 한때 제 사이코월드 배경음악이었던 청계천 8가의 가사를 여기서 볼 줄이야.. 하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비상식적인 인간이라고 낙인찍혀도 전 제가 하고 싶은대로 하렵니다 일단은. 그게 어떤 길이 되든지요. 2008-12-17
12:2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