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근대성에 관하여(+독서후기 : 한국 근대성 연구의 길을 묻다)
일병 김소망 2009-04-17 02:43:26, 조회: 103, 추천:0
1.
고·중세인들은 우월한 자아와 뒤떨어진 타자를 구분하는 기준을 '공간'에서 찾았다. 예컨대 그것은 동양에서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구분으로, 서양에서 헬라인과 바르바로이의 구분으로 표출되었다. 하지만 서구에서 '근대성'(Modernity) 개념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自)와 타(他)를 구분하는 기준은 '시간'으로 옮겨갔다. 그것은 매우 혁명적인 변화였다. '시간개념'을 바탕으로 한 구분은 기존의 '공간개념'보다 더 개방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왜냐하면 뒤떨어진 타자라도 언젠가는 자신들의 '현재'에 도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인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라는 개념이 이처럼 열린 가능성을 내포하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매우 폭력적인 성향으로 '타자'들에게 다가왔다. '근대' 역시 '공간'을 기준으로 한 야만과 문명―예컨대 위에서 예로 들었던 중화와 이적, 헬라인과 바르바로이 개념만큼이나 자기중심적인 면모를 띄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우월한 자아'라는 전제 아래 상대를 '뒤떨어진 타자'로 규정하는 기존의 스펙트럼을 벗어나지 못한 채 다만 가능성만을 열어두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열린 가능성은 '자아'의 '타자'에 대한 폭력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헤르만을 중심으로 뭉친 게르만족을 정벌하려던 로마인들의 시도가 무산된 이후 로마인들은 라인강 이북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덕분에 게르만족은 자신들의 문화적 특질을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고, 그것은 훗날 로마 멸망 후 서양의 중세시대를 만들어낸 게르만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 때 로마인들이 게르만족 정벌을 포기한 표면상의 이유는 게르만인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의 구제불능한 야만성 때문이었다. 차라리 공간을 기준으로 한 문명과 야만의 폐쇄적 구분은 이처럼 자아와 타자의 구분을 명백히 함으로써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폭력을 통한 상대방의 멸절로 결론이 났겠지만―의외의 좋은 결과를 낳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근대성' 개념이 지닌 개방성은 도리어 상대를 '문명'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폭력을 정당화시키는데 일조하였다. 공간적 기준을 바탕으로 한 문명과 야만의 구분은 타자의 후진성과 자아의 우월성을 내적으로 재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었지만 시간적 기준을 바탕으로 한 구분은 타자에게 열린 가능성을 부여하였고, 타자의 변화 가능성을 인지한 자아는 타자의 모습이 발전된 자아의 모습과 같아야 한다는 계몽주의적 강박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따라서 근대성은 타자에게 진보라는 이름으로 자신과 똑같아질 것을 강요하는 폭력을 범할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고(주1) 위험성은 제국주의라는 이름으로 다가왔다.
2.
근대는 전근대를 살고 있었던 타자들(주2)에게 제국주의라는 칼을 들고 접근해왔다. 서구 국가와 비서구 국가 간의 실질적 파워 차이는 서세동점의 양상을 창출해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비서구 국가들은 서구의 침략에 대한 효과적 대책을 강구해내야 했다. 비서구 국가들이 서구의 침략에 대처하는 방법은 두 가지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서구의 근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제국주의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서구의 근대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구와 비서구의 실질적 파워차이가 비서구의 식민지화를 촉진시키는 현실 속에서 서구의 근대 자체를 부정하는 움직임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구 국가들이 근대적 민족국가를 이루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양상은 비서구 지역의 지식인들을 자극하여 서구적 근대에 대한 그들의 열망을 더욱 가속화 시켰다. 그들은 서구인들의 근대를 전략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비서구 지역 지식인들은 스스로 서구적 근대화 이데올로기를 내면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서구인들의 엘리트적 계몽의식과 비서구인들의 전략적 대응이 맞물리면서 서구적 근대는 세계인들에게 규범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지금의 '세계화' 역시 이러한 맥락 아래 유지되고 있다.
3.
'근대'라는 개념은 의미보다는 현상으로서, 그리고 규범적 시선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근대는 우리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룩해 내야 할, 또는 자랑스럽게 이룩해낸 대상으로서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 '근대'는 철저한 자기중심성을 지니고 있으며, 결코 몰가치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근대사', 혹은 '근·현대'에 관한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볼 필요가 있다. 근대란 무엇인가, 근대를 규범화 시키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것이 옳지 않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한국 근대성 연구의 길을 묻다"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근대성의 함정에 빠져들기 가장 쉬운 국문학자, 국사학자부터 시작해 종교학자, 그리고 이러한 연구와는 별 상관이 없어보이는 보건학 전공자까지 근대란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 있으며,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닮아가길 요구하는 근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네가 뭔데?"(물론 이 말 자체가 근대를 완전히 부정하는 멘트는 아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라거나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라는 선험적 전제에도 의문을 품고 하나하나 파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도리이다. 하물며 "근대란 좋은 것이다"라는 만들어진 전제에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으로서의 직무유기가 아닐까 한다. 이 책은 근대를 공부하고자 하는 모든 학인들에게 지금까지 이루어진 근대 연구의 성과를 알려줌은 물론이고 그것을 공부하는 이가 가져야할 기본적 자세를 논함으로써 공부하는 이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주1) 이는 어쩌면 '근대'의 또다른 요소 중 하나인 '표준화'와도 밀접히 연관될 수 있다. 가장 근대적인 것을 표준삼아 타자에게 통일성을 부여한 자아는 표준화를 부정하는 개체에 표준에 부합시킬 것을 요구하면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는 중세의 야만적 산물이라고 여겨졌던 마녀사냥이 현대에도 고스란히 재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주2) 여기에서 말하는 타자란 피식민지 민족이었던 우리 자신을 말한다. 1.의 논의와의 연결성을 위해 '타자'라는 단어를 그대로 이용하였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11:16
상병 윤현상
가지로-
잘 읽었습니다. 왜 이 글에 리플이 이렇게 안달리는지 모르겠네요. 댓글로 리플의 욕구가 모두 흡수되었기 때문일까요.
소망님의 말처럼, 근대성이 지니는 가장 위험한 요소는 '열린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능성은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시켜 버려서, 구조적 문제점을 은폐시키는데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거든요. 어떻게 보면, 근대의 모든 시스템이 그러한 구조를 통해서 굴러가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