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구회 말 투아웃  
상병 김무준   2009-01-15 07:30:51, 조회: 307, 추천:0 

소소한 일상이었다. 알랭 드 보통의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을 읽고 있었고, 이사벨에 대한 그의 감정이 학문적으로 해체되고 분해되는 과정에서 약간의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빼면 조용한 저녁이었다. 보통은 담담하고 조용하게 자신의 사랑을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기술했다. 글을 읽는 과정에서 그의 담담한 어조 때문에 슬펐다. 왜 슬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글을 읽으며 지나간 사랑을 떠올렸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거나, 혹은 그렇지 않거나. 지나간 사랑일 뿐이다. 책을 덮었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 걸어 나갔다. 광안대교가 파랗게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천천히 색을 바꾸며 밤하늘을 수놓는 다리는 부산의 명물이 됐다. 나도 한 때 저렇게 빛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백사장을 거닐어도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어둡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별로 유명하지 않아서겠지. 푹 늘러 쓴 야구모자가 애처롭기만 하다. 혹여 누가 나를 알아보면 어쩌나 쓰고 나왔건만. 갈매기가 끼룩끼룩 내 걱정을 비웃고 있었다.

지금 수술해야 합니다. 선생님 장난이시죠. 지금 한 참 시즌 중이라고요. 어깨가 고장 났어요. 에이, 저 더 던질 수 있어요. 별로 아프지 않다고요. 이보게 김군. 설령 마운드에 선들 통증 때문에 일 이닝도 버티질 못할 거야. 농담도 잘 하시네. 제 나이 이제 스물 둘이에요. 쌩쌩하다고요. 이미 많이 악화돼있어.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영원히 공을 못 던지게 될지도 몰라.

영원히 공을 못 던지게 될지도 몰라. 영원히 공을 못 던지게 될지도 몰라. 영원히 공을 못 던지게 될지도 몰라. 의사선생님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특별하지도 않은, 결정구 조차 없는 마무리 투수는 그리 특별하지 않다. 나도 알고 있다. 구단에서도 나를 붙잡아두는 건 터무니없이 낮은 몸값과 일 년 남은 계약기간 때문일 테다. 수술하면 재활에만 일 년이 걸린단다. 그럼 계약기간은 끝날 테고, 이렇다 할 성적도 내지 못한 나는 조용히 사라져야겠지. 일 년을 쉰 투수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공이나 제대로 던질 수 있을까. 나는 아직 군대도 가질 않았다. 올림픽 금메달을 따오지도 못했으니까. 올림픽에 가지도 못했으니까.

쓸쓸했다. 바닥에 깔린 모래알갱이처럼 내 인생은 보잘것없다. 널리고 널린 인생 중에 하나다. 나는 알고 있다. 수술을 해도 내 인생은 끝나고, 하지 않아도 내 인생은 끝난다. 초라하게 바닷물에 쓸려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겠지. 누가 나를 기억하기나 할까. 아무리 극성스런 부산 갈매기들이라도 패자를, 성적도 없는 유령투수를 기억할 리가 없다.

그녀가 생각났다. 만나지 못한지도 이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만나고 싶어 이 년을 노력했다. 세상은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무척이나 많다. 야구가 그랬다. 그럭저럭 롯데의 일군 선수가 될 수는 있었지만 감독님은 날 마운드에 별로 올리지 않았다. 중간계투로 몇 번을 던지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세이브도 없었고, 홈런을 맞아 팀에 누가 되지도 않았다. 내게는 던져야 할 이닝이란 게 정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어? 혹시 롯데 김군 아니에요? 누구세요. 아, 김군 팬이에요. 아… 싸인 한 장 해주실 수 있어요? 네… 펜이랑 종이 좀 주세요. 저, 아직도 기억해요. 황금 사자기였나. 결승에서 군산상고랑 붙어서 타자 전 끝에 구회 말 동점 주자 만루 상황에서 투 쓰리 풀 카운트 까지 갔었죠. 정말 가슴 졸이며 봤었는데. 그러신가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예. 괜찮아요. 그 때 왜 볼을 던진 거에요?

나는 씩 웃어주고 자리를 떠났다. 아직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우스운 일이다. 그는 나를 패전투수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이름 없는 고교의 투수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황금 사자기 결승에 올랐다. 특별하게 공이 빠르지도, 다양한 구종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동료들이 잘 해주었기에 결승까지 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패자로만 기억하고 있다. 기억이라도 하면 다행이다. 역사는 패자를 기록하지 않는다. 이순신이 전투에 승리했어도 적장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듯이.

모든 경기에 등판했다. 그렇지만 에이스는 아니었다. 꼭. 그래… 히딩크가 별 볼일 없는 팀으로 4강에 오른 것과 비슷했다. 모두가 잘 했기에 준우승이라도 할 수 있었다. 왜 구회 말 투아웃 풀 카운트에서 볼을 던졌느냐고.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묻는다. 누군가의 호기심이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끄집어내는 일이 된다는 것을 왜 모를까. 나는 피곤했다. 어깨가 부서질 듯 아팠다. 이번 공이 마지막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공을 던졌지만 어이없게 손가락이 미끄러져 볼이 빠졌다. 내 야구인생은 그 날의 공처럼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제구가 되질 않았으니까.

나야. 응. 잘 지내? 어디야. 아니, 그냥 오랜만에 보고 싶어서. 지금 나올 수 있어? 나? 광안리. 해운대로 갈까? 알았어. 그냥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이나 먹자. 응. 왜 이래, 내가 그 정도 돈도 없을 것 같아? 아냐, 미안해. 나도 모르게… 응. 그래. 거기서 보자.

오빠가 돈이 어디 있다고. 괜찮아. 두 마디에 왜 화가 난 걸까. 내가 아무리 무명투수라도 나는 롯데의 일군에서 뛰고 있는 투수다. 이 년 만에 만나는 이에게 돈이 없어 저녁을 못 살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건 아니다. 일군과 이군을 오르락내리락하니 일 점 오군 정도 될지 몰라도. 내 자신에게 화가 난 건지도 모른다. 그저 그런 내 인생. 저 다리처럼 밝게 빛나지 못하는 내 인생. 바닷가의 모래알 같은 삶이 슬퍼서 화가 난거다. 그래도 미안했다. 내 보잘것없는 인생이 그녀의 탓은 아니니까.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걱정했다. 팀은 플레이오프 진출을 앞두고 중요한 시점에 와있다. 오위인 팀과의 승차가 몇 경기 나질 않기에 한 경기 한 경기가 중요했다. 가을에도 야구하는 건 부산 갈매기들의 소박한 꿈이다. 결승전보다도 더 중요한. 그만큼 내가 마운드에 설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들었지만. 상관없다. 우리가 플레이오프 무대에 설 수 있다면 나는 만족한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플레이오프 진출에 대한 희망에 가슴이 뛰는 거다. 그녀를 만나지 못한지도 이 년이다. 전화 한 통이면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피해왔다. 부끄러웠으니까. 적어도 상 하나쯤 거머쥐고서 만나고 싶었다. 이렇게 만나고 싶었던 건 아니다. 지나간 사랑이니까. 가슴이 뛰는 건 오로지 가을에도 야구를 하게 될지 모른다는 거. 그것 때문이다.

그녀는 별로 변한 게 없었다. 그녀는 아직 학생이다. 학생들은 몇 년 사이에 많이도 크던데. 이건 그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인가 보다. 시간이 흘러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 나의 나이가 되었다. 내가 고민하던 것들을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까. 글쎄… 남자와 여자는 다를 수도 있겠다.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고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스캔들? 걱정할 필요 없다. 그건 슈퍼스타에게나 해당 되는 말이니까. 나는 평범한 남자다. 평범한 사람들은 평범한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나는 길을 거니는 수많은 연인들 중 하나로 보일 테다. 창 밖 바다가 보였다.

경기 보러 와 줄 수 있어? 시즌 마지막 경기. 나 그 경기 끝나면 수술해야 해서. 그냥 어깨 수술이야. 당분간은 공 못 던진데. 등판 하지. 그럼. 감독님이 히든카드로 날 세우겠다 하셨어. 그 날 경기 보러 올 거지? 응. 표 구해줄게. 보러와.

물론 말도 되질 않는 거짓말이다. 나는 거짓말을 잘 하지 않는다. 그냥. 내 인생의 마지막 경기를 그녀가 보러 와 줬으면 했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그녀도 용서할거다. 내가 마운드에 서지 않아도. 내 마음을 이해해 주겠지. 착각인가… 화를 내도 좋으니까. 그녀가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 마운드에 서지 못해도 이번 시즌이 마지막이 될 테니까. 더그아웃에 있는 롯데 자이언츠의 마무리 투수라도. 볼넷으로 경기에 진 바보 같은 투수가 아니라 나는 롯데 일군의 뒷문을 책임지는 마무리 투수로 그녀에게 기억되고 싶다.

사실 나 예전 일들이 잘 기억나지가 않아. 아니, 뭐 사고가 있었다거나 그런 건 아냐. 그냥 기억이 잘 나지가 않네. 병원에 가보니까 기억상실 비슷한 걸지도 모른데. 알츠하이머랑 비슷하다나. 이러다 다시 괜찮아 지겠지. 갑자기 아무 일 없이 이렇게 됐으니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괜찮아 질 거야. 정말 만약에 모든 걸 다 잊어버리면, 다시 기억하면 되지. 그냥 소소한 일 하나하나를. 별 일 없을 거야.

이것도 물론 거짓말이다. 근데, 왜 이런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순진하니까 이런 내 거짓말을 믿을 거다. 착각… 일까. 확신할 수 없다. 이년 전과는 너무도 시간이 흘렀으니까. 열아홉은 어린 나이가 아니다. 이런 우스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는 않을 거야. 그녀가 내 말로 나를 조금 더 찾게 된 들 그건 사랑이 아니라 동정이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빤 한 거짓말. 나는 정말 바보 같은 거짓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며칠이 지났다. 우리의 시즌 마지막 경기가 막 시작되려 했다. 선배들 몰래 감독님을 찾았다. 감독님에게 오늘의 마무리로 날 써 달라는 말을 했다. 감독님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이게 억지라는 걸 알고 있다. 수호신이나 다름없는 선배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내가 마운드에 설 수 있을 리가. 나는 사정을 설명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경기를 보러 온다고. 감독님도 알다시피 시즌이 끝나면 어깨수술을 해야 한다고. 내 인생의 마지막 경기가 될 거라는 거 감독님도 알지 않느냐고. 그렇게 말도 되질 않는 억지를 부렸다. 감독님은 말없이 멀리 구장에 가득 찬 갈매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될 거라는 거. 알고 있었다.

감독님은 대꾸 없이 라커룸을 나갔다. 삼만의 부산 갈매기 앞에서 경기가 시작됐다. 오위 팀과의 승차는 반 게임 차. 이 경기와 오위 팀의 경기 결과가 나와야만 플레이오프 진출이 확정된다. 오위 팀이 이기면 우리도 무조건 이겨야한다. 지면 마음이 한 결 편해지겠지만 야구는 변수가 많은 경기다. 마지막 회가 끝나기 전까지는 결과를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나는 딴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더그아웃에 앉아 그녀가 왔는지 찾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찾아왔다. 나는 나를 보고 있을 그녀를 위해 그녀가 있는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마운드에 설 수 없을 테고 그녀는 나를 롯데의 선수로 기억하겠지. 그거면 만족한다. 세월이 흘러 사랑이 변할지는 몰라도 기억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니까.

기억상실을 핑계로 나는 그녀를 떠날 거다. 어깨수술을 하고 야구를 접을 거다. 혼자 재활훈련을 한 들 어디에도 날 받아줄 팀은 없다. 군대에 다녀온 후에 내 고교 팀 감독이나 맡게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내 후배들과 함께 야구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내 바램이다. 야구를 다시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경기는 손에 땀을 쥐게 만들 정도로 재미있게 진행되었다. 물론 갈매기들의 입장에서. 우리는 숨 막힐 것 같은 긴장감에 구회 초를 맞았다. 대호형이 오른쪽 담장을 넘기는 솔로 홈런을 터뜨리고 나서야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구대 팔. 그래도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구단 관계자가 감독님에게 오위 팀이 승리했음을 전달했다.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내가 마운드에 설 수 있는 희망은 사라졌다. 눈물이 나오려했다. 곧 있으면 구회 말이 시작한다. 내 야구는 여기서 끝날 거다. 내 인생에 가장 찬란했던 시절은 결승전 구회 말 투아웃의 팽팽한 긴장의 마운드로 기억되겠지. 고개를 숙인 채 경기를 보지 못했다. 그녀가 자리에 있을까. 모르겠다. 그녀도 내가 마운드에 서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을 테다. 열아홉 바쁜 일상에 집으로 돌아갔겠지. 그래. 이거면 됐어.

몸 풀어뒀냐? 예? 몸 풀어뒀냐고. 아니요. 인마 올라가서 몸 풀어. 마무리 등판한다. 네? 저요? 그래 인마. 빨리 가서 몸 풀어. 왜 저에요? 저기 우리 수호신도 있잖아요. 그래서 올라가기 싫으냐? 아니요. 그럼 주둥이 닫고 올라가서 몸 풀어!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몇몇 선배들은 감독님이 경기를 포기하려 드는 게 틀림없다고 수군거렸다. 나도 알고 있다. 질 게 뻔하다. 타순은 이삼사번으로 시작 될 테고, 삼성의 무시무시한 타자들은 내 공을 때려 넘기겠지. 그럼 나는 볼넷으로 패배한 황금사자기의 에이스가 아니라, 롯데의 가을을 날려먹은 방화범으로 기억될 테다. 이건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공을 던졌다. 그녀는 아직 집에 가지 않았다. 나를 보고 있었다. 제기랄. 차라리 마운드에 서지 않고서 더그아웃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편이 나았다. 의사의 경고가 생각났다. 더 던지게 되면 어깨가 박살날지도 몰라. 벌써부터 통증이 느껴졌다. 세 타자를 처리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두 번째 타석에서 경기가 끝날 것 같다.

구회 말이 시작했다. 술렁이는 갈매기들의 모습이 보였다. 당연하겠지. 이렇다 할 성적도, 경험도 없는 애송이가. 어쩌면 처음 보는 녀석이 마운드에 오르고 있다. 그것도 아웃카운트 세 개를 남겨놓고서. 구대 팔.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어깨가 욱신거린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팔을 들어 올릴 수 있을까. 공을 던질 수 있을까. 감독님이 올라와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역시나. 던지자마자 이번 타자에게 얻어맞았다. 쭉쭉 뻗는 공이 밤하늘을 가른다. 나는 공을 보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았다. 씁쓸하게 웃으면서.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펜스에 맞을 것 같던 공을 선배가 몸을 날려 잡았다. 와아- 함성이 가득 찼다. 귀가 터질 것 같다. 호수비다. 선배들은 내가 마운드에 섰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았나보다.

그 때도 그랬다. 황금사자기 결승에서도 동료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팔대 팔 동점에서 구회 말이 시작되어도, 절망하지 않았다. 그들의 희망을 내가 날려먹었다. 그것도 볼넷으로. 나는 죄인이다. 공을 더 던질 수 있을까. 지금은 구대 팔. 비슷하지만 결코 비슷하지 않다.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무게감이 내 어깨를 짓누른다. 아프다. 죽을 것 같이 아프다. 공을 더 던질 수 있을까.

아웃카운트는 두개 남았다. 삼 번 타자가 타석에 올랐다. 다시 공을 던졌다. 맞았다. 낮게 깔리는 공이 일루 쪽으로 빠졌다. 이루타다. 공이 멀리도 굴러갔다. 갈매기들이 탄성을 터뜨린다. 불안하다. 다음 타자는 사번 타자다. 홈런을 맞으면 게임이 끝난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질 수 밖에 없는 경기.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공을 쥔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카메라가 내 얼굴을 잡는다. 전광판에 얼굴이 비쳤다. 찡긋. 윙크를 날리며 씩 웃었다. 객석에서는 난리가 났다. 내가 가리킨 것이 누구며 이 상황에서 애송이가 여유가 넘친다는 외침이 들린다. 상관없다.

사 번 타자가 타석에 올랐다. 이번에는 자신 있게 힘 있게 던졌다. 사번 타자라도 삼할 타율이다. 삼할 타율은 열 번 던져도 일곱 번은 맞추지 못한다는 소리다. 야구에서 투수는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고교 감독님의 가르침을 믿는다. 맞을 때 맞더라도 던진다. 맞았다. 공이 높이 뜬다. 파울 플라이기를. 제발. 제발. 제발. 내가 마지막까지 공을 던질 수 있기를. 제발.

민호형이 공을 잡더니 마운드로 올라선다. 입을 가리고 조용히 말한다. 올림픽 때도 다들 이길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 그 때 기적이 일어났어. 그리고 우리는 금메달을 땄어. 저 많은 갈매기들이 너를 보고 있어. 네게 희망을 걸고 있어. 희망을 버리지 마. 그 순간 우리는 지고 마는 거야. 있는 힘껏 던져. 잡을 수 있는 공은 다 잡아줄 테니까.

형은 달랐다. 남은 아웃 카운트는 하나. 오 번 타자가 타석에 올랐다. 더그아웃에는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하는 선배도, 방망이를 쾅쾅 찧으며 흥분하는 선배도,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감독님도 있다. 그리고 구장 안에는 삼만의 갈매기가 있다. 가을에도 야구하자는 희망이 있다. 이길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나는 그저 그녀에게 기억되기 위해 공을 던지고 있다.

초구 스트라이크- 몸 쪽 낮게 들어오는 공을 타자는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있다. 오번 타자의 얼굴과, 황금사자기 결승에서의 타자가 미묘하게 겹친다. 나는 과거와 마주했다. 포수는 그 때와 같은 주문을 했다. 던지고 싶은 공을 던져라. 제 이구 바깥쪽 볼. 원 앤 원. 감독님이 무슨 생각으로 나를 올렸는지 알 수 없다. 감독님의 얼굴이 보인다. 제 삼구 다시 바깥쪽 볼. 원 앤 투.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는 걸까. 제 사구 이번에는 몸 쪽 볼. 원 앤 쓰리. 포수는 여전히 던지고 싶은 공을 던지라 말한다. 어깨가 움직이질 않는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줘. 두 개. 두 개만 더 던질 수 있게 도와줘. 앞으로의 내 삶에서 두 개의 공을 더 던질 수 있을지 모르잖아. 지금이 마지막이라면 두 개만 더 던지게 해줘.

제 오구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는 볼이다. 어떻게 될까. 심판은? 몸이 말하고 있다. 공을 더 던질 수 없을 것 같다. 제발. 다음 타자가 나온다면 나는 마운드를 내려가야만 해. 마지막 남은 희망을 버릴 수는 없어. 여기서 끝내게 해줘. 스트라이크- 투 쓰리 풀카운트. 구회 말 투아웃에 주자는 이루. 투 쓰리 풀카운트다.

그 날의 결승전에서 내 어깨를 짓눌렀던 건 피로가 아니라, 모두의 희망과 기대였다. 나는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고교 감독님의 말이 떠오른다. 투 쓰리 풀카운트에서 유리한 것은 투수다. 타자는 무조건 배트를 휘두를 수밖에 없다. 어떤 타자도 타석을 걸어서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그러니까, 스트라이크. 배트를 휘둘러야만 하는 공을 던져라. 가르침대로 마지막 공을 던졌다. 이제 더는 던질 수 없다. 팔이 덜렁거리는 기분이다. 제발. 치지 말아줘. 공이 배트에 맞았다.

감독님의 말이 생각났다. 감독님은 마운드에 나를 세우며 말했다. 길게 말하지도 않았다. 희망을 던져라. 그 뿐이었다. 이겨라. 네 마지막 경기에 너를 세웠으니 잘 해봐라. 이런 말들이 아니었다. 희망을 던지란 말이 생각났다. 공이 날아온다. 빠르게 날아온다. 저걸 잡을 수 있을까? 손을 뻗는다. 몸을 날린다.

투 쓰리 풀카운트. 제 육구 던졌습니다. 아 맞았습니다. 뻗어나가는 공.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았습니다! 믿기지 않습니다! 투수가 믿을 수 없는 높이로 뛰어올라 뻗는 타구를 잡습니다. 아웃. 아웃입니다. 경기 끝났습니다. 롯데가 삼성을 꺾고 가을에도 야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삼만 부산 갈매기들의 염원이 이루어 졌습니다.

나는 바보였다. 공을 잡는 것만큼이나 잘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까먹었다. 땅에 떨어지며 팔꿈치부터 마운드에 닿았고, 체중이 실려 어깨 쪽을 무언가 뚫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공은 손에 있었다. 이거면 됐어. 나는 해냈어. 삼년 전의 내가 해내지 못했던 걸. 나는 해냈어. 의식이 점점 흐려지고. 나는 그녀가 있을만한 방향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롯데는 플레이오프에 올라 삼전 전패로 가을의 야구를 마무리했다. 그래도 롯데 팬들은 신이 났다. 내년에도 야구를 할 수 있다는 희망에 가득 찼을 게다. 감독님이 나를 마운드에 올린 이유를 알았다. 수호신처럼 뒷문을 지켜주던 선배가, 나를 믿어보자 했단다. 야구는 확률게임이지만 가끔은 예기치 못한 변수가 작용한다고. 그녀는 의식이 가물가물한 내 옆에서 나를 지켰단다. 나는 그녀의 속삭임을 들었다.

내가 기억을 잃어 소중했던 모든 것들을 잊게 된다면, 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녀가 나를 기억해 주겠노라고. 그녀가 나의 기억이 되어 주겠노라고.

나는 해야만 하는 일이 무척이나 많다. 근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눈을 떠야하는데 눈이 떠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떨어지면서 어깨만 다친 줄 알았더니, 목뼈가 부러지면서 두 번 다시 야구를 할 수 없는 몸이 아니라, 두 번 다시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었단다. 그래도 나는 믿는다. 구회 말 투아웃에서 기적은 일어났다. 모두의 희망이 닿아, 꿈을 이루었다. 나는 아직 할 일이 많다. 야구는 구회 말 투아웃부터 시작이다. 기적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 그녀에게 말해야지.

사실은 뻥이었다고.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4:01:45 

 

병장 정병훈 
  이거, 좋은데요? 2009-01-15
07:57:52
  

 

일병 송기화 
  사실은 뻥이었다고. 
하, 무지무지무지 찡하네요. 2009-01-15
08:00:59
  

 

상병 이석재 
  허허허. 이러시면 난감합니다.허망해요. 2009-01-15
08:06:58
  

 

병장 장지훈 
  아...이 카타르시스는 무언가요? 무준님의 이런 문체때문에 온몸에 닭살이 돋아나네요. 
사랑해요. 무준씨 빨리 더욱 많은 글을 토해내주세요. 2009-01-15
08:15:45
  

 

병장 정병훈 
  독촉인가요. 흐흐흐 2009-01-15
08:17:49
  

 

일병 조영준 
  우리는 작가가 김무준 씨였다는 것.. 그리고 화자가 김 군이었다는 것에.. 

낚인 것 같습니다.. 2009-01-15
08:20:58
  

 

병장 이동석 
  요오- (괴음) 2009-01-15
08:42:39
 

 

병장 김민규 
  단 하루도 부산에 살았던 적은 없지만 언제나 마음의 고향으로 삼았고, 실제로도 본적지라 그렇게 적어 냈었던, 한 번도 사직구장에서 갈매기가 되지 못했지만 가~르시아에 전율했었던 한 사람으로, 감히 외쳐 봅니다. 

가지로 2009-01-15
09:32:33
  

 

상병 차종기 
  몇번이나 쉬면서 읽었습니다. 한 번에 다 읽기엔 너무 벅찬 무언가가 있어요, 
후우 , 무진님(..)이 아니라 무준님은 글은 정말, 구회말 투아웃 주자 만루에서 
들어오는 몸 쪽 꽉찬 직구 같군요.아- 물론 스트라이크 입니다. 2009-01-15
09:34:53
  

 

상병 김형태 
  저도 손과 눈을 부비부비하며 읽었습니다 
아침부터 긴 글 읽을라니 눈이 피곤해 하는것 같네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2009-01-15
09:58:57
  

 

병장 안재현 
  왠지 모르게 촛불이 그냥 머리속에 떠올랐습니다... 이건뭐죠....? 2009-01-15
10:52:05
  

 

병장 이우중 
  오오- 원고지 50매 분량쯤 되는 것 같은데 한 호흡에 쭉 읽히네요. 
좋아요. 허허허. 잘 읽었습니다. 2009-01-15
11:40:15
  

 

상병 이동열 
  허허 롯데팬인 저로서는 안 읽을수가 없군요(웃음) 
고인이 되신 박동희의 직구가 생각납니다(땀) 잘 읽었어요. 2009-01-15
13:22:43
  

 

병장 이창섭 
  '두 번 다시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었단다.' 

임수혁 선수가 떠올라 살짝쿵 찡해집니다. 2009-01-15
14:13:35
  

 

책마을 
  상병 권 찬 
냐하... 울다가 웃으면 거기에 털나는데(이모티콘) 2009-01-15 
09: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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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 나셨나요? 2009-01-16
06:41:21
  

 

병장 김동균 
  저는 글을 끝까지 다 읽지 않았으므로 패습니다 - 키킥 2009-01-17
09:52:44
  

 

병장 이동석 
  거대한 서사의 시작이니까, 

가지로- 2009-01-21
21: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