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개 같은 취미  
병장 김무준   2009-04-16 23:22:20, 조회: 356, 추천:0 

사촌형님은 90년대 초반에 컴퓨터를 장만했다. 1)MS-Dos로 깨작대는 형식의 컴퓨터였다. 386이랄까. 형님은 나이가 다섯 살인가 여섯 살인가 많았는데, 굉장히 일찍 컴퓨터를 접한 사람이었다. 부산에 있는 형님 집에 갈 때면 어김없이 컴퓨터는 어린 내 차지가 되었고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았던 때에 독스나 심슨패밀리 따위의 게임을 접했다. 게임들은 2)3.1in 플로피 디스크에 발매가 되던 시절이었다. 큰아버지 댁은 정말 말 그대로 천국이었다.

우리 집은 터무니없이 가난했고 그 흔한 3)패미콤조차 없었다. 뭐, 그때 가정용 게임기가 흔했던 때는 아니었지만. 여덟 살 쯤에 아버지가 패미콤과 비슷한 게임기를 사주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아들놈이 친구랑 앉아 게임을 하다 욕을 한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게임기를 망치로 때려 부셨다.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부산의 친척 댁이나 친구들 집에 가야만 했다.

구십 년대야 게임기 없어도 놀 것이 엄청나게 많던 때였다. 한창 도시화중인 농촌에 살았기에 놀 곳은 정말 많았다. 개천이며 산과 들을 달렸다. 시간은 휙휙 지나갔다. 초등학교 삼학년 무렵에 스타크래프트가 나왔다. 근데 그게 뭔지도 몰랐다. 게임 말고도 할 건 엄청 많았고 4)플레이스테이션 따위를 살 돈도 없었으니까.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집안에는 여유가 생겼고, 컴퓨터도 하나 장만했다. 삼백만원이 넘는 돈을 주고 산 최신식 컴퓨터였다. 사촌형님 덕에 각종 불법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바야흐로 산과 들을 졸업하고 디지털 시대에 발맞추어 모니터 앞에 앉는 시기로 넘어온 거다. 각종 5)와레즈 사이트에서 6)리볼트나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피파시리즈 등등 별 게임을 다 다운받아 즐겼다.

중학생 무렵에는 온라인 게임 시장이 폭발하면서 무수히 많은 게임들이 쏟아졌다. 맹세코 그 무렵에 나왔던 7)MMORPG는 다 해봤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8)바람의 나라, 9)어둠의 전설, 10)일렌시아 등등 넥슨의 게임들부터 11)스톤에이지, 12)릴, 13)카르마 등 장르를 불문하고 새벽이면 방문을 잠가놓고 열심히 게임을 즐겼다. 물론 공짜게임 위주로.

이렇게 말하면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중학생 때, 게임에 깊게 빠지지는 않았다. 집집마다 다르겠지만 집안은 굉장히 보수적이었고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부모님께 얻어맞았다. 맞기 싫어서 하질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이 풍비박산 났고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컴퓨터는 바뀌지 않았다. 빚더미에 올랐던 지라 취미생활에 돈을 쏟을 여유도 없었다. 아들놈의 정신적 스트레스가 하늘을 찔렀던지라, 이놈이 술을 처먹던 밤새 게임을 하던 티비를 보던 부모님의 제제는 급격하게 줄었다. 구형 컴퓨터를 열심히 돌렸다. 14)라그나로크 프리서버를 뚫어내기도, 15)TNT2 그래픽카드에 펜티엄 3 550mhz로 리니지 2를 돌리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기숙사에서 살았던지라 게임을 할 시간은 더 없어졌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게임을 많이 했다싶었는데, 그렇게까지 몰두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어쨌거나 아홉 살 위의 외삼촌이 직업군인을 하다 제대를 했고, 끝내주는 컴퓨터를 장만했다. 한창 16)Wow나 17)스페셜포스 따위가 인기를 끌던 때였다. 삼촌은 군인출신답게 18)FPS 게임을 즐겼고, 고등학생 조카를 데리고 심심하면 피씨방을 찾아가 총질을 해댔다. 19)마비노기는 덤이랄까.

아가씨들을 좋아라했지만 돈이 없어 데이트를 즐기지는 않았다. 술도 좋아했지만 나이가 나였기에 죽어라 마시지도 않았다. 돈이 들지 않는 취미생활은 게임이었다. 마침 삼촌이 스폰서 역할을 해주었기에 스페셜포스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형 동생처럼 지냈던 삼촌이기에, 죽이 엄청 잘 맞았고 스포를 통해 우애를 다졌다.

20)클랜 시스템이 생기면서 삼촌과 클랜에 들었고, 각종 컨트롤을 연마해 클랜전에 뛰어들었다. 클랜랭킹이 4위 쯤 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스포에서 클랜전 하면 무조건 21)3대 국민맵이었는데 클랜은 렉으로 악명 높은 22)트레인에서 위명을 떨쳤다. 주말만 되면 삼촌 집으로 넘어가 총질로 밤을 샜다. 밥도 먹질 않고 게임만 했다. 1:1에서는 거의 적수가 없었다. 방송대회 팀원과 붙어도 지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다 게임회사와 피씨방들의 이권다툼으로 대세는 스페셜포스에서 23)서든어택으로 넘어갔고 은둔고수의 자리에 올랐었기에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게임을 접었다.

패키지 게임으로 눈을 돌렸다. 24)콜 오브 듀티나 25)메달 오브 아너 같은 FPS게임을 하다보니 피파시리즈가 온라인으로 나왔고, 26)위닝일레븐 매니아였기에 당연히 피파로 갈아탔다. 한동안 공만 찼다. 열심히 공 차다보니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돈을 벌게 되었으며, 돈 없어서 못하던 와우를 다시 잡았다. 월급 모아서 컴퓨터를 장만하고 계정비를 넣었다. 때로는 27)얼라이언스로 때로는 28)호드로 29)PvP를 해댔다. 죽어라 했다. 가난에 대한 분노의 마우스질이랄까. 내 돈으로 게임할 수 있다는 마음에 눈물의 게이밍을 했는지도.

초등학교 입학 전에 30)독스를 접하고 31)GTA로 각종 범죄를 저지르고, 총질을 해댔어도 심성은 착하게 자라났다. 정말이다. 한 번씩 죄다 뒤집어 엎어버리고픈 충동을 느끼기는 해도 그걸 실천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온라인에서 숱한 욕을 배웠어도 입 밖으로 내밀지 않는다. 건전한(어딜 봐서) 대한민국 청년이 되었고 성실하게(라고 쓰고 ‘가라’라고 읽는다) 군 생활에 임했다. 모모씨처럼 전방에 수류탄을 깐 일은 없단 말이다. 하는 짓이 계집애 같다고 욕을 먹었어도 여전히 잡지를 스크랩해대고, 웬만한 장르소설은 모르는 게 없어도 환상소설과 안녕을 선언했다. 마룬 파이브, 니켈벡, 힌더, 화나, 이그니토, 딥 플로우, 샤이니, 백스트리트 보이즈, 서태지, 요조, 허밍어반스테레오 등 잡식성 음악취향을 가졌다. 참으로 건전하지 않은가?

케이블 채널을 돌려 철 지난 영화들을 본다. 셰바의 부활을 바라며 인자기의 포스에 감동하고, 발렌시아의 재정난에 혹여 비야나 실바를 팔지는 않을까 가슴을 졸이며, 박지성이 골을 넣나 못 넣나 눈을 부라린다. 롯데의 경기에 울고 웃으며 시도 때도 없이 소리를 지른다. 소녀시대 롱다리 수영에게 뺐타고 원더걸스 유빈의 후덕해진 몸매에 눈물 흘린다. 게임이고 독서고 음악 감상이고 축구고, 우리는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해 아련한 동경을 품는다. 가슴 속 깊은 곳의 욕구를 풀고자 자위를 해댄다. 칼질과 총질은 아무런 힘없는 소시민의 발악이 아니었을까.

쩝.




1)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므로 생략. (그럼 주석을 왜 달았냐고)
2)이제는 사라진 플로피 디스크. 3.1이 정확히 맞나 모르겠다. 예전에는 종잇장 같은 디스크 수십장에 게임을 넣어 팔곤 했다.
3)팩을 끼우고 하는 가정용 게임기. 마리오를 떠올리면 된다.
4)소니의 가정용 게임기. CD를 넣고 돌리는 게임기였다.
5)크래킹을 통해 불법으로 게임이나 소프트웨어를 복제하고 게시하는 사이트. 최근에는 그 수가 급감한 것으로 알고 있다.
6)장난감 자동차들로 경주를 하는 카트라이더 비슷한 게임.
7)다중접속 온라인롤플레잉게임. 대충 넘어가자.
8)기억하기로는 세계 최초의 MMORPG 게임일 거다. 넥슨작.
9)바람의 나라와는 달리 중세 유럽풍을 배경으로 하던 MMORPG. 넥슨에서 서비스 중이다. (여전히?)
10)독특한 게임성이 있던 유럽풍의 MMORPG. 넥슨에서 서비스 중이다. (이것도?)
11)쉽게 설명하면 포켓몬스터의 공룡버전 MMORPG. 공룡을 잡아 키우는 재미가 쏠쏠했다지.
12)콘솔게임과 같은 플레이 방식을 자랑하던 중세 유럽풍의 MMORPG. 개발당시 리니지를 때려잡고 최고의 게임이 될 거라는 평이 있었으나, 주구장창 욕을 먹고 현재는 서비스를 중지했을 테다. (몹을 때려잡을 때의 손맛이 끝내줬다)
13)세계대전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온라인 슈팅 게임. 드래곤플라이작. (요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14)동명의 원작만화를 게임으로 옮긴 유럽풍의 MMORPG. 해외에서의 크래킹으로 프리서버가 난무해 엄청난 손해를 봤다. 그라비티작.
15)GeForce 그래픽카드로 유명한 nVidia의 예전 그래픽카드.
16)World of Warcraft. 워크래프트 시리즈를 온라인 게임으로 옮긴 MMORPG.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최고의 MMORPG다. (한국에서는 힘을 영 못쓰지만)
17)카르마의 후속작으로 드래곤플라이에서 개발했다. 현대전을 배경으로 한 1인칭 슈팅 게임. 시장을 지배했지만, 피씨방과의 줄다리기에서 욕을 먹고 서든어택에 왕좌를 내줬다.
18)간단히 말해서 1인칭 슈팅 게임이다. 울펜슈타인이나 스포, 서든, 아바 따위의 장르.
19)오타쿠 게임으로 악명이 높은 유럽풍 MMORPG. 카툰랜더링으로도 유명하다. 데브캣작.
20)FPS 게임들의 길드를 클랜이라 한다.
21)상하이, 미사일, 트레인. 공수 밸런스가 잘 맞고 맵 구성이 좋아 사람들이 제일 즐기는 맵이었다.
22)기차역을 배경으로 하는 맵. 스포 3대 맵이었으나, 렉이 엄청나게 잘 생긴다는 최대의 단점이 있었다.
23)세 명의 개발자가 만들었다는 FPS게임. (요즘 대세다. 떼돈 벌었다.)
24)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패키지 FPS게임.
25)콜 오브 듀티와 마찬가지다.
26)피파시리즈와 함께 시장을 두 쪽으로 나누는 축구게임. 현실에 가까운 게임플레이를 추구한다. 코나미작.
27)와우에 등장하는 동맹. 인간, 드워프, 노움, 나이트엘프, 드레나이의 연합이다.
28)와우에 등장하는 동맹. 언데드, 오크, 트롤, 타우렌, 블러드엘프의 연합.
29)MMORPG에서 플레이어 vs 플레이어를 지칭하는 용어.
30)MS-DOS에서 할 수 있던 슈팅게임. 2D화면에서 특수요원이 총질을 해대고 사람을 죽여 돈을 모으는. 미취학 아동이 하기에는 심각한 게임이었다.
31)그랜드 데프트 오토. 갱단의 세력다툼을 그린 자유도 높은 슈팅게임. 각종 강력범죄를 무차별적으로 저지를 수 있기에 국내에는 한동안 수입되지 못했다.





뱀발. 게임관련 기사를 다섯시간 째 읽고 있어서 생산한 텍스트는 결코 아님.
뱀발 둘. 따지고 보면 깽깽이도 게임 쪽으로는 오타쿠급(?)
뱀발 셋. 그래도 미연시나 십구땡은 취급 안합니다.
뱀발 넷. 엑박을 살 것인가, 플삼을 살 것인가, 컴퓨터를 장만할 것인가, 타투를 싸지를 것인가.
뱀발 다섯. 문제는 돈이 없다는 거.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22:31 

 

병장 이찬휘 
  뱀발 셋. 미연시나 십구땡은 취급 안합니다. 에서 살짝 웃었습니다. 

뱀발. 믿어드리겠사와요. 2009-04-17
07:17:31
  

 

상병 김태완 
  샤이니에서 움찔. 2009-04-17
07:28:28
  

 

병장 이동열 
  이제는 사라진 그 플로피디스크는 5.25인치가 아닌가 싶네요. 
그나저나 무준씨 낼 뵙는거죠? 깔깔 2009-04-17
07:55:17
  

 

병장 김형태 
  무준씨의 자전적 글은 항상 가슴아픈 얘기로 시작. 2009-04-17
07:59:49
  

 

상병 정근영 
  킬킬킬 
새삼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초등학교 저학년때 고인돌과 레이맨과 라이언킹을 알게 되고, 
4학년때 그토록 그리던 컴퓨터를 갖게되었지요. 
저는 패키지 롤플레잉 게임을 좋아해서 창세기전이니 랑그릿사, 코룸, 용기전승 플러스, 환상서유기 등등을 하며, 레인보우 식스와 코만도스, 스타크래프트, 피파 99를 백업시디로 구워오곤 했었는데. 낄낄 
중학교때 이후로는 스타크래프트로 전향해서, 스타에 올인했다는. 하아 
덕분에 중고등학교 6년의 꽤 많은 시간을 배틀넷에 할애했죠. 2009-04-17
08:24:47
  

 

병장 김대운 
  크하, 
제가 알기로 아마 무준씨가 저하고 입사시기가 비슷한 걸로 아는데, 우리도 이제 슬슬 저녁밥 먹을 준비 해야되는거 맞죠? 엑박이나 플삼사이에 갈등하는 걸 보면. 흐흐흐 부라보! 
저는 고인돌에서시작해 6학년때 컴터를 사면서 바로 디아블로로 넘어갔는데, 항상 도스게임하면 고인돌이 최곤거 같아요. 2009-04-17
08:52:30
  

 

상병 구진근 
  유치원때 286 흑백 고인돌을 생각하면 아늑하네요... car 라는 자동차 게임, 도스 바둑 
벽돌깨기(뿌요뿌요 같은..)... 등등.. 을 하다가 국민학교때 Fox 라던지 미니 킹오브 그리고 디아블로1 와 같은걸 보고 우와~ 하고 있었는데..라이온킹도 이때 했었습니다(웃음) 
아.. 그리고 고인돌... 몇년동안 하다보니 처음에는 안 죽고 끝판깨기 부터 나중에는 눈감고 소리만으로(죽는지 소리만) 끝탄 깨기 등 달인의 경지에 도전하게 되더군요. 
(결국 성공했음..) 이때부터... 폐인끼가 있었나 봅니다. 2009-04-17
10:08:11
  

 

상병 김정민 
  B: 였던가요...... 
저는 기억에 남는 고전게임하면 삼국지5와 대항해시대2가 생각이 납니다. 2009-04-17
10:14:11
  

 

병장 김범수 
  아는 사람은 알만한 추억의 "M" 
초딩때는 M에서 초록색 EXE파일만 있으면 다 게임인줄 알았던 시절이 떠오르네요 2009-04-17
14:46:25
  

 

일병 김태건 
  음...저는 게임을 즐기기만 하고 빠지지는 않았던터라... 

확실히 미쳐서 몇달을 보낸 게임은 없었네요... 

길어야 3주... 2009-04-17
15:39:22
  

 

상병 박원익 
  엄청난 레퍼런스들의 나열이군요...... 2009-04-18
10:31:01
  

 

상병 홍도형 
  엑박에 올인. 레프트 4 데드 시여!!! 2009-04-19
08:57:41
  

 

상병 이재익 
  국민학교 3학년때 200만원들여서 흑백 286과 구형 프린터를 샀던 기억이 나는군요...아버지 논문때문이었지만 테트리스와 너구리, 헥사는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2009-04-19
13:56:21
  

 

상병 차종기 
  아앗 오타 발견 '나이가 나였기에 ' 나이가 나이였기에, 
아닌가요, 소심한 태클. 킥킥. 2009-04-19
22:28:19
  

 

병장 윤영준 
  저도 2002년도부터 발렌시아를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물론 좋아하고있습니다 
죽을때까지 좋아할랍니다 2009-05-15
14:44:12
  

 

병장 윤영준 
  저도 케이블채널에서 철지난 영화 자주봅니다 
지금도 쉐바 밀란 오펠시절 어웨이 레플 가지고있습니다 
저도 스포 총질 열심히했습니다 
뭔가 공통점이 많다고 해야할지,, 
 [일상이야기] Appy Birthday to me.  
병장 김무준   2009-04-17 14:45:35, 조회: 156, 추천:0 

1. 
생일이다.

2.
최근 들어 생일에 뭔가 기억 남을만한 일이 없었다. 작년 생일에 뭘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질 않는다. 모포에 둘둘 말려 죽어라 밟혔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할 따름이다. 아마 신나게 맞았던 것 같다. 고등학교 기숙사건 관광공사건 남자들 바글바글한 곳에서 으레 생일이면 생일빵이란 선물을 주곤 하니까. 제법 많이 맞았지 싶다.

재작년. 그러니까 이천칠 년의 생일에는 무얼 했던가. 역시나 기억이 없다. 바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해운대에서 아가씨를 만났던가? 음. 추측컨대 분명히 쾨스트리쳐 흑맥주 한 병을 바에서 챙겨다가 집에서 홀로 와우를 하며 보냈을 거다. 아닌가? 친구들 다 모여서 술을 마셨던가? 아, 게임을 하다 술자리에 불려 나갔고, 신나게 퍼마셨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날짜를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등학생 때도 죽어라 맞았구나. 그놈의 생일이 무언지 친구들을 애정을 듬뿍 담아서 발길질을 날려댄다. 사랑하는 만큼 밟아주는 거라던가. 오지게 맞았다. 돌이켜보면 생일에 처 맞은 기억밖에 없다. 굉장한 추억들이다. 하암.

3.
주변 직원들에게 오늘이 생일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왠지 말하기가 싫었다. 평소에 기념일 따위로 생색내는 편도 아니니까. 조용히 해야 할일을 하고 있었고, 동료들은 삼십 킬로미터 등산을 떠났기에 홀로 생일을 맞았다. 다이어리에는 사월 십칠일 귀빠진 날이라고 적어뒀다. 스무 살이 넘어서부터는 생일을 맞이할 때마다 어머님께 낳아주셔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곤 했다. 이번에도 할 생각이다.

솔직히 말하면 전혀 감사하지 않다. 사고가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이왕 사는 거 재미있게 살아보자’라서 열심히 빌빌거리고 있지, 지금이라도 탄생을 선택할 기회를 준다면 태어나지 않는 쪽을 택하고 싶다. 어떤 자식이든 자신이 원해서 태어나는 경우는 없다. 만일 영혼이라는 게 있어서 자신을 낳아줄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야 가난한 집안에는 자식 품귀현상이 벌어지지 않을까.

그렇다고 원망하지도 않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일종의 립 서비스를 하는 셈이다. 언제부터인가 가족이란 단어는 시스템적이면서도 형식적인 느낌으로 변했다.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도 않는다. 마치 타인과의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적당한 소통을 나누는 것처럼. 적당히. 적당히. 일전에 텍스트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가족이란 울타리는 허물 수 없으니까 그냥저냥 살아가는 거다.

보아하니 굉장히 무미건조한 생명체가 된 느낌이다.

4.
새벽에 자리에 누워 있는데 동료들이 공사로 돌아왔다.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왜 생일인 것을 말하지 않았느냐고 툴툴댄다. 조용히 침묵하는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다들 모르고 있었는데 부서를 담당하는 정규직 직원이 등산하는 동안 말을 꺼냈단다. 생일인 것을 알고 있느냐고.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래. 거기까지는 좋았다 이거다.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자 했단다.

공사에 입사하고 난 뒤로, 배터리 한 칸이던 시절 가정교육이 어쩌고 들들 볶던 선배직원의 말을 들었던 때. 그 때 이후로 미칠 듯 분노를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생일을 맞이한 새벽이 공사에 입사한 후로 제일 화나는 날이 되었다. 담당 정규직 직원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두어 달 사이에 여러 가지로 관계를 회복해보고자 노력을 하던 중이었다. 정규직 직원은 출판 관련 작업에 행정적인 도움 따위를 주고 있었고, 받은 만큼 돌려주는 성격 탓에 나름 최대의 호의를 베풀었다. 형식적인 관계의 개선일지는 몰라도. 최선을 다했고 진심으로 다가가고자 노력했다.

그런 그가 뒤통수를 후려쳤다.

믿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작년 즈음부터 사람을 다시 믿지 않고 있었다. 인간이란 다 그렇고 그런 존재니까, 적정선을 그어놓고 적당히, 적당히 지내왔다. 믿음의 유무를 떠나 믿어보고자 노력했다. 그의 도움을 화해의 손길로 해석했고 그 손을 잡았다. 그래도 사람이 어찌 한 순간에 변할 수 있으랴.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과 급작스럽게 친분을 쌓고, 그런 건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멋지게 어퍼컷을 날려주다니. 치가 떨렸다.

5.
생일을 챙겨주고 자시고의 문제를 떠나서, 사람에게는 형식적으로라도 서로에게 지켜야할 예절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진심이 수반되었건 혹은 그렇지 않건 인간 대 인간으로서 태도로나마 존중해야할 어떤 것이 있다고. 물론 군자가 아닌 소인배이기에 그렇지 못한 인간에게는 그렇지 않게 대하곤 하지만. 어쨌거나 그가 화해를 청하고 있다고 해석했고,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이건 아니지.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다.

잊고 살던 대인기피증이 도지고 있다.

인생 그 따위로 살지 말라고 독설을 퍼부으려다, 처지를 떠올리고는 가슴 속으로 삼키고야 말았다. 여전히 그는 정규직 직원이고, 나는 비정규직 직원이며 일개 소시민에 불과하다. 군자도 아닌 소인배라 그런 그를 용서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꼭 배신감과 같이 느껴져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타인이 나를 이용하는 만큼 나도 타인을 이용하면 되는 것인데, 그게 참 어렵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을 그어놓고 벽을 쌓고 신뢰를 주고 말고 하는 게 스물둘 소년의 지나친 행동일지도 모르나, 여전히 타인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또 저지르고 있는지도. 근데, 당분간은 역시나 인간이란 생명체를 못 믿을 것 같다.

6.
아주 지랄 맞은 생일이다.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23:20 

 

상병 전시우 
  제목에 H가 없는건 위트겠죠? 2009-04-17
14:52:01
  

 

상병 서석호 
  허허허. 
정규직 직원들도 참... 2009-04-17
15:06:23
  

 

일병 김태건 
  음... 

저는 재작년 공대 과대표로서 30명에게 밟혀 다리뼈에금이 갔더랬죠. 

후... 생일은 언제나 제가 억지로 챙겼죠. 언제쯤 말안해도 남이 챙겨줄지... 

인간관계란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2009-04-17
15:07:46
  

 

병장 김형태 
  일단, 생일축하드려요- 내일 워크샵에서 회포좀 풀고 오세요 2009-04-17
16:38:25
  

 

상병 이재익 
  생일축하드려요.. 2009-04-17
17:36:39
  

 

상병 김태완 
  늦었지만 생일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