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헤어진 연인들은 과거의 그(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일병 정근영   2008-09-14 01:28:16, 조회: 420, 추천:0 

오랜만입니다!
근 두 달만에 글을 쓰네요, 그 동안 좀 바쁘기도 했고, 정신이 없던 터라 자주 못 왔었습니다.. 흑
틈틈이 당근을 서면서 그간 못 읽었던 글을 한꺼번에 읽긴 했지만..

얼마 전에 후임이 슈가갔다가 사온 이사카 코타로의 '골든슬럼버'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읽는 중에, 뭔가 좀 생각할 거리가 생겨서 이렇게 글을 남기게 됐네요.
독서후기라고 해야할지 고민을 했었지만, 독서후기보다는 내글내생각이 더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지금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제목 그대로, 헤어진 연인들은 과거의 그, 혹은 그녀를 어떻게 기억하고, 또 현재에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하는 점이에요. 단지 예전에 잠시 사랑했을 뿐, 이제는 서로에게 별 의미없는 남남으로 여기고 있는지, 또는 아련한 추억속에 자리잡고 있는 소중한 추억의 일부분이고, 스치는 인연으로라도 잠깐 만났음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실 저는 후자보다는 전자 쪽이었는데, 이 책을 보고 좀 생각이 달라지게 됐네요. 아래부터는 편의상 반말체로 쓰려고 하니까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이 책의 주인공은 아오야기라는 평범한 남자이다. 6년쯤 전에 그는 별안간 여자친구였던 히구치로부터 이별선고를 받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계속 함께 있다보면 어떠한 큰 꿈도 없이 그냥 비젼없이 살고 있는 것 같다는, 그야말로 헤어지기 위한 어이없는 핑계에 불과한 말로. 그리고 이별치고는 너무도 밋밋하고 건조하게, 그들은 그렇게 헤어지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의 그 사건이 발행한다. 새로 선출된 총리가 거리에서 퍼레이드를 하다가 무선비행기에 설치된 폭탄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이. 대학교 친구였던 모리타에게 8년 만에 연락을 받은 아오야기는, 그 친구와 함께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오랜만에 만난 모리타는 자꾸 이상한 말들을 중얼거린다. 너는 음모에 빠진 거라고, 빨리 도망가라고, 그렇지 않으면 너는 케네디를 암살한 오즈월드가 되고 말 거라고. 영문도 모르고 도망을 가게 된 아오야기는, 그때부터 자신의 인생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모든 정황은 아오야기에게 불리한 쪽으로 돌아간다. 자기 자신은 절대로 그런 적이 없는데, 사건 근처의 돈가스 집에서 그가 밥을 두 공기나 하나도 안 남기고 먹었다는 등, 아오야기의 수상한 모습을 목격한 목격자들의 제보가 이어지고, 도시 곳곳에 설치된 '시큐리티 포드'라는 장치는, 아오야기가 모형비행기를 사고 있는 모습같은 걸 보여주기도 하고, '내가 범인이다'라고 말하는 아오야기의 통화기록을 찾아내기도 한다.

멍하니 옛 연인이 TV에서 나오고 있는 걸 본 히구치는 '내가 아는 아오야기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냐'라고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알고 있는 그는 절대로 밥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먹는 법이 없었으니까. 항상 밥풀을 가득남기곤 해서, 그녀와 친구들로부터 핀잔을 듣고는 했으니까.

'잘난 놈들이 만든 거대한 부조리에 직면하게 되면, 할 수 있는 일은 도망치는 것 뿐이야'라고, 옛날에 모리타가 했던 말을 되뇌이며, 온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던 아오야기는 대학교 때 히구치와 함께 비를 피했던, 버려져 있던 어떤 차를 생각한다. 배터리가 다 닳아서 시동이 걸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도 마지막 희망 하나를 걸고 한 번 가보았으나, 결국 그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는 걸 안 아오야기를 절망적인 심정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조수석 앞에 있던 메모지에 '나는 범인이 아니야, 아오야기 마사하루'라고 쓰고는, 다시 걸어서 온 길을 되돌아온다. 그러던 중, 아오야기는 그를 도와주는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다. 차로 다시 돌아가보라는...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돌아간 그는 누군가가 배터리를 갈아놓은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직까지 조수석 앞에 놓여져 있던 메모지 한 장도. '나는 범인이 아니야, 아오야기 마사하루' 비뚤비뚤한 그의 글씨 아래에 예쁘고 조그마한, 그리고 무척이나 익숙한 글씨체가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 가슴을 죄어오는 것 같은 그 말에, 하마터면 아오야기는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여기서 울어버렸다간 그냥 이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 것을 알고 있기에, 그는 이를 악물고 의지를 되새긴다. 그리고 결국, 히구치와 그를 여전히 믿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아오야기는 탈출을 할 수 있었다.

3개월 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성형을 하고, 아오야기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연히 히구치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남편과 아이도 같이. 행여나 알아볼까봐 잠시 당황했지만,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듯한 히구치의 모습에 안심을 한다.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1층에 도착하고 아오야기는 습관적으로 엄지손가락으로 열림버튼을 누르다가, '아차'하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보통사람들이 검지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르는 것과 달리, 아오야기는 예전부터 엄지손가락으로 버튼을 눌러왔고, 또 히구치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혹시 눈치채지는 않았을지 걱정하며,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이 모두 나가고 난 뒤 아오야기도 천천히 밖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녀와 남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녀의 딸이 오더니 '엄마가 이거 전해주래요~'하며 손목을 잡는다. 뭔가 하고 손목을 본 순간, 아오야기의 눈 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말았다. 손목에는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이 찍혀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아오야기와 히구치, 이제는 한낱 과거의 연인일 뿐인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참 신기했다. 책에서도 마지막에 한 번 잠깐 마주칠 뿐, 아오야기가 도망가는 과정에서 히구치가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리고 두 사람도 서로가 그 곳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는 있었으나, 직접 통화를 하고, 얼굴을 맞댄 적이 헤어진 후로 한 번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신뢰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서로를 관통하는 운명의 접점은 이미 지나치고, 이제는 서로에게서 한없이 멀어지고만 있을 뿐인데 말이다. 결코 좋지는 않았던 이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6년 이라는, 결코 짧지 않는 시간이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변함없는 믿음으로 서로를 기억하고 있는 건 무엇때문일까? 무엇때문에 히구치는 '내가 아는 아오야기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냐'라며, 목숨을 걸고, 이제는 옛 추억에 불과한 그를 도우러 나설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단지 옛 연인과 지나간 추억에 대한 의리과 예의 때문이었을까? 왜 히구치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아오야기의 글에 '그럴 줄 알았어'라는, 마치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이 절대로 변하지 않았을 거라는 이기적인 믿음을 담은 듯한 글을 쓴 것일까.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책을 덮고나서 한참동안 생각을 해봤는데, 어쩌면 인연이란 건 그게 현재까지 이어지든 과거의 짧은 만남으로 끝났든 간에, 서로 정말 소중히 생각했고 또 그 깊이가 결코 얕지 않았다면, 소중히 간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음에 이미 끝나버린 인연이 더 애틋하고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변변한 인사도 하지 못하고, 그 때는 정말 고마웠다는 말 한 마디 못 하고,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우연한 마주침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건, 그들의 모습과 아로새겨진 그들의 추억이 무척 예쁘고 따뜻해보였기 때문이다.


문득 떠오른 "사람은 기억을 잃고는 살아도, 추억을 잃고는 살지 못해"라는 어느 책의 대사가 유난히 가슴을 울린다. 

20.3.1.44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09:43:52 

 

병장 김태형 
20.35.2.177   아- 
이미 끝나버린 인연은 그 인연이 이어지지 않기에 더 애틋한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요. 

책,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 2008-09-14
08:12:33
 

 

병장 이동석 
40.6.1.206   음, 어떤 지점을 넘어선 관계라면, 헤어져도 결코 헤어지지 못하는것 같아요. 연락을 하던 말던, 평생 함께 가는거지요. 실제의 옛 연인은 점점 휘발되지만, 그래도 완전히 지워버릴수 없는. (뭐 그냥 제 개인적인 관찰결과) 2008-09-14
08:56:31
 

 

병장 이건진 
18.18.40.201   얼마전 헤어진 첫여자친구의 편지를 받았어요. 녀석 그렇게 힘들어하더니 
어느새 훌쩍 커버렸더군요. 남자친구하고도 잘 지내는걸 보니. 
사귈때 제가 100일동안 써서 줬던 일기장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발견하고 
생각이나서 편지를 쓴다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줬어요. 

근데, 제 답장은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었어요. 쿨해 보이고 싶었던거죠. 
하하하하. 아직도 전 어린가봐요. 어쩌면 헤어진 연인은 지독한 트라우마 
같기도해요. 언제 어디서든 불쑥 튀어나오고 추억이란 이름으로 가장하고 
절 괴롭히기도 하죠. 아직 제 시간들이 덜 촘촘해져서 그 때의 기억들이 
완전한 추억이 되지못한 것 같기도하구요. 

여튼 육역훙련 갔다오면 사과의 편지를 쓸까봐요. 소심하게 또. 풋. 2008-09-15
05:28:23
 

 

상병 이동열 
22.36.32.20   저는 골든 슬럼버를 읽으면서 빅브라더 사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었는데... 

이런관점에서도 읽을수 있었군요(웃음)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좋은 계기였습니다- 2008-09-16
10:12:18
 

 

이병 장봉수 
16.36.1.233   멋지군요 하하 
한 번 맺은 인연은 풀 수 없는 법일까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