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카르타고인과 로마인의 사이  
일병 박재선   2009-01-09 10:47:27, 조회: 107, 추천:1 

지하PX로 내려가는데 엘리베이터 안 TV에서 YTN뉴스를 하더군요. 배달호 열사가 죽은지 딱 6년째 되는 날이랍니다. 6년 전 오늘, 열사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한동안 소강국면에 접어들었던 계약직철폐싸움이 다시금 활활 타올랐던 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추운 동아리방에서 숙취에 쩔어있는 선배에게서 처음 접해듣고 총학생회실로 내려갔다가 주한미군철수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왠지 모를 허탈감을 느꼈던... 그 추억까지 생각이 났습니다. 그게 벌써 6년 전이라니. 자판기에서 코코아를 홀짝이며 '내년에는 어떻게든 선거에서 이겨서 메이데이나 노대에 깃발들고 한번 나가보자'고 후배들과 속삭였던 그 겨울이 벌써 6년 전이라니. 

PX에서 간부들이 마실 물과 커피, 그리고 코코아를 샀습니다. 군무원님이 뜯기 전에 OK캐쉬백150원짜리 쿠폰을 서둘러 잘라냅니다. 두둑해진 그동안의 쿠폰함에 왠지 뿌듯합니다. 카르타고인들은 워낙 부자들이라,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는 쿠닌을 모두 외국에서 사들여왔다고 합니다. 자본의 입맛에 길들여진 평화로운 한국은 아직 카르타고처럼 부유하지 못하므로, 월 8만원도 안되는 봉사료로 저 같은 봉사자들이 2년을 저당잡혀있습니다. 그러할진대, OK캐쉬백 쿠폰즈음이야... 저당잡힌 세월에 대한 아주 작은 보상이라고 주장할만도 하겠지요.

배달호 열사가 죽은 그 해 늦가을, 2번의 결선투표끝에 간신히 5표 차이로 통일진영 후보를 누르고 총학생회에 당선되었습니다. 새벽까지 술을 먹어도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틈틈히 습작했던 작품들이 대학신문에 가작이 된 것도 그 즈음이었습니다. 외상 술값을 갚을 수 있는 상금이 생긴 것 보다도, 기만적인 대학교수들 앞에서 당당하게 등록금 인하(!)를 요구할 수 있는 직함(?)이 생긴 것 보다도, 추운 골방이 아닌 따뜻한 스팀이 나오는 총학생회실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이 더 기뻤습니다. 1년 간, 내가 책임지는 1년 만이라도 그동안의 관성을 이겨내고 싶었습니다. 졸업을 미루는 것을 결의(!)하며 힘차게 1년을 살고 싶었습니다.

카르타고군을 이끄는 한니발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동원해 알프스산맥을 넘는 것 까지 성공했답니다. 자다 일어나보니 머리맡까지 몰려온 카르타고군을 봤을 때 로마시민들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많은 월급으로 사기충천한 카르타고군들은 초국적 금융자본의 힘을 믿고 이라크에 상륙한 미군 이상으로 막강했을겁니다. 목숨을 지키기 위한 로마인들의 선택은... 다름아니라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목숨 앞에선 돈도 필요없지요. 로마인들의 완강한 저항과 역공에 질린 카르타고 군인들은 모두 도망가게 되었고 결국 무리한 전쟁으로 인한 피해로 인해 카르타고는 로마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조악한 식사와 버스기사의 불친절함을 견디면서도 최대한 저렴한 비용으로 우리는 서울로 많이 오갔습니다. 공문처리와 자보쓰기는 매일 해야할 일이었으며 밥먹는 시간을 줄여가며 문건을 작성하고 회의를 했습니다. 지지 않기 위해 싸워야했고, 카르타고인이 아니라 로마인이 되어야 한다는 심정이었습니다. 시를 한 편 읽는 것 보다는 깃발을 하나라도 더 들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는 그게 당연했습니다. 가끔씩 피곤이 몰려오거나, 김규항씨 말마따나 진보적이라서 외로워지면... 술을 마시고 어디론가 잠적하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잠적... 누구나 스무살 때는 그러잖아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살고 싶기도 한 그런... 그런 꿈을 꾸다가 깨어보니, 

5년이 지난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아도 이미 사회로부터 잠적해있는 신분. 얼룩의 보호색에 가려져서 60만 장병 누구나 비슷비슷하게 보이지요. 누가 붉으스름한지 누가 푸르스름한지 알 수가 없지요. 강제적인 정신교육과 정치훈련의 영향이라 믿고 싶진 않습니다. 나는 OK캐쉬백과 몇푼 안되는 월급을 위해 싸우는 카르타고의 쿠닌이 아니라, 목숨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을 줄 아는... 그런 로마의 싸움꾼이기 때문이죠. 이제는 잠적하고 침참할 것을 꿈꾸기 보단, 활개치고 다닐 생각으로 제대날짜를 기다리는 로마인이 되어 또 하루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제 창군이래 처음으로 대규모로 별들이 모였다는 그 대회의실 앞을 지나가면서, 그들의 자랑스런 선배들이었을 4성들이 새겨진 초상화를 힐끔힐끔 거리면서... 로마인들에게는 영원히 죽지 않고 기억되는 죽은 영웅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57:58 

 

병장 이동석 
  우우왓, 우수회원 박재선님- (히히) 오랜만이에요. 2009-01-09
11:38:15
 

 

상병 이석재 
  잘봤습니다. 카르타고와 로마와의 차이라. 마음에 와닿는군요 2009-01-09
11:45:01
  

 

일병 박재선 
  이동석 병장님 저도 제가 책마을에 너무 오랜만이라 송구스럽네요. 2009-01-09
17:23:19
  

 

병장 이동석 
  우어어, 찬찬히 읽어보니 글의 풍미가 아주- 

재선님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오히려 송구스럽지요. 그건 그렇고, 재선님이 계신 그곳은 왠지 낯이 익군요. (허허) 2009-01-09
20:2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