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진화론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8-11-06 08:52:35, 조회: 267, 추천:1
-그러니까 그건 음모라니까?
-아니, 야, 벌써 취했냐?
반쯤은 짜증으로 대답했다. 자신이 중요한 발견을 했다며 들려줄테니 나오라고 연락하던 B는 흥분한 상태로 거푸 술잔을 비우더니 이미 취한 듯 했다.
-아니, 내 말을 좀 들어보라니까.
-니 말은 충분히 들었어.
정말로 B의 말을 충분히 들었다. '진화론은 사실 정보조작이다'라는 말만 벌써 수십번 들었으니 말이다.
-생각을 해봐, 진화론을 말한 게 누구야?
-다윈 할아버지 아닌가?
-그 사람은 어디서 영감을 얻었다는데?
-뭐시기냐, 그, 갈.. 어쩌구 하는 섬이었는데?
-갈라파고스 제도, 거기에 사는 새랑 거북이.
-아아, 맞아. 섬마다 부리랑 등껍질의 모양이 조금씩 달랐다고 했지.
-그래, 그거.
-그런데 뭐?
-아직도 모르겠어?
-그래, 모르겠다. 환경에 맞게 진화했다는 거 아냐?
슬슬 짜증이 머리끝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B는 계속 횡설수설이었다. 다윈이네, 거북이네, 어디 이상한 종교에라도 빠진건가, 생각했다.
-그게 진화야?
-엉?
-환경에 따라 모습이 변했다. 그게 진화냐고.
-아아,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건 끽해야 적응 정도 되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또.
자신의 인내력이 초단위로 갱신되는 것을 느낀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자신의 인내력에 어딘가 뿌듯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래, 난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어.
-아니, 생각을 해봐.
B는 아까부터 계속 생각을 해보란 말을 하고있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을 아까부터 B는 열심히 묵살했다.
-진화론이라는 거, 아메바가 사람이 됐다는 거잖아.
-으음, 엄청나게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되는건가.
-그런데 아메바랑 사람은 종족이 다르잖아.
-너랑 나도 종족이 다른 것 같다, 야.
-그런데 그 섬들에 살던 새도 거북이도 결국엔 그 새랑 그 거북이잖아.
B는 이제 농담도 먹히지 않았다. 자기가 하고싶은 말만 계속 중얼거릴 뿐이었다. 게다가 그 중얼거림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된다는 것이 더 골치였다. 아 이래서 주정뱅이는...
-생각을 해보라고. 진화라는 건 결국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는 거잖아.
-아, 그런가?
-공룡이 도마뱀이 되고! 새가 되고! 그게 진화잖아!
-뭐랄까, 그렇게 말하니까 무슨 변신인 것 같은데.
-그런데 어떻게?
-야, 그걸 니가 물어보면 어떻게해!
-공룡의 알에서 새가 나온거야?
-맙소사,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면 어떻게 공룡이 새가 된건데?
왠지 애써 설명을 하더라도 B가 무시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건 자신에게 질문이 들어온 이상 대답을 해주는 게 예의일 것 같았다.
-어떤 공룡이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이 돌연변이였던 거지. 우연히 깃털이 몇 개 달린 공룡이 태어난거고.
-계속해봐.
나의 예상과는 달리 B는 나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있었다. 술이 좀 깬건가?
-그리고 그 공룡의 다음 후손은 깃털이 몇 개 더 늘어나고, 그 후손은 더 늘어나고, 결국엔 온 몸이 깃털로 덮인 공룡이 태어난거지. 그리고 그게 시조새인거고. 뭐, 막연하게 말하면 그런 거 아닐까?
-그게 말이 돼?
아니었다. B는 내 말을 비판하기 위해 듣는 척을 했을 뿐이었다. 아이고, 머리야.
-도대체 어디가 말이 안되는건데?
-우선 돌연변이와 원종 사이에서 돌연변이인 후손이 만들어질 수 있을 지 없을지도 모르는 거고, 만일 된다 하더라도 종이 보존되기 위해서만 해도 몇백이 넘는 개체가 필요한데 고작 한 마리의 돌연변이 때문에 새로운 종이 생겨났다고?
-그건 또 뭐야.
-자, 생각을 해봐. 니 말대로 깃털이 달린 공룡이 10마리가 태어났다고 쳐. 그런데 과연 그 10마리가 다 무사히 자라서 후손을 만들 수 있을까?
-흐음, 그러고보니.
-그래, 야생의 세계에서는 10마리 중에 1마리도 간신히 후손을 만들까 말까 할껄? 그런데 그런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대박을 치는것도 정도가 있지. 아예 한 종족이 새로 생겼다고?
B의 말은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듯 했다. 물론 술주정 치고 논리적이라는 말이고 나도 어느정도 술을 마셨기에 판단력이 좀 흐려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어떻게 됐다는건데, 니 말은.
-자, 그렇다면 둘 중에 하나지. 모든 공룡이 동시다발적으로 깃털이 달린 돌연변이를 낳았다, 뭐 유행따르듯이. 아니면 새라는 종족은 갑자기 나타났다.
-첫번째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 너 또 이상한 논리로 격파할거지.
-그건 마치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팔이 세개 달린 사람이 태어난다는 거랑 비슷해. 아니지, 공룡은 원래 깃털이 없었으니까 뿔이 달린 사람이 전 세계적으로 태어나는 것과 더 비슷하겠다.
-그런데 가끔 뉴스에 새와 공룡의 중간단계로 보이는 화석을 발견했다는 얘기 나오지 않아?
-응, 그렇지.
-싱겁긴, 그러면 진화는 진짜로 있는거잖아.
-아니야, 공룡과 새의 중간단계인 종족이 갑자기 지구상에 등장한거지.
-이녀석이 또 머리아프게 하네. 무슨소리야 이번엔.
-옛날에 자동차 있잖아, 마차에다가 엔진달아놓은 것처럼 생긴.
-뜬금없네. 그래 있었지 그런거. 흑백영화에 나오는 거.
-그 자동차는 다 어디가고 지금처럼 잘 빠진 자동차들이 도로를 달리는거야?
-...야, 너 무슨 말이 하고싶은거냐.
-같은거지. 창조주가 단계별로 점점 나아지는 모습으로 창조하는거야. 기원전 300년식 코끼리, 2008년식 코끼리. 이렇게.
-너 어디 이상한 종교라도 믿는거냐?
더이상 술잔이 오고가지 않은 지 오래였다. 시켜둔 안주도 이미 다 식어서 무심코 떠먹은 계란탕에서는 비린맛이 느껴졌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잖아.
-아니, 이미 충분히 많은 학자들이 많은 이론으로 설명을 했을거라고 생각하는데.
-글쎄, 아직 원숭이가 인간이 된 것에도 미싱링크라는 공백이 존재하는 걸로 아는데. 아직 설명이 되려면 멀었어. 아니, 사실 설명이 될 수가 없지. 원숭이에서 인간이 된 건 창조주의 혁신적인 프로젝트의 결과니까.
-아 나 미치겠네. 그래, 그렇다 쳐.
A는 주정뱅이의 말에 져준다는 듯이 말했지만 실제로는 알딸딸한 술기운에 어느정도 그럴듯 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있다. 게다가 억지가 대부분이지만 나름대로 흥미로운 생각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럼 진화론이라는 거짓정보는 누가 흘리고 있는건데? 그것도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당연히, 교황청이지.
-아, 미안. 잠시나마 흔들린 내가 바보다.
창조주가 하는 일을 교황청에서 부정하고 있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갑자기 창피해졌다. 저딴 놈의 헛소리를 재밌다고 듣고있었으니.
-도대체 그러면 왜 교황청에서 창조론을 부정한다는 건데?
-그 창조주라는 게 알고보니까 하나님이 아니었던 거지.
-이거 완전히 미쳤구만? 나 간다. 술 깨면 보자. 계산은 내가 할게. 나름 재미있는 얘기 들은 값이라고 하자.
-킬킬킬, 두고 보라고. 인터넷에 올릴거야, 이거. 금방 전 세계사람들이 알게될걸?
-그래, 수고해라.
나는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섰다. 아, 저런 정신나간 녀석과 친구였다니 내가 다 창피하네 따위의 생각을 하며 택시를 잡았다. 아, 뭐 저런 녀석이 다있어?
아, 머리가 아프다. 많이 마신 건 아닌데 왠 숙취가 있는거지? 어제 미친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그래. 전화기를 바라본다. 부재중 전화 1통, B이다.
-아, 이 녀석. 사과라도 하려는건가
전화를 건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해 주시고...
이건 또 뭐야.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잘 받더니.
띵-동
이 아침부터 또 누구야.
-누구세요?
카메라를 통해 본 대문 앞에는 5명 정도 되어보이는 사람들이 서있다. 그 중에는 외국인도 섞여있다. 적어도 나를 찾아올 사람 중에는 저런 조합 없는데, 누구지?
가장 앞에 서있던 남자가 말한다.
-바티칸에서 왔습니다. B라고 아시죠? 진화론이랑.
뭐야, 이건.
덧. 모처럼 평온한 아침입니다. 다들 좋은 하루 되셨으면 해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8:57:39
병장 조흥준
늘 신선합니다 2008-11-06
09:25:10
병장 이동석
하하하-
역시나 신선한 발상이로군요. 흐흐.
송기화식 글에 점점 빠져드는것 같습니다. 2008-11-06
09:27:44
상병 정근영
오, 이거 좋은데요? 2008-11-06
09:32:19
병장 윤기현
읽기 시작하면 정신없이 끝까지 읽게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2008-11-06
10:14:49
소위 문보람
송기화님 글 모조리 찾아 앍어봤는데, 역시 이번글도.
팬이 될 것만 같아요! 2008-11-06
10:45:32
상병 이우중
역시나, 기발한데요?(웃음) 2008-11-06
10:57:50
병장 김낙현
우아아아아아아아!!
진짜 이런 발상, 놀랍습니다.
근데 저는 이번 소재가 더 흥미롭군요. B의 처음 논리라면 정말 진화론은 뿌리 발견이 틀린걸까요? 처음부터 잘못 짚은건가요? 2008-11-06
12:00:21
병장 윤한철
역시나는 역시나군요 (웃음)
언제나 클릭해도 후회하지 않게 만드는군요 2008-11-06
12:57:41
일병 송기화
여러분들/ 전 아직 한참 신선할때잖아요(웃음) 모두 감사합니다 히힛. 2008-11-06
13:19:53
병장 정병훈
낄낄낄. 필력이 +10 되었습니다.
제가 드릴께요.
제 남은 필력 10입니다. (씁쓸.)요샌 도통 글을 못쓰겟네. 2008-11-06
16:54:43
병장 김민제
오묘한 반전이랄까?
독특하네요..
잘 읽고 가요 ~ 2008-11-06
20:40:11
일병 송기화
띠링~ 필력이 10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병훈님.
오묘..라기보다는 애매합니다.
감사합니다 민제님. 2008-11-06
21:07:01
병장 정병훈
오잉? 필력이 10이 되시면 기화님의 초기 필력은 '0?' 에이 설마. 2008-11-06
21:3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