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전화위복과 반면교사의 교훈  
병장 문두환   2008-09-14 19:15:15, 조회: 184, 추천:2 

  사는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역시 당근을 먹을 때에야 진득하게 앉아 글을 읽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글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고 해야 할까요? 경험치가 0.01%씩 차오르는 것을 느끼는 요즘이지만 유독 부대찌개가 불티나게 팔려 나갔던 바쁜 일정 덕에 문득 돌아보니 벌써 몇 주가 지나있군요. 역시 시간은 뒤돌아보면 휙-하니 지나있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지나고 나서 헛헛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좀 더 분발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지난 몇 주간 몇 개의 글을 몇 번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써놓고 보니 이건 100% 검열감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글들과 쓰고 고치고 또 고쳐 봐도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회생 불가한 녀석들을 보면서 꽤나 좌절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진-한 커피가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휴일의 오후입니다. 명색이 명절인데 다들 목구멍의 때는 벗기셨는지. 모쪼록 풍성한 한가위가 되셨길 바랍니다.



  #1
  새옹지마(塞翁之馬)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차이. 대학교를 다닐 때 어느 책에서 읽었던 내용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 수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과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설계하는 것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 두 사자성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 라는 말은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불행이 닥친 듯 보였던 사건이 오히려 행운이 되더라는, 그렇기에 사람 일이라는 것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절망하며 살지는 말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한편 전화위복은 자신의 앞에 닥친 화를 기지를 발휘하여 복으로 전환한다는 ‘역경의 극복’의 자세를 말합니다. 사람이 항상 좋은 일만 겪으면서 살아갈 수는 없기에 우리 앞에 닥쳐 올 시련과 위기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을 새삼 고민하게 하는 말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불행이 행운이 되는 우연적인 기회를 기다리기보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에 더 동의하는 편입니다. 기적이라는 것도 결국 노력하는 이에게 주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입궁 전에는 위의 두 사자성어의 뉘앙스 차이를 마음 깊숙하게 새기며 살아왔습니다만, 요즘 참, 새삼스럽게 비교해보는 사자성어가 하나 더 있습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과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사자성어입니다. 타인의 경험과 실수를 비추어 자신의 교훈으로 삼는다는 의미의 ‘타산지석’은 잘 알려진 사자성어인 반면에 ‘반면교사’는 저에게 다소 생소했던 사자성어였습니다. ‘반면교사’는 마오쩌뚱이 대장정을 할 시절에 만들어낸 사자성어로 타인의 잘못되고 그릇된 행동을 통해서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2 
  입궁은 어쩌면 저에게 굉장한 의미들을 시사해준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물론 아직도 더 많은 경험들이 남아 있을 것이고, 어서 퇴궁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만). 관료제와 형식주의, 성과주의 등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였으며 특히나 사람관계와 조직 안에서의 지위 변동에 따른 ‘행동’과 ‘권력’그리고 ‘책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곳은 어쩌면 각 개인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시험하고 진실을 찾아가기 위한 작은 실험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는 ‘반면교사’의 교훈을 떠올리게 한 곳이었으니까요. 부연설명을 덧붙이자면 아래와 같겠습니다.

  이것은 다소 진부하거나 식상하고 혹은 지루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눈을 뜨고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들기까지 우리는 서로 참 오랜 시간을 함께 공유 하고 있습니다. 부대찌개 가게는 아직 이 땅에서 단 한 번도 이뤄져 본 적이 없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외면상 적용되고 역사적 유례없는 혁신적이고 선진화된 관리 방침으로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나이 터울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생각과 가치관과 살아온 과정이 전혀 다른 20대의 젊은이들을 한 곳에 고용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신분차이를 명확히 하는 동시에 서로의 역할도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무엇을 해야 한다’, 언제부터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자체적 규율과 행동반경의 경계는 상당히 불합리함에도 질서유지의 측면에서 합리적인 ‘룰’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비판했고 나는 나중에 저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과 내가 그려온 ‘고창’의 모습은, 이제까지 많이 했고 이제는 편해지고 싶다는 변명으로 편리하게 감싸집니다. 어떻게 보면 시간의 고통분담의 개념처럼 그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룰이라는 합리화는 설득력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후인’에게 잘 해 주려는 작위적인 노력보다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싶다던 애초의 소망과 인간관계에서 소통과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과 과거에 ‘고창’들의 모습을 달갑지 않게 받아들였던 기억은 이미 잊혀진지 오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다를 줄 알았어’라는 말은 순진한 거짓말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3
  TV를 보면서, 신문을 읽으면서, 인터넷에 올라 온 각종 매체들의 기사(?)를 읽으면서, 내 주변에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에 대해-특히 자신이 동의하지 않거나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더 세심하게 논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고기는 씹어야 맛이요 말은 해야 맛이라고 했던가요. 우리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그 무엇인가를 화제에 올림으로써 사건에, 인물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는 일종의 ‘해소’를 느끼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가치관과 반대되는 ‘무엇’이었다면 그것에 대해 성토한 후에 어느 정도의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는 경우도 종종 엿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과 반대되는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이 반드시 무익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문제는 그 이후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비판해 마지않던 모습들과 한 두 치의 오차를 제외하면 거의 동일한 오류를 스스로 범하는 모습들이 일상에서 참 쉽게도 목격되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고 해도 좋고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위안 삼아도 좋습니다.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어쩔 수 없다’는 상황논리를 대입해 보기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요즘은 조금 마음이 불편합니다. 이런 문제에서 저도 물론 예외는 아니지만 이 고민을 더 깊게 해 주는 한 인물이 주변에 있기 때문일까요.

  도덕적 기준이 애매한 시대에서 이런 명제가 얼마나 효용을 가질 것인가의 문제는 일단 뒤로 미뤄두고, 이런 질문은 어떻습니까? 별 생각 없이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것과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침묵하거나 함께 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나쁜’ 것인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반드시 시비(是非)가 명확하거나 선택이 강요되는 문제는 아닙니다만 저는 후자가 더 그릇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소설에서 소설 속 인물이 지은 ‘염전장(언어유희 적용)의 아침’이라는 소설 일부의 구절을 인용하자면,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그것에 동의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라는 생각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상식적으로 옳지 않은 행동은 주변 사람들에게 ‘반면교사’의 교훈이라도 줄 수 있지만 옳지 않은 행동을 보며 그것을 비판 하면서도 자신이 그 오류를 마찬가지로 범하고 있는, 그러면서도 그래도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인지 실제로 그렇다는 확신인 것인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별 수 있느냐’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합리화의 시도를 넘어 오히려 스스로를 배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건 생각해 보면 참 비겁한 짓입니다. 차라리 이성적인 척을 하지 말고 스스로 불합리함을 커밍아웃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 같습니다.

  좋은 예는 아닙니다만 예전의 기억을 하나 떠올려 보겠습니다. ‘성매매특별법’이 공표 되었을 적에 다수의 여성들이(아, 언어 선택은 정말 어렵습니다. 성을 파는 것이 과연 ‘노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금전을 매개로 한 성행위가 본인의 의지에 따라 ‘파는’ 것인가 혹은 그것이 하나의 ‘상품’처럼 취급되어도 좋은 것인가 등등의 고민이 섞여 들어오네요)국회 앞에서 피켓을 들고 ‘생존권 보장’을 외치고 있을 적에 한편에서는 ‘봐라, 쟤네도 지들이 좋아서 저 짓 하는 것이다’라는 말과, 동시에 일부 남성들이 ‘우리에게서 s*x할 권리를 빼앗지 말라’는 덧글을 인터넷에 서슴없이 게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회에서는 온갖 수식을 동원하여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처럼 치장하고 있던 그들이 어느 순간 그 여성들이 아니면 성 욕구를 해소할 길이 없는 처지가 되었다니 굉장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별별 수단을 동원해서 젠 체 했던 그들이 스스로를 ‘나는 그것 없이는 못 사는 동물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순간이었을까요? 별로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솔직한 모습은 아닌 척 하는 이들보다 더 나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4
  무결하고 도덕적으로 완성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해서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김중식 시인의 시집 <황금빛 모서리> 작가 서문처럼 ‘내가 욕한 것들과 나는 얼마나 닮아 있으며 또한 닮으려 안달했는지 들켜’버리기 전에 이제부터라도 자신의 모순 된 모습을 스스로 돌아보고 괴로워 할 줄 알며 살아야겠습니다. 어쩌면 이제까지 위에서 써 내려온 많은 문장들은 과거를 살아왔던 나에게 보내는 충고의 메시지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나를 위한 지표이며 미래를 살아갈 나에게 경계를 당부하는 문장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모금 남은 식어버린 진-한 커피가 스러져 가는 오후의 햇살만큼 느리고 둔탁하게 목구멍으로 넘어옵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20:00:45 

 

상병 양순호 
  어찌되었건 일단 살아가야 하니까요. 슥 슥 읽고서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이거네요. 특히 #2는 좀 더 깊게 들어가게 해주네요. 여하튼간에 목에 찌든 때는 고깃기름으로 슥 슥 벗겨져지고 있었는데 왠걸, 간만에 들어가서인지 목이 텁 텁 막히시더랍니다. 고기는 씹어야 맛이긴 하나 씹으면 씹을수록 탄맛과 탄내가 코를 간지럽히시고는 그대로 뇌속으로 뉴런을 자극시키며 외치더군요. "에이 씹힐!" ..계속 씹으라는 말이었습니다. 여하ㅡ튼 그렇게 하다보니 오늘이고 간만에 열두시간 넘게 잤네요. 피부가 좋아졌다는둥 얼굴이 살짝 부었다는둥의 말은 뒤로하고 지금은 아침먹길 기다리고 있구요. 아. 나의 아침은 언제쯤 오는걸까요. 커피도 마시고 싶은데 수중엔 만원짜리밖에 없네요. 이런 만원어치 인생. 2008-09-15
07:58:57
  

 

일병 오창희 
  인간만사 세옹지마라고 저 혼자 알CT라는곳에 안 갔더니 

우리부대찌게 단체로 포상슈가를 받는거 있죠? 

인간만사 세옹지마라더니.. 흑흑... 2008-09-15
09:48:35
  

 

상병 이동열 
  요즘 이래저래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아가는 저에게 약간의 여유를 가져다 주시네요 
감사합니다(웃음) 2008-09-16
10:54:33
  

 

병장 이동석 
  음, 저는 성노동이라는 개념에 대해, 감정노동의 부분이라는 점에서 동의하는 편인데요. 
사실 감정노동에 대해 찬찬히 돌이켜 보면, 노골적인가 노골적이지 않은가의 차이만 있을뿐, 성역할에 기댄 유사 성노동이라 볼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봅니다. 뭐 그건 단지 예일뿐이었으니까, 자세한 언급은 패스. 

그러나 저러나 그들의 솔직함을 '차악'이랄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과연 그들이 인터넷 게시물에 댓글을 다는게 아니라 공론의 자리에서 내뱉을수 있었을지가 의문인것 처럼요. 그들은 겉으로는 합리적이며 점잖은척을 하다가, 사적인 영역에서는 댓글을 달거나, 음담패설이라고 밖에 부를수 없는 의견을 개진하거나 할텐데, 두환님이 의도하신 예로 적절할지가 의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예시로 물고 늘어지는건, 이 예만 아니었다면, 저는 이글이 참 좋았다고 말하고 싶은 밑밥을 뿌리는 행위나 마찬가지랍니다. 2008-09-16
13:14:30
 

 

병장 문두환 
  역시 글을 쓸 때 사족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과감히 버려야 하는 것일까요?(웃음) 

동석님 말씀처럼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적인 공간에서나 입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를 
떳떳하게 했을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저 역시도 아니오-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비단 성매매 문제에서만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과연 민주주의적인 공론의 장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의는 
제가 알기로도 꽤-오래전부터 이어져 왔으니까요. 
일단 이 문제는 제가 말하고 싶었던 부분과 완벽하게 합치하지는 않으니 
언급은 뛰어넘겠습니다. 

글을 쓰면서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말은 
'합리적이지 못한'사람이 이성과 합리를 위장하며 스스로의 모순을 감추려 애쓰더라, 
그리고 나는 이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싫다, 
비록 내가 도덕적이 아닐지라도. 라는 맥락이었습니다. 
겉으로 나는 '무식하오'를 눈에 빤히 보이게 행동하는 이들보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점잖은 척 하는 이들이 더 무섭고 싫은 이유는 
부도덕한 이들보다 뻔뻔하고 염치없게도 아니면서 도덕적인 이들의 위선에 
깜박 속아넘어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 둘중에서 누가 더 '나쁜 것'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동석님 말씀대로 '의문'이겠지만요. 2008-09-16
15:11:11
  

 

병장 이재민 
  제대를 두달여 앞두고 저는 오히려 생각이 바뀌었네요 
이 곳 안의 생활과 밖의 생활이 오히려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닐까 
밖은 오히려 더 많은 위선과 허영, 비합리가 판치는 곳이 아닐까 2008-09-18
09:3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