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인연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8-11-27 16:02:41, 조회: 260, 추천:1 

남자는 여자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져버렸다. 심리치료사인 남자에게 여자가 찾아왔던 그 때 남자는 운명을 느꼈다. 치료의 일부분인 것처럼, 여자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행동인 것처럼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진다. 여자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지금 여자는 남자의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여자가 경계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은 잊지 않는다. 남자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여자는 남자와 결혼해야만 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려 애쓴다. 성실하게 상담해주는 모습도 보여준다. 그리고 다음 상담날짜를 정한다. 오늘 저녁에라도 당장 다시 오라고 말하고 싶은것을 참는다. 주의깊게 일정을 묻는다. 여자의 스케쥴을 머릿속에 기억한다. 여자가 돌아가고 난 후에도 남자의 머릿속에는 여자에 대한 생각 뿐이다. 여자의 신상명세를 읽는다.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높다. 여자는 부유하다. 집안의 위세도 대단하다. 남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극복해야한다. 여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만남은 이제 무리이다. 자신의 반쪽을 찾아냈는데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남자는 방법을 궁리한다.
여자는 정해진 시간에 찾아왔다. 여자가 경계심을 늦추도록 자연스러운 주제로 대화한다. 다급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되었다고 말할 때까지 여자는 상담을 받으러 올 것이다.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여자에 대해 많이 알고있을 수록 좋다. 당장이라도 튀어나오려는 결혼하자는 말을 몇 번이고 삼킨다. 남자는 자신이 어째서 이렇게 조급해하는 지 이해하지 못한다. 간신히 남아있는 이성을 끌어모아 매너있게 행동한다. 최대한 안전한 사람으로 보여야한다.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여야한다. 자신의 심리학적 지식을 활용한다. 여자의 손짓 하나에 담긴 의미까지 알아내려 애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손짓 하나에도 자신의 장점을 담아내려 노력한다. 좋은 소식이다. 여자의 부모들은 고지식하지만 여자의 부탁에는 약한 편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매달리기 시작한다면 여자의 부모도 허락해 줄 가능성이 크다.
몇 번의 상담이 지난 후 남자는 여자에 대한 많은 것을 알아냈다. 여자는 도도한 사람이다, 헤이즐럿의 향기는 좋아하지만 헤이즐럿은 좋아하지 않는다. 제비꽃을 좋아한다. 꽃선물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사실 장미꽃으로 채워진 방으로 들어서보고싶어한다. 상상력이 좋다. 연애소설을 좋아한다. 추리소설은 내용을 따라가기 힘들어한다. 콜라보다는 사이다를 좋아한다. 영화를 좋아한다. 액션게임을 좋아한다. 몸치이다. 바이올린의 선율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색은 핑크. 여름에 태어났고 겨울을 좋아한다. 비내리는 모습을 좋아한다. 그리고 남자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정보가 있다. 여자는 미신에 약한편이었다. 별자리점과 혈액형점을 믿으며 년초가되면 사주팔자는 꼭 보러간다. 징크스도 많이 가지고 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었다. 여자는 운명적인 만남을 믿었다. 운명을 믿었다. 남자는 이 부분을 이용하기로 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최면요법을 제안한다. 최면을 통해 여자에게 불안을 주는 요소를 찾을 수 있다면 정신적인 안정을 찾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여자를 설득한다. 그동안 보여온 성의가 좋은 결과를 이끌었다. 여자는 조금 고민하는 듯 싶더니 승낙한다. 남자는 여자를 최면상태로 이끈다. 여자에게 암시를 건다. 큰 암시는 아니지만 남자에게 있어 커다란 도움이 될 암시이다. 그 후에는 차분하게 여자에게 도움이 될 부분을 찾는다. 

여자는 눈을 뜬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다. 최면요법이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정신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남자가 보여준 태도를 보고 믿고 맡겼다. 결과가 좋았기에 여자의 마음은 가뿐했다. 멈칫, 여자가 동작을 멈춘다. 시야에 이상한 것이 들어와있다. 붉은 실 같았다. 실의 끝을 따라가보니 자신의 왼손 약지와 이어져 있었다. 반대쪽 끝을 찾았다. 남자의 왼손 약지와 이어져 있었다. 최면이라는 낯선 경험 후에 생긴 변화에 여자는 불안해진다. 여자는 남자에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고 설명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다. 붉은 실이 보인다는 말을 듣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남자는 최면후유증으로 육감이라고 불리우는 무언가가 깨어난 듯 싶다고 설명했다. 무의식의 세계로 갔다오면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육감이 발달되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는 설명에 여자는 납득이 되는 것도 같다. 여자는 생각한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이 실이 무엇일지. 인터넷을 검색한다. 인연의 실이라는 내용이 보인다. 클릭한다. 내용을 살핀다. 인연, 운명, 반쪽, 연인같은 단어가 반복된다.
정해진 날에, 정해진 시간에 남자를 만나러 간다. 남자는 여전히 매너있고 친절하다. 남자의 손가락을 바라본다. 여전히 실이 묶여있다. 실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반대쪽 끝에는 여전히 자신의 손가락이 있다. 인연, 운명, 반쪽, 연인같은 단어가 머리에서 떠오른다. 여자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낀다. 남자는 여자를 걱정한다. 여자는 아무 일도 없다고 둘러댄다. 붉은 색의 실은 계속 여자의 눈에 밟힌다. 인연, 운명, 반쪽, 연인이 계속 멤돈다. 여자는 당황한다.
상담은 계속된다. 여자는 남자를 찾는다. 만날수록 남자가 괜찮아보인다. 친절하고 매너도 있다. 남자를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간다. 어느날 남자가 저녁식사를 제안한다. 사소한 약속이 있었지만 취소한다. 남자와 식사를 한다. 남자가 안내한 장소는 분위기가 괜찮았다. 남자에 대한 호감이 높아지는 것 같다. 상담 이외에 사적으로 만나는 횟수가 늘어간다. 시간이 길어진다. 여자는 마음을 굳혔다. 남자를 집에 소개한다. 부모님은 탐탁치않게 여긴다. 하지만 여자는 계속 부모님을 설득한다. 부모님은 여자의 지속된 설득에 포기하는 듯 싶다. 

남자는 결혼식 준비를 하며 황홀함을 느꼈다. 꿈에도 그리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사실 고작 실 한가닥이 보이게 만든것이 이리도 큰 효과를 낼 줄은 몰랐다. 남자가 생각했던 수많은 계획중에 하나였던 인연의 실이 결국 이렇게 목적을 이루어주었다. 이제 여자는 자신의 소유였다. 여자는 실을 철썩같이 믿고있었다. 실이 있는 이상 여자는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남자와 여자는 세상에서 맺어준 인연이다. 여자는 운명을 믿는다. 남자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식장에 입장하는 여자를 보며 눈물을 흘릴 뻔 했다.

남자는 변했다. 아니, 남자는 변하지 않았다. 남자는 여전히 여자를 사랑한다. 사랑하고 관심갖고 집착한다. 남자의 집착은 여자를 힘들게 한다. 남자는 여자의 모든것을 알려고 한다. 무의식중에 한 여자의 행동 하나에 온갖 이유를 갖다붙여 고민한다. 여자의 웃음 한번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여자는 남자의 삶에 전부였다. 남자의 세상의 전부였다. 하지만 남자는 세상이 무너질까 봐 사라질까 봐 무서웠다. 남자는 여자에게 집착했다. 

여자는 힘들었다. 친절과 예절을 갖추었던 남자는 변했다. 여자의 시선 한번에, 여자의 손짓 한번에 질투하고 분노했다. 여자의 모든 행동에 지나친 관심을 갖는 남자의 모습을 여자는 미쳤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웃음이 무서웠다. 남자가 다가오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때마다 붉은 색 실은 여자의 눈에 밟혔다. 남자는 여자의 인연이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자신의 반쪽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묶여있었다. 끊을래야 끊어지지 않는 인연의 실은 여자의 마음을 몇 번이고 붙잡았다. 여자는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남자는 도를 더해갔다. 여자의 시선이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조차도 질색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외출을 막았다. TV 또한 없애버렸다. 여자는 남자만의 것이었다. 남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여자를 보거나 만져서는 안됐다. 여자의 가족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남자는 여자가 가족들과 연락하는 것을 막았다. 

여자는 지쳐갔다. 바깥이 보고싶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싶고 가족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가 불같이 성을 낼 때면 너무나도 무서워서 남자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남자가 날뛸 때 같이 흔들리는 붉은 실이 여자를 더욱 주눅들게 했다. 도대체 하늘이 자신에게 왜 이런일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자는 너무나도 힘들었다.


남자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여자를 부르는 것이었다. 여자의 대답을 들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하루의 피로가 모두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 후에 여자의 얼굴을 보면 천국에 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날따라 여자의 대답이 없었다. 남자는 다급하게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조급해졌다. 집안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녔다. 안방, 작은방, 서재, 화장실 어느 곳에도 여자는 없었다. 남자는 지독한 배신감에 휩싸였다. 도대체 어떻게 여자가 운명을 거슬렀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집안 구석구석을 훑어봤다. 남자는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여자의 집으로 찾아갔다. 문을 부술듯이 쳐들어갔으나 여자는 없었다. 여자가 갈만한 곳을 모두 뒤져봤다.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남자가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지친 목을 축이려 부엌에 들어섰을 때 남자에게 보인것은 식탁위에 놓여진 손가락 하나였다. 여자의 왼손 약지였다.


덧. 밤산책하면서 떠올랐던 이야기들, 이제 끝!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00:30 

 

상병 이우중 
  허허허. 잘 읽었습니다. 

붉은 실은 칼로 잘 안 잘리던 모양이네요. 허허. 2008-11-27
16:08:14
  

 

병장 이충권 
  저도 헤이즐럿 향은 좋아하는데 헤이즐럿 커피는 맛이 없어서 별로인..허허 
연애소설도 좋아하고 추리소설은 머리아프고 영화좋아하고 액션게임좋아하고 
몸치이고 바이올린같은 악기의 선율을 좋아하는... 어째 저랑 닮은게 많은?! 2008-11-27
16:16:28
  

 

병장 정영목 
  굿. 

다만, 짧은 용량에 베드 엔딩으로 끝내려는 의도가 강했던 것인지 개연성이랄까, 이런 것이 조금 아쉬워 보이네요. 

그나저나 송기화 님의 글은 단편집 마냥 모두 묶어서 가지로 보낼 필요가 있는듯. 2008-11-27
16:24:50
  

 

상병 이우중 
  다음 번 책마을 특집은 
송기화 선생 단편선? 허허허. 2008-11-27
16:28:30
  

 

일병 송기화 
  우중님/사실은 여자가 작두와 같은 판대기에 앉았다가......(음?) 
충권님/앗, 그러면 전 엄청 탁월한 묘사를 한건가요?(웃음) 
영목님/전 정말 길게는 못써요(울먹) 제 글은 모두 묶더라도 장문 하나와 비슷한 길이가 되려나요(웃음) 2008-11-27
16:30:10
  

 

상병 이석현 
  재밌네요.(웃음) 

인연의 끈이라 - 그런게 눈에 보이면 어떤 느낌일까요? 2008-11-27
17:08:38
  

 

병장 홍성기 
  좋은데요, 한국적 색채도 적절히 가미되어 있고. 김기덕 영화가 생각납니다. 2008-11-27
18:42:15
  

 

상병 이준혁 
  인연은 닿아있지 않았고 결국 헤어질 운명이었던 거군요. 좋은내용입니다.(웃음) 2008-11-27
20:46:24
  

 

병장 이동석 
  우와우- 붉은실과 최면을 조합하니 남자의 집착-이 이리 새롭게 보이는군요. 선명한 색채이미지가 남자의 집착과도 잘 어울립니다. 머리속에 이야기가 그려지는듯하니, 

이거, 역시 기화님이랑 영화를 찍어야겠습니다. 허허- 2008-11-27
21:34:34
 

 

병장 정병훈 
  색깔있는 기화님의 글이 부럽네요. 
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부러워 쿠오오- 

아- 바쁘다. 주말에나 만나요.(웃음) 2008-11-27
22:36:07
  

 

병장 김현민 
  잘읽었습니다. 맛깔나네요. 하하. 2008-11-28
07:10:01
  

 

일병 송기화 
  석현님/보이면 아주 죽을맛이지 않을까요?(웃음) 
성기님/오오, 아주 과한 칭찬이십니다. 김기덕의 영화라니, 그런 느낌 좋아합니다. 
준혁님/남자가 강제로 맺으려 한 인연이니까요. 남자가 좀 심했죠(웃음) 
동석님/와우, 저 그러면 찍을 때 이것저것 트집잡아도 되나요?(웃음) 
병훈님/이거이거, 엄청 바쁘신 가 봐요. 그래도 틈내서 읽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현민님/맛깔난다니, 엄청난 칭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이상, 출근도장입니다(웃음) 2008-11-28
07:36:12
  

 

병장 윤영돈 
  와우, 좋은데요. 

저도 기화님을 탐내고 있습니다.(웃음) 2008-11-28
14:35:16
  

 

병장 이동석 
  제가 더 탐내기에 추천-과 

가지로- 2008-11-29
00:49:52
 

 

병장 손정훈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가지로 2008-12-29
16:2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