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선택 바깥이야기.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8-11-13 19:39:50, 조회: 221, 추천:0 


세계장들의 정기모임이 열렸다. 오랜만에 모이는 것이었지만 각 세계장들은 반가움보다는 불편함을 느꼈다. 그들은 대부분 합격자가 없다는 보고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각 세계장들은 합격자가 없다는 창피한 보고를 해야하는 것이 자신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있지만, 그것 또한 심각한 문제였다. 어차피 많아봐야 하나, 둘 있을 합격자를 두고 격한 토의를 벌이게 될 것이었다.

아니, 회의는 예상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186번째부터 시작한 각 세계의 주인들의 보고는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결국은 합격자가 없다는 말로 끝났으며 회의장의 분위기는 점차 무거워졌다. 결국 마지막 참가자조차 합격자가 없다는 말로 보고를 마쳤을 때 넓은 회의장은 적막에 휩싸였다. 가장 오랬동안 하나의 세계를 맡았으며 같은 이유로 이 회의의 의장을 맡고있는 186번째 세계장이 말을 꺼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요?
넓게 보지 않으면 원형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수많은 세계장들이 모두 침묵했다. 사실 그들 또한 오래전부터 같은 문제로 고민해왔지만, 명쾌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 회의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세계장이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테스트에 통과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으며 그들은 모두 그 테스트를 거쳐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테스트에 합격하는 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왜 그들은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할까요?
세계장이 대리자를 통해 그들 세계의 주민을 시험하는 테스트는, 한가지의 조건만 만족한다면 합격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원할 것.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아예 세상을 뒤엎어버릴 만한 결정을 내리는 자는 합격이었다. 객관적 평가를 위해 100억 이상의 생명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면 합격으로 간주된다.(미생물이 포함되기 때문에 생각보다는 쉽다.) 합격된 자는 회의에 참석할 기회가 주어지며 그곳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종의 청문회를 통해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될 자격을 얻는다.
-상상력이 부족한 것 아닙니까?
49281번째의 세계장이 대답한다. 그는 그래도 꾸준하게 합격자를 데리고 오는 축에 속한다. 그렇기에 그의 대답은 참가자들의 주의를 끌었다.
-상상력의 부족이 합격자 저조의 이유라고요?
186세계장이 노련한 의장답게 49281세계장의 대답을 잡아 회의장 전체에 퍼트린다. 
-세계장들이 맡은 세계들이 비슷비슷하니 각 세계의 주민들 또한 비슷비슷한거죠.
세계장들이 맡은 세상은 각각 별개의 공간이다. 다만 세계장이 원래 지내던 출신지와는 연관이 있다. 부모와 자식사이랄까, 그가 바꾸고자 했던 부분이 바뀐 세계를 담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애초에 진화과정을 바꾸고자 했을 경우에는 원래 지내던 세계와 생태계 자체가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맡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역사의 커다란 한 지점-예를들어 전쟁이나 재난-을 바꿀 경우에는 새로운 역사만 있긴 하겠지만 세계 전체로 보았을 때는 큰 변화가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세계장들은 테스트 때 생명의 기원이나 진화를 떠올릴 정도로 정신나간 자들은 아니었다.
-해결을 위해서는 세계장들이 세계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829세계장의 제안에 약간의 소란이 생겼다. 하지만 광대한 회의장의 크기를 생각하면 거의 난동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세계장이라는 것은 신과는 다른 직책이기 때문이다. 신이 세계에 개입하여 변화시키는 느낌이 강하다면 세계장은 자신이 한 선택을 책임진다는 느낌이 강하다. 자신이 선택하여 생겨난 세계를 관찰하고 관리하는 역할이 주어진다. 신이 숲 전체를 맡은 숲지기라면 세계장은 자신이 맡은 나무 하나를 예쁘게 기르고 정돈하는 정원사 정도의 권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세계로의 개입을 요구한 것은 신들에 대한 월권행위로 해석될 수도 있다.
-무리한 요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합격자가 줄어드는 것 뿐만 아니라 멸망하는 세계장들 또한 늘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또한 세계장들이 안고있는 고민거리였다. 몇몇 극도로 불안한 세계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원하는 합격자들이 흔하게 나왔지만 이들이 원한 세상은 대부분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비슷한 이유로 멸망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연쇄적으로 세계가 멸망해버리니 세계장들의 수가 줄어드는 것 또한 당연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에 끝없는 애정을 가지고 있는 세계장은 멸망해버린 세계를 되살리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지만 그것은 신의 개입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겠지만, 실현시키기가 상당히 힘든 방법이군요. 잘못하다가는 능력없는 중간관리자들이 자신들이 노력할 생각은 하지않고 본래 소유주에게 개편만 요구한다고 해석될 수도 있겠어요. 이 방법은 최후의 방법으로 놔둡시다.
186세계장이 중재에 나선다.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급히 막아야한다는 186세계장의 생각은 옳았지만 너무 급하게 행동했다.
-그렇다면 다른 대안이 있습니까?
바로 원성이 돌아온다. 단지 비꼬는 의미만이 담겨있는 발언이다.
-일단 테스트를 받을 주민을 조금 더 신중하게 선정하는 것이 좋겠지요. 세상을 바꿀만한 능력과 포부가 있는 자라면 테스트에 쉽게 통과하겠지요.
-그렇다면 나의 세계는요?
근본적인 문제였다. 세상을 바꿀만한 능력이 있고 자격이 있는 주민에게 테스트를 받게 한다면 통과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런 주민을 세계장으로 만들어버린다면 자신이 맡은 세상이 변화할 가능성을 하나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세상에 무궁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세계장들에게는 뼈아픈 손실이었으며 두고두고 돌이켜보며 후회할 일이었다.
-새로운 세계장과 자신이 맡은 세계의 발전. 두 가지를 두고 저울질을 하는 것이 문제로군요.
-도대체 세계장이 얼마나 필요한 건가요?
사실 이미 세계장의 수는 6자리수가 넘었고 그것은 같은 수의 서로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신은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많은 세상을 만드는걸까요?
회의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신에게서 권리를 위임받았지만 신이 원하는 바를 모르기에 나아갈 바를 모르는 세계장들은 생각에 잠겼다. 침묵의 무게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피조물의 다양성을 보시는 거겠죠.
71930세계장이 침묵을 걷어낸다.
-수만의, 수십만의 가능성을 보시는거겠죠. 자신의 피조물에게 질리지 않도록.
-질린다고요?
이번 발언의 반향은 컸다. 자신이 맡은 세상에 질린다는 말은 세계장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단어선택이 서툴렀군요.
분위기를 알아채고 금새 정정한다.
-신께서는 피조물인 우리를 아끼실테지요. 우리가 자신의 세계에 갖는 것 만큼의 애정을 우리 모두에게 주고 계실겁니다.
세계장들이 수긍한다. 직접 모습을 보이지는 않지만 세계를 돌보는 세계장들에게는 신의 애정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일을 가끔 목격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만큼 안절부절 못하고 계시겠지요. 피조물들이 이리로 가면 어떻게 하나, 저리로 가면 어떻게 하나, 저러다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또한 세계장들이라면 쉽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신께서는 우리 세계장들을 대리로 내세우신 게 아닐까요?
세계장들은 이해했다. 자신들에게 그럴 능력이 없기에 하지 못할 뿐이지 능력만 주어진다면 그들은 자신의 세계에 하루에도 수십번씩 개입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기에 이도저도 아닌 개입이 될 것이다.
-자신의 어린 피조물들이 신의 무한한 개입이 아닌,  그저 무한한 애정 속에서 오롯이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피조물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으며.
세계장들은 침묵했다. 하지만 아까와 같은 침묵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세계에만 애정을 쏟을 것이 아니었군요. 문제는 해결된 것 같습니다만.
186세계장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의논이 필요한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마무리짓는 말투가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맡은 나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가 되기만을 바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우리가 맡은 나무들이 모여 가장 아름다운 숲을 이루도록 해보죠.
세계장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떴다. 아마 다음 모임때에는 새 얼굴들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덧. 쓰다보니 이야기는 안드로메다로 갔군요. 숑숑~(도망)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8:58:24 

 

병장 정병훈 
  기화님의 글 답지 않게(격한반전), 조금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군요? 
흐흐흐. 기화님은 역시나 꾸준합니다. 제일 꾸준한거 같아요! 글 잘 보고갑니다. 2008-11-13
20:35:09
  

 

병장 김기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를 읽는 듯한 문체와 아이디어.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건필하시길. 2008-11-13
22:13:44
  

 

병장 김민규 
  결말이 따뜻합니다. 세계관이랄까, 신神에 대한 관점이랄까, 생각해볼 거리가 많네요. 잘 읽고 갑니다. 2008-11-14
09:35:24
  

 

병장 김민규 
  -신께서는 피조물인 우리를 아끼실테지요. 우리가 자신의 세계에 갖는 것 만큼의 애정을 우리 모두에게 주고 계실겁니다. 
세계장들이 수긍한다. 직접 모습을 보이지는 않지만 세계를 돌보는 세계장들에게는 신의 애정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일을 가끔 목격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만큼 안절부절 못하고 계시겠지요. 피조물들이 이리로 가면 어떻게 하나, 저리로 가면 어떻게 하나, 저러다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또한 세계장들이라면 쉽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신께서는 우리 세계장들을 대리로 내세우신 게 아닐까요? 
세계장들은 이해했다. 자신들에게 그럴 능력이 없기에 하지 못할 뿐이지 능력만 주어진다면 그들은 자신의 세계에 하루에도 수십번씩 개입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기에 이도저도 아닌 개입이 될 것이다. 
-자신의 어린 피조물들이 신의 무한한 개입이 아닌, 그저 무한한 애정 속에서 오롯이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피조물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으며. 

아아, 좋네요. 2008-11-14
09:36:31
  

 

병장 박윤수 
  민규님은, 마음에 드는 구절을 잘 찾으시는거 같아요! 헷. 2008-11-14
13:57:40
  

 

병장 이동석 
  우오오오- 2008-11-19
15:5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