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선택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8-11-11 12:42:53, 조회: 241, 추천:0
'그것'은 갑자기 나타났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실 남자가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것'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세상이 잿빛으로 변하며 정지해 버렸으니. 하지만 남자는 그 당황을 미처 표현할 새도 없었다.
[너는 선택되었습니다.]
말투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새도 없었다.
[너는 얼마나 지났던, 어떠한 상황이었건, 단 한 가지의 일을 네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남자는 자신의 당황을 표현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누구죠? 이건 뭐구요? 뭐가 어떻게 된거냐구요?"
[이것은-대리자-입니다.]
'그것'이 말했다. 상당한 쇳소리였다.
"대.. 대리자요?"
[그렇다. 대리자 입니다. 대신하여 의사를 전달하러 보내졌습니다.]
남자는 혼란스러웠지만, 아직 논리는 간직하고 있었다.
"대신? 누구를 대신한다는 거죠?"
[-나-를 대신한다.]
대리자의 입-으로 추정되는 것-에서 나온 '나'라는 말에는 남자가 살면서 들어온 어떠한 말보다, 보아온 어떠한 것보다, 느껴본 어떠한 무엇보다도 확고한 존재감이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존재감은 남자를 까마득히 주눅들게 하면서도 또한 아찔할 정도로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압도적이었다.
[자, 생각하라. 어떠한 과거를, 상황을 바꿀 것인지를. 질문의 기회는 없습니다. 결정하라.]
남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방금의 '나'라는 호칭에서 느껴진 압도적인 존재감은 남자에게 믿음을 주었다. 남자가 어떠한 과거를 선택하여, 어떠한 상황으로 바꾸던지간에, 그것은 절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남자는 생각했다.
남자는 저번주에 놓친 복권의 당첨번호를 기억해냈다. 사소한 오해로 헤어진 애인을 생각했다. 승진이 걸려있던 접대를 떠올렸다. 드높던 꿈이 꺾였던 사회로의 첫발을, 정말 인생이 걸려있다고 생각했던 대입시험을, 어설펐던 첫사랑을 그는 회상했다.
그것을 바꿀 수 있다.
복권에 당첨될 수도, 헤어졌던 애인과 행복하게 지낼 수도, 승진을 할 수도, 당당한 사회인이 될 수도, 남부럽지 않은 대학에 들어갈 수도, 아직도 아련한 첫사랑과 함께할 수도 있다.
남자는 생각을 이어갔다. 생각의 범위를 넓혀갔다.
종교를 바꿀 수도 있다. 국경을 바꿀 수도 있다. 전쟁에 휘말려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 반대로 전쟁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세상의 권력점을 옮길 수도 있다. 피사의 사탑이 똑바로 서있게 할 수도 있다. 이스터 섬에 모아이 대신 하루방이 서있게 할 수 있다. 맙소사, 전지전능. 남자는 단 한 번, 신이 될 수 있었다.
남자는 계속 생각했다.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리고, 추스리고, 고르고, 보완하고, 지우고, 다른 가능성을 다시 떠올렸다. 자신에게 주어진 무한한 가능성은 그를 고취시켰다.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피라미드를 원뿔모양으로 만들수도, 스핑크스의 얼굴을 자신의 그것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과거의 누가 어떻게 만들어낸 일이던, 얼마나 위대한 업적이던 간에 자신의 결정 한번에 무효로 돌아갈 수 있다. 쉼없이 이어지던 남자의 생각이 멈칫한다.
자신에게 그럴 권한이 있는지 생각한다. 수십, 수백, 수천명이 수년, 수십년, 수백년에 걸쳐 이룩한 역사를 판단할 자격이 있는지를, 자신의 알량한 잣대로 인류의 역사를 바꿀 자신이 있는지를. 용기가 사라진다.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60억명 중 한명, 그리고 수많은 선조들을 포함하면 더욱 조그마한 자신이 결정하기엔 너무 벅차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생각의 범위를 좁힌다. 변화를 자기 자신에 한한다면. 자신의 인생 정도는 손쉽게 바꿀 수 있다. 꼴보기 싫은 직장상사를 자신의 밑에 둘 수도 있고, TV에서나 보던 여자를 자신의 부인으로 만들 수도 있다. 한순간에 통장에 있는 잔고에 0을 4개정도 추가할 수도 있다.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멈추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렇다면 친구들은 그대로 내 곁에 있을까? 아닐것이다. 자신이 세계 최고의 재벌이 되었어도 그와 함께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을 함께하던 이들이 어울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그 자신이 생각하더라도 이상했다. 힘들때도 많고 더럽고 비참할때도 있지만, 자신이 살아가며 쌓아온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살면서 만나온 사람들은 크거나 작거나 그에게 가르침을 주었고, 살면서 겪어온 일들은 남자를 조금씩 단련시켜 주었다. 자신이 걸어온 길에 깔아둔 나름의 자부심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슬며시 거부감이 고개를 든다. 하지만 이 다시는 없을 기회를 사용하지 않고도 후회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더러운 일을 겪을 때마다 오늘을 떠올리며 진저리치지 않을까?
남자는 결정한다.
"대리자님."
[그래. 결정했습니까?]
"예, 결정했습니다."
[무엇을 바꿀것인가?]
"대리자님, 당신을 만났다는 사실을 없애겠습니다. 저의 기억에서 지워주십시오."
'대리자'는 그에게 의지를 내린 '나'를 찾아가 보고한다.
-그래, 또다시 거부했단 말이지.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결단의 기회를 포기하였습니다.]
'나'는 인간으로 치자면 머리를 감싸쥐는 자세를 취한다. 한숨을 쉬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한다.
-우리의 가엾은 어린양은 도대체 언제까지 목동의 결단에만 따를 셈인가. 어떠한 일이라도 자신의 결정에 자신이 책임지는 목동이 될 기회를 언제까지 포기할 셈인가. 도대체 언제까지 어리광을 부릴 셈인가.
'나'는 절망을 한 것처럼 느껴진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8:58:09
상병 이우중
흠. 멋져요. 히히.
기화님 글 중에 하나쯤은 책가지에서 보아도 괜찮겠다 싶은데 글이 다 비슷비슷한 즐거움을 주는 것 같아서(단언코 욕이 아닙니다) 고민고민했었는데요,
이건 가지로 가면 좋겠어요. 허허.. 2008-11-11
12:50:25
0676067649
저는 여중앞에서 넘어진걸 지우겠어요 - 2008-11-11
13:44:14
상병 이우중
0676067649/
한철님이시죠. 흐흐흐.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2008-11-11
13:49:47
병장 윤한철
어허 ,
지금 군번이 이름대신 나와서
지우려고 하는데 비밀번호가 틀렸다고
자꾸 그러네요 (울음) 2008-11-11
13:50:46
병장 정병훈
이 글에서도 기화님의 느낌이 나는군요. 좋아요 아주.하하하
저도 많이 노력해야겠습니다.
얼른 분발해서 i아가야겠어요. 2008-11-11
15:27:14
병장 김진석
생각이 많은 이에겐 정말 쥐약같은 고민이 겠군요.. 만약에
'그것'은 갑자기 나타났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실 남자가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것'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세상이 잿빛으로 변하며 정지해 버렸으니. 하지만 남자는 그 당황을 미처 표현할 새도 없었다.
[너는 선택되었습니다.]
말투가 이상하다 것을 느낄 새도 없었다.
[너는 얼마나 지났던, 어떠한 상황이었건, 단 한 가지의 일을 네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중략...
[자, 선택하라. 어떠한 과거를, 상황을 바꿀 것인지를.. 그대의 과거중 5가지를 보여주겠습니다. 질문의 기회는 없습니다. 하나를 고르십시오.]
이랬다면 그는 한가지를 선택했을까요?
그리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고 살아갔을지도 모르겠군요.
가끔은 단순함이..
선택의 단조로움이..
간단한 선택의 미학에
감사해야할때가 있지 않을까요?
5지선다형 문제를 주면 금방 풀자신이 있는데(푸는게아니고 찍는다는게 맞겠군요)
저는 주관식이나 서술형이 나오면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되는 이유는 뭘까요?
왠지 이글의 '그'가 자신같다고 생각하는분은 저뿐인가요? 2008-11-11
21:42:14
병장 장태순
그렇다면 날 신으로 태어나게 해주오. 2008-11-12
16:3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