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무라카미 하루키와 성 바울로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6-13 052553, 조회 161, 추천0 

0.
[그러나 이윽고 썰물이 되자, 나는 혼자 모래밭에 남겨져 있었다. 나는 무력해서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슬픔은 깊은 어두움으로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울곤 했다. 운다기보다 마치 땀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다.
  가즈키가 죽었을 때, 나는 그 죽음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체념으로 익혔다. 혹은 익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런 진리였다.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떠한 진리도 어떠한 성실함도 어떠한 강함도 어떠한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 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 그 밤의 파도 소리를 듣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매일처럼 골똘히 그런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위스키를 몇 병씩이나 비우고, 빵을 씹고, 물통의 물을 마시고, 머리를 모래투성이로 만든 채, 배낭을 메고 초가을 해안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었다.](주1)

1.
  제가 '상실의 시대'(원제는 물론 노르웨이의 숲이지만, 저는 '상실의 시대'라는 번역본만을 읽었으므로 이렇게 호칭하겠습니다)를 읽었을 때, 저는 아직 고등학생이었고 신앙심이라는 게 그래도 조금은 있었던 나이였습니다. 이때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소름이 끼쳤는데, 소설 자체도 그렇거니와, 아무튼 이 강렬한 구절이 전해오는 어떤 분위기나 세계관의 편린들이 저에게 일종의 '영적 도전'을 던져주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목사님이 평소에 설교하시던 '죄성'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싶은 깨달음이 왔던 것이죠. 그래서 저는 아, 예수님이 왜 우리를 위해 못박혀 죽으신 다음에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 살아나셨는지 알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에 못박힌 다음에 부활했다는 게 왜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의 '복음'인지에 대해 묘하게 납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나오코와 가즈키의 죽음을 부여안고 몸부림치는, 바로 와타나베를 위한 게 아니었을 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와타나베 같은 불쌍한 남자를 구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 것이라고 말이죠. 성령의 감동이 임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농담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농담만은 아닙니다. 다들 알다시피 '상실의 시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 중 가장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탈이데올로기 시대로 넘어가는 문턱에, '연애'라는 새로운 보편사적 이념의 과녘을 정확하게 맞췄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됩니다. 일본의 경우 그것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처음 상실의 시대 열풍이 불었을 때 역시 우리도 정확히 그러한 수순을 밟아가고 있었던 때였을지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소설 자체도 그렇고 인용한 구절에서는 뭔가 우리와 동시대적인 어떤 감수성을 제대로 건드리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연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후-하루키 세대의 통속적인 젊은 감각의 소설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작중에서 화자는 심지어 그것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루키 소설을 단순히 세대교체적인 어떤 문턱으로만 볼 때 놓치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루키 이후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냐면은 전혀 그렇지가 않는 것입니다. 

  확실히 하루키 소설은 이 '연애소설'을 기점으로 더 이상 사회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마치 '전공투'를 거부하는 주인공처럼, 거기서부터 퇴각합니다. 하지만 거기에서부터 이후 일본 소설들의 단순한 연애담이나 풍속적(낭만적)인 것에 대한 서술만이 나오는 것이냐면은 또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볼 때 하루키는 세대론적인 작가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봤을 때 하루키는 정확히 어떤 '보편사적인 이념'을 다루고 있었고, 이것이 이 작품을 단순한 상업적 성공을 넘어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만드는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이념'이란 단순히 '연애', 더 정확히 말해서, 소설 내에서 반복되는 '삼각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보다 근본적인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키와 진지하게 대결하기 위해서는 그 '근본'을 따지는 게 우선일 것입니다.

2.
  가령 상실의 시대 밑바탕에 깔려 있는 '연애'를 단순한 경험적인 연애담으로 볼 때, 혹은 거기에 대한 어떤 회한어린 회고조의 서술태도만을 볼 때, 그것은 단순히 달콤한 우수로 가득 찬 연애선배의 경험담으로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말하자면 미도리나 나오코 그리고 레이코와 같은 인물들은, 레이코 자신이 반어적으로 언급했듯이, '센티멘털리즘의 지평'에서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나오코의 자살은 단순히 청춘의 성장기적 아픔과 상실의 한 요소로 환원되고 맙니다. 가즈키와 나오코는 성장의 아픔을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나 역시 그들의 아픔에 동참할 겨를도 없이 어찌할 바를 모르다 어느새 나이가 들어 있고, 당신과 나를 나누는 거리는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더욱 멀어져만 간다, 삶은 상실의 연속이며 오직 희미해져가는 기억 속에서만 상실했던 것의 소중함을 어슴푸레 깨닫는다, 그러나 기억은 희미해져도 그때 당시의 절실한 격통은 지금도 확실하다, 뭐 그런 식이지요. 확실히 성장소설에 관한한 하루키는 하나의 전범을 제시했고, 오늘날도 그런 것이 유행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여기에는 어떤 동일시의 태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성장소설 류 멜로드라마로 포장된 외관 이면을 볼 때, 사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나오코'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말하자면 여기에는 연애담의 디테일에 대한 경험적인 공감이라기보다는, 나오코라는 고유명에 담지되어 있는 어떤 '가능성'이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나오코는 '죽음'에 대한, 그것도 매우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학적 환유입니다.(나오코는 죽음을 안은 채 거기서 살고 있었다412p) 그리고 이 죽음은 물론 어떤 경험적인, 단순히 비참하고 끔찍하거나, 처연하게 슬픈 죽음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죽음을 내포한 삶, 그것이 언제나 현실적 가능성으로 엄존하고 삶을 압도하게 만드는, 어떤 삶 내부의 구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음은 현실화 여부와 무관한 하나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죽음'에 관한 하나의 태도를 '발명'하는 절차입니다. 나오코는 단순히 나랑 한 번 밖에 X스도 안해주고 목숨을 끊은 무정한 여자친구가 아니라, 와타나베의 삶 속에 죽음을 들여오고, 정확히 그런 '가능성'으로서 살아 있는 '죽음'을 발명하는 하나의 형상形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 속에) 죽음이 들어왔으니...(주2)라고 했을 때 정확히 염두에 두었던 게 아닐까 생각 들 정도로 말입니다. 바울에게 이 한사람은 물론 '아담'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죽음'을 들여왔으며, 현실적 삶 속에서 산주검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끔찍한 가능성, 인간을 꼼짝 못하게 하는 바로 그 죄성을 발명한 장본인이었습니다. 물론 이 '아담'은 이러한 '가능성'의 환유로서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나오코가 정확히 그러한 죽음의 형상이듯이 말입니다. 

3.
그런 의미에서 분명히 이 구절은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다루었던 모든 '주제'(삶, 죽음, 진리,)들의 절반 정도를 매우 훌륭하게 다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머지로는 율법, 죄, 구원을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절반'만으로도 그것은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복음이 무엇인지를 역으로 짐작케 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를 던져주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복음이 무엇에 유용한가에 대해 이야기하는지만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주3) 제가 상실의 시대를 읽고서 역으로 성경 구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던 계기는, 그것이 바로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선언의 의미를 새롭게 환기시켰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아직도 '복음'이라는 게 있다면, 상실의 시대 이후에 우리들의 삶의 표상을 강력하게 지배하는 '나오코'들이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어떤 가능성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데 있지 않을까요. 

  물론 이것은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의지에 관해서라면 와타나베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자기 나름의 삶의 준칙을 가지고서 나오코의 가능성으로부터 벗어나려고 고군분투합니다. 그는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삶을 결말짓는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주4)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든 긍정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잘 되지 않고, 그는 그런 과정 속에서 역으로 죽음이란 삶을 구성하는 많은 요인 중의 하나일 뿐이(주4)라는 깨달음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이야말로 바울이 죽음의 권세 혹은 육신의 길(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생각은 생명입니다(주5))이라고 명명한 게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것은 표준적인 성경 번역에서 '사망의 권세'로 읽히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볼 때 성경구절은 보편적인 날카로움을 잃고, 그것이 추구하던 바는 일종의 의학적 기적(불치병 환자가 가사상태로부터 살아남 등등)으로만 읽혀지게 됩니다.

  저는 사도 바울과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가장 잘 안 어울리는 저자들의 예기치 못한 '조우'를 이런 식으로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봤을 때 역시 두 저자가 가장 잘 읽힌다는 것은 저에게도 조금은 놀라운 사실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하루키를 단순히 어떤 유행으로만 읽히는 어떤 세대사적인 인물로 보지 않을 때, 이러한 조우가 가능해지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요컨대, 좀 더 '보편적인' 차원에서 하루키와 대결하려 한다면, 역시 바울이 아니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사실 바울이 다루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다루지 못한 나머지 '주제'는, '율법'과 '죄'일 것입니다. 그 이전에, 우리들은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죽음의 길' 혹은 그것의 권세가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봐야합니다. 논의를 축약하기 위해 바울에 대한 알랭 바디우의 논의를 인용하겠습니다

  율법은 욕망에 삶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율법은 주체가 죽음의 길 외의 어떤 다른 길에도 들어서지 못하도록 만든다.
   죄란 정확히 무엇일까 그것은 욕망 그 자체는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죄가 율법 및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죄란 자율성, 자동성으로서의 욕망의 삶이다. 율법은 욕망의 자동적 삶, 반복의 자동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요구된다. 왜냐하면 율법만이 욕망의 대상을 고정시키기고, 주체의 '의지'가 무엇이든 욕망을 대상에 묶어놓기 때문이다. 주체를 죽음이라는 육체의 길로 끌어들이는 것이 바로 욕망의 이러한 대상적 자동성이다.
  분명히 여기서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무의식(바울은 그것을 의지적이지 않은 것, 내가 원치 않는 것이라고 부르고 있다) 문제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율법에 의해서 고정되고 해방되는 욕망의 삶은 주체라는 중심축으로부터 이탈해 무의식적인 자동성으로서 완성된다. 그것과 관련해 의지적이지 않은 주체는 죽음을 생각해내는 것 말고는 달리할 수 있는 것이 없다.(주6)

4.
  사실 바울 자신이야말로 로마서에서, 율법에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으면 나는 탐심이 무엇인지를 몰랐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선취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욕망의 문제로 생각했던 것은 사실 전세계를 뒤흔들었던, 60년대 급진파의 사고에서 이미 두드러졌던 것입니다. 거기서도 '무의식의 해방'이 화두가 된 바 있습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70년대 초반의 '전공투' 활동이야말로 사실은 그러한 사고방식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들은 사실 여의치 않았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다시 퇴행해 버렸으며, 궁극적으로 '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에서 벗어나지 못함'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단순히 이전의 권위주의를 극복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일까요 물론 그것은 이전보다 철저하게 극복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는 것입니다.

  사실 법에서 해방된 삶을 의욕하겠다는 기획에서는 들뢰즈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들뢰즈는 신경증Neurosis과 정신증Psychosis의 차이를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주7) 신경증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억압하는 대신 온전한 현실감각을 돌려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콤플렉스는 리비도를 억압하는 데서 생기는 심적 장애와 불만들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감추고 숨겨야 현실에 더 잘 적응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것은 다음부터입니다. 역으로 정신증은 현실원칙을 무시하고, 다시 콤플렉스를 전면에 드러내는 광기를 의미합니다. 기묘한 것은, 현실적인 제약을 깡그리 무시해도 여전히 '콤플렉스'는 항수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오히려 심적 장애는 해방되기는 커녕 더욱 그 한계를 모르고 날뛰게 되고, 그 속에서 욕망은 더욱 위법적인 근친상간적인 것으로 변합니다. 다시 말해서 애미 애비도 몰라보는 몰대상적인 충동으로 변해버리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사실은 '위법'적인 측면에의 새로운 도착적 매혹으로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68 이후 붉은여단이나 적군단과 같은 극좌 테러리즘의 등장이나, 극단적인 성적 타락과 환각제에의 탐닉의 등장과 맞물려 있습니다.

  저는 이런 '곤궁'을 통해서 다시 사도 바울의 본래의 사유가 다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을 사실상 넓은 의미의 콤플렉스의 문제로 본다면 말이지요. 사실 바울이 말하는 율법도 이런저런 계율로서 율법을 비판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걸 비판해도 걸려들어버리고 마는 그런 율법의 다른 '어두운 측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상실의 시대의 화자와 더불어 그를 향유하는 독자들은, 이러한 신경증에서 정신증으로의 이행기에 있는 독자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와타나베를 사로잡고 있는 곤궁은 바로 그를 향유하고 있는 독자들을 사로잡는 곤궁이 아닌가요. 와타나베는 전공투의 패배에서 초연하기는커녕, 그것과 아주 깊숙히 연루되어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시작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전공투라는 신좌파 운동의 패배는 정확히 정신증으로 빠져버리는 실패의 이행기를 거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법을, 혹은 저들의 언어로 산학협동체를 혹은 제국주의를 부정한다 손 치더라도, 그것이 해방된 욕망을 낳기는 커녕 더욱 그것의 교착상태로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68혁명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유럽과 달리 일본에서는 그 실패가 더욱 처절하고 뼈아픈 것이긴 합니다. 말하자면 와타나베라든지 하루키라든지, 그를 심미적으로 향유하는 독자들은 이러한 패배를 어떤 의미에서 같이 향유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말하자면 신경증적인 존재에서 정신증적인 존재로 이행하면서, 그리고 그 상태에서 꼼짝없이 헤어나오지 못하면서, 와타나베나 우리들은, (나오코의) 죽음 말고는 달리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에 빠져버린 것은 아닐까요.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은, 정확히 그런 '죽음 말고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상태를 심미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멈추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바울을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측면에서입니다.

(주1)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413p
(주2)성 바울, 고린도전서, 15장 21절
(주3)성 바울, 로마서, 6장 9절
(주4)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412p
(주5)성 바울, 로마서, 8장 6절
(주6)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153p
(주7)Gille Delueze, Two Regimes of Madness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7-20
082842 

 

상병 김태완 
  잘 보았습니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숨기는 세태에서 거침없이 리비도를 드러내는 세태가 만연해진 현 사회를 상당히 비관적으로 보고 계시는군요. 리비도의 방임은 극단적 성적 타락이나 폭력을 낳고 죽음에 대해 개방성을 띄게하죠. 저도 상실의 시대를 향유하는 사람 중 한사람으로써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 필요없다. 죽으면 끝인데.'와 같은 생각. 참 위험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사고를 용인하면 범죄의 제국이 탄생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작가들도 그렇고 매체나 언론을 봐도 범죄에 대한 보도만 했지 그 이면에 고착화되고 있는 우리의 사상에 대해선 직시하거나 방향론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종교가 정신증적 존재로 가는 길을 미약하게나마 억제하고는 있지만 성경이나 경전에 내포된 비합리성을 고려할 때 이것이 원론적 문제의 해결책이 되진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울의 사유가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요. 당연히 산주검에서 생인으로 전환하기 위한 계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계기로써 바울의 것을 채택하는 것 또한 안일한 선택이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오히려 반작용을 일으킬 우려도 있다고 생각하구요. 

어디 '삶은 늘 죽음을 동반하므로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삶은 그자체로써 참 의미있다.'로 바꿔줄 묘안 없을까요. 2009-06-15
162105
  

 

상병 박원익 
  바울도 소시적에 비슷한 것을 고민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죽음을 향한 삶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계기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을 들고 나온 게 아닐까요. 그리고 그러한 사건을 통해 당대 로마 제국을 양분하고 있던 철학적 헬라-그리스 담론과 메시아적 신비주의적 유대담론에 대한 제3의 길을 제시했던 것이고요. 헬라인들의 눈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광기'에 불과했고, 메시아를 갈구하던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스캔들'에 비쳐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정확히 그러한 방식으로 시대의 급소를 건드렸고, 보편적 대의를 향한 충실성을, 말하자면 당대에 완전히 생소한 주체성을 '발명'했던 것입니다.(여기서 저는 어디까지나 알랭 바디우의 논의를 원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게 단순히 의지로 가능한 일은 아니고, 모종의 '사건'을 통해서만, 그 안에 충실하게 머물 때만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이 순전히 익명적이고 우발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불안정성에 (수학적으로)존재론적으로 기초해 있다는 알랭 바디우의 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사도 바울 역시 헬라인들에게는 우주론적 총체성이요 유대인들에게는 불가해한 기적과 예언의 능력이었던 '신'을 단순히 한 죽음에 앞에 무력한 '인간'이 자처하고 나선 것에서, 완전히 새로운 길을 예고하는 사건을 발견했던 것은 아닐까요. 사도 바울은 예수가 행한 이적이나 그의 언행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던 사람이고, 단순히 그가 일으킨 '사건'에서 새로운 길을, 새로운 주체성을, 새로운 조직을, 새로운 보편성(헬라인도 유대인도, 남자도 여자도 모르는 급진적 '보편성')을 철저하게 추구했던 것에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이 길은 우리에게도 열려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바울의 기획을 채택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가 당대의 담론과 정신사적 교착상태를 예리하게 포착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것을 정확히 포착해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획이 어찌 될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바로 그런 능력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삶은 그 자체로서 참 의미 있다'는 언명을 가능케 할 새로운 사건적 현장이 무엇인지, 그게 어디서 가능해지는지, 이런 점을 모색해야할 때라는 것입니다. 2009-06-16
093113
  

 

상병 진수유 
  정말 잘 읽었습니다. 2009-06-19
09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