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라캉 읽기의 어려움-세미나11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6-30 215548, 조회 116, 추천0 

우연찮게도, 책마당에서 홍명교씨가 밝혔듯이, 라캉 세미나11을 붙잡고 있을 때와 비슷한 시점에 저도 붙잡고 씨름하고 있는 와중입니다. 참으로 비옥하고 풍성한 책이며, 성경의 경우처럼 매 구절 하나마다 성령의 감동()이 서려있지 않는 게 없지만 역시나 난해하고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저와 같은 독자가 있다는 게, 많은 힘이 되는군요.

기본적으로 이러한 난해한 텍스트의 경우에는, 마치 숲에서 길을 잃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란 한 가지 방향을 잡고서 가능한한 멀리 나아가는 수 밖에 없듯이, 몇가지 독해 방향을 잡고서 독서를 진행해 나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1. 우선 라캉의 세미나는 말 그대로 '세미나'의 현장에서 채록된 텍스트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정합적인 논의나 논문형식의 글이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대화'의 구조를 가지고 있고, 당연히 그것은 당면한 쟁점에 대해 행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1917년 레밍의 편지들이나 사도 바울의 편지들이 당면한 즉물적 쟁점들에 대한 즉각적인 개입들이었듯이, 라캉은 어떤 쟁점들에 '개입'하기 위해 세미나를 통해 발언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미나11은 '성경'에 비유될만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세미나를 관통한 몇가지 쟁점들이란, 당시 라캉이 그가 행하던 강연이 논란을 일으켜, 프랑스 정신분석협회로부터 '파문'을 당한 정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때 라캉은 당대의 정신분석적 실천들이 모종의 몽매주의에 빠져 있다고 규탄했으며, 다시 프로이트가 자신의 탐구를 통해 발견했던 정신분석의 근본개념들에 대한 탐구로 돌아갈 것을 주창했습니다. 세미나 11이 다루는 이러한 '근본개념들'은 무의식, 반복, 전이 그리고 충동입니다. 라캉은 후대 정신분석가들이 프로이트 자신만큼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라캉 자신도 지적하듯이, 이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제스처가 담고 있는 문제성을 잘 생각해 봐야합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언제나 그것이 일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방증입니다. 말하자면 라캉은 요새 혈액형 심리학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미국(-일본)식 자아심리학과 정신분석적 실천이 구별불가능해지는 현상 속에서, 그것의 '위기'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거세불안에 대한 통속적 개념화들이, 현실에 대한 자아의 재적응 수단들로 간주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수단으로서라면 굳이 거세 콤플렉스를 거론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만인이 아는 바입니다. 그것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 혹은 정신분석의 종언이라고 할만한 것이 전면화되었다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굳이 정신분석이 아니어도 좋다는 사태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다면 라캉은 과연 정신분석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하자면 종언이라는 것은 언제나 굳이~가 아니어도 된다라는 어떤 사태에 결부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라캉은 여기서 어떤 위기감을 가지고서 다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회귀'로서가 아니라, 어떤 '개입'으로서 봐야할 필요성을 다시금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캉은 단순히 협소한 정신분석 실천 자체의 종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세미나11의 독서를 통해, 종언을 어떤 기회로 포착하는 라캉 자신의 개입이 무엇인지에 대한 윤곽을 그려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3. 그리고 라캉 자신이 서술했던 무의식, 반복, 전이, 충동의 근본개념들은 바로 이러한 개입의 윤곽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기서 저는 라캉 정신분석에 결부되어 있는 어떤 신비주의적 관행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대상a라든지 혹은 대타자라든지 하는 뭔지 모를 신비한 용어들은 어떤 구체적인 비평적 관행 속에서, 모종의 초역사적 가치(도덕적인 의미에서나 의미론상의 의미에서나)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다분합니다. 

  우리가, 다시 말해서 한국어 독자들이(이 점이 매우 중요한데) 라캉의 세미나11을 읽는 것에 어떤 의의가 있다면 바로 이러한 신비주의의 관행을 깨는 데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다시 상실된 욕망의 원인으로서 대상a라는 표현에 결부된 어떤 운명론적인 이미지, 대타자와 주체에 결부된 어떤 드라마, 등등에 우리가 더 이상 탐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미 책이 출간된지 한 세대가 지난 시점에서 우리가 겨우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점을 특히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해야하는 작업은, 그의 작업을 철저하게 '탈신비화'시키고서, 가령 라캉이 대상a라고 말할 때 도대체 어떤 것을 말하고 싶어했는지에 대한, 앞서 이야기한 대화적 맥락을 포착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저 유명한 라캉주의자 지젝의 작업과 합류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4. 다시금 우리 역시 각종 '종언'에 대해 이야기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근대민족 국가의 종언, 문단의 종언, 근대문학의 종언, 처녀총각의 종언, 기타 등등. 만일 라캉이 우리에게 여전히 가치가 있다면, 관건은 그가 정신분석의 종언을 개념화했던, 동일한 방식으로 어떻게 우리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당면하고 있는 모종의 종언을 '개념화'할 수 있느냐입니다. 오직 이런 방식으로서가 아니라면 라캉에 관한 숱한 논의들은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라캉은 실제 정신분석 실천에서, 분석가와 환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이' 현상에서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심각하게 느낍니다. 이제 분석이 뭔지를 조금 알만한 환자들은 더 이상 프로이트 시대의 히스테리 환자들처럼 고분고분한 방식으로 분석가에게 의지하거나 분석가에 대해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분석가와 환자 사이에서 어떤 '해방' 이뤄진 게 아니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그것이 프로이트 시대와 전혀 다른 심적 교착상태를 예증한다는 점에서, 그는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입니다. 독자들의 과제는 우리가 그러한 라캉의 문제의식을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재생할 수 있느냐일 겁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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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김예찬 
  그가 말하는 대상a라든지 혹은 대타자라든지 하는 뭔지 모를 신비한 용어들은 어떤 구체적인 비평적 관행 속에서, 모종의 초역사적 가치(도덕적인 의미에서나 의미론상의 의미에서나)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다분합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인문학 독자( =소비자)들이 자유로울 수 없는 함정인 것 같습니다. 일례로 씨네21 같은 영화 잡지만 잠시 훑어봐도 유사한 경향이 느껴지구요. 마지막 문단은 제 눈에 조금은 다른 맥락으로 들어왔네요. 

패러디하자면, '이제 이념이 뭔지를 조금 알 만한 사람들은 더 이상 이전 시대의 스포츠청년들처럼 이념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념과 청년들 사이에서 어떤 결론이 났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스스로의 문제의식을 점검하며 이를 또 다시 삶의 현장에서 재생해야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2009-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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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윤정기 
  '다시 프로이트로' 
제목처럼 라캉 정말 읽기가 힘듭니다. 저도 라캉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만, 일단 프로이트부터 모자란 머릿속에 충분히 개념화시키고자 노력중입니다. 
다만, 분석가와 환자 사이의 '전이' 그리고 '역전이' 등을 라캉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조금 알 수 있었던거 같네요. '탈신비화'의 작업은 비단 라캉뿐만이 아니라 프로이트, 그리고정신분석을 바라보는 현 시각에도 또한 그 잣대를 갖다대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관건은 그가 정신분석의 종언을 개념화했던, 동일한 방식으로 어떻게 우리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당면하고 있는 모종의 종언을 '개념화'할 수 있느냐입니다. 오직 이런 방식으로서가 아니라면 라캉에 관한 숱한 논의들은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라는 원익씨의 입장에 동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허허. 공부좀 해야겠어요(울음) 2009-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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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박원익 
  예찬마지막에 패러디한 부분은, 아무래도 '바디우주의'로 전향할 수 있는 어떤 지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웃음) 바디우가 '사건'이라고 말한 지점은 단순히 어떤 '이념'이 맞고 틀리냐를 떠나버린 현장 속에서 모종의 '결단'을 요구하는 곳이니 말입니다. 사실 이념이 죽었다기보다는, 어떤 이념이 가령 당신은 채식주의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는 그런 '선택'의 문제로 환원되어버린 지금 이 시점에서, 라캉이 말했듯이 돈이냐 목숨이냐라는 사례로 드러나는 '불가능한 선택'을 어떻게 되살리느냐가 관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기사실 오히려 저희들은 라캉의 용어들에서부터 조금 자유로워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라캉의 개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정확히 안다면 '도움' 정도는 되겠지요. 허허. 프로이트도 공부를 해야겠지요. 2009-07-01
135024
  

 

상병 진수유 
  잘 읽었습니다. 어렵네요.. 2009-07-02
094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