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나는 넘치는 것보다 조금 모자란게 좋다
상병 김형태 [Homepage] 2009-02-11 21:02:16, 조회: 116, 추천:0
나는 넘치는 것보다 조금 모자란게 좋다
공기에 밥을 덜어 넌다. 만화에서 나오는 동네 뒷산 같은 모양말고, 적당히 모자라보일 만큼. 반찬도 밥에 딱 맞게 모자라게. 천천히 먹는다. 꼭꼭 삼십번씩 씹어서. 허기가 달래질 정도로 배가 불러 졸리지 않을 만큼. 조금 모자란듯해도 몸이 가벼워서 일어나기도 쉽고, 밥먹고 담배 한 개피 갖기에도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주변사람들은 항상 식후에 뭐든 마시거나 먹는다. 그게 커피라면 죽어나고 아이스크림이라면 절로 형님소리를 낸다. 나는 마시거나 먹는걸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 굳이 마신다면 미지근한 물이 좋다.
처음부터 그런건 아니다. 언제나 끝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모든 것에 이유가 있다며 끝까지 파헤치는 것을 좋아했다. 내 감정을 표현하는데에는 어떤 필터도 달려 있지 않았으며 항상 직설적이었고 아주 진한 에스프레소나 단것들을 좋아했으며 매사 꽉 채웠다기보다 더러 지나쳤다. 남을 안아주는 나보다는 안기는 나를 상상했으며 역시나 내 속 깊이 있는 돌이키는 말보다 가장 가까이 있는 말을 하곤 했다.
제작년 여름이지, 항상 당신은 나에게 넘치는 마음보다는 넘칠 수 있지만 모자란 마음을 보여주었다. 꿈만 가득차있던 내 열정을, 꿈보다 마음보다 더 중요한게 있을 수 있다는 따듯함 속에 가득찬 냉정함으로 보여주었다. 이별이 싫어 발버둥치는 시간, 이별에 익숙해지는 시간동안 오랜시간 지내온 내 생활 습관, 사고방식까지 바꿔버렸다. 그 뒤로 난 마치 당신이 나에게 보여준 모든 것들이 내가 앞으로 모든 것들을 대할 때 해야하는 것처럼 내가 느낀 당신의 마음을 몸에 익히면서 살게 되었다. 내 마음은 허할지라도 먼저 내 몸이 허함에 익숙해지니 그 속에서 다른 기대라는 것이 생겨나고 더 큰 만족을 위한 모자람이 행복의 첫조건이 되어버렸다.
이별에 익숙해지는 시간들 중 혼자사는 당신에게 하얗고 조그만 화분을 준 적이있다. 멀리있어도 자꾸만 커져가는 내 마음속에 그 커지는 회의감을 느끼지 않도록 내 마음을 자주 자주 가지치기 했다. 내가 준 화분은 작은 화분에 불과할 뿐이었으니까. 어느순간부터 가지치기를 즐기기 시작했고 제 살을 떼어내는 아픔뒤에는 익숙해짐과 더 큰 행복이 기다릴 거라는 마음으로 만족하기 시작했다. 강한 것이 오래간다면 좋겠지만 아무것도 바라지도 바랄 수도 없는 조용한, 한켠에는 마음따뜻한, 언제든 강해질 준비가 돼있는 마음이 좋다.
다만, 한 티의 우려라면 그저 주저앉지 않길 바랄 뿐이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10:08:49
병장 김민규
언젠가 ex가 제게 작은 허브화분을 하나 준 적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그토록 열심히 가꾸고 공을 들였는데, 그가 미국으로 떠나고 나서 우리의 마음의 거리가 멀어짐과 함께, 그 죄없는 작은 생명도 사그라지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다짐을 했지요. 앞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더라도 화분만큼은 주지 말자. 나라도 그러지 말자.
두려움 때문일까요. 필연적으로 모든 관계가 언젠가는 깨지고 말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에서 오는 - 혹은 그 화분의 고달픈 생명이 숨을 다하는 모습에 나의 처지가 이입될 것이 겁나 그러는 것일지요.
이 쪽이든 저 쪽이든, 가지치기할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날 것은 아직은 꿈도 꾸지 못 하고, 최악의 상황을 막는 것만으로도 기적적인 기쁨을 느낄 것이 분명한 저입니다. 그만큼이나 그간의 관계의 실패들에 큰 트라우마를 갖고 있고요. 본질적으로 그와 내가 살아온 이십삼년의 완전히 다른 시간이 줄 간격을 고려하는 까닭이겠지요.
아, 무거워졌어요. 미지근한 물이라도 한 잔 마실까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