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겨울의 幻  
상병 이우중  [Homepage]  2008-10-24 15:23:15, 조회: 234, 추천:0 

너는 열 일곱살이었다. 나도 열 일곱이었다. 하지만 너는 나를 오빠라 불렀다.
처음 만난 날, 술자리에서였나 노래방에서였나 내 핸드폰에 씌어 있던 글귀 'Let it be'를 보고 네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이거 어떻게 읽는 거야? 아.. 그 팝송 렛잇비~ 렛잇비~ 그거? 나 이거 처음에 보고 레뜨 이뜨 베. 이렇게 읽었다?
라며 깔깔거렸지. 공고생이라서 그렇다면서.

너는 집이 전라도라고 했다. 그런데 왜 경상도까지 와서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그럼 너 같으면 고향에서 이런 일을 하겠냐고 대꾸하길래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너는 지금 의정부에 있다고 했다. 너의 목소리에서 너 역시 지금의 나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지루한 삶을 그저 살아내고만 있다는 느낌이 너무도 진하게 묻어났기 때문에 이번에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네게 빚진 것이 많다. 둘이서 도서관에 다니면서 너는 내가 배가 고프면 밥을 사주고 우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 술을 사 줬다. 어디에 가자고 하면, 거기가 산 속에 있는 작은 유적일지라도 군소리 없이 따라와 주던, 네가 있어서 그 해 겨울은 춥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단순한 이상기온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걸 너의 결혼식장에서야 깨달았다. 네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나 혼자 매일 도서관을 지킬 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참, 너는 나의 뺨을 때린 적이 있다. 물론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 때는 공부를 다시 시작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자 하는 원대한, 사실은 별 것 아닌, 어찌 보면 학생으로는 당연한 목표가 있었기에 뺨을 때리며 너의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네게 무릎 꿇고 사과하라는 너의 요구를 아주 약간의 망설임 후에 받아들인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친구가 어디론가 다녀와서 내게 건네준 너의 편지, 거기에 적힌 오늘 괜찮은지 찾아오려고 했는데 내가 부담스러워할까봐 그러지 못했다. 다시 연락을 달라. 만나자. 는 가증스러운 내용을 보고 나는 옹졸하게도 그 자리에서 편지를 찢어버리는 것은 물론, 널 죽이고 싶기도 했었다. 그 때는.

내가 아직 어렸을 때, 너는 나보다도 세 살이 더 어렸다. 너는 집을 나왔고, 갈 곳이 없다고 했다. 초겨울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오토바이를 타고 여기저기 쏘다니다 인적드문 공원 팔각정으로 들어가서 벌벌 떨고 있었을 때, 그때 내가 마침 돈이 없어서 내일 기름은 어떻게 넣을까 고민하던 때가 아니었다면, 바닥에 내가 입고 있던 코트를 깔아주면 그 위에 옷을 벗고 눕겠다던 너의 제의를 드라이 비용이 든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무시했을까. 삼천원만 있으면 소주 댓병을 사서 둘이서 취할 만큼 마실 수 있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너의 말을 못 들은 척 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사실 돈이야 빌리면 되는 거였다지만 그 때 나는 왠지 슬퍼졌다. 그래서였다. 널 내 방에 재우고 나는 친구 집으로 들어가 새우잠을 잤던 건. 다음 날 아침에 돌아와 보니 침구는 말끔히 정리돼 있었고 너는 없었다. 0교시 수업 때문에 꽤나 일찍 왔음에도. 그 후의 연락은 나의 사정으로, 어쩌면 너의 사정으로 그저 연락으로 끝났었지.

너는 1980년생이다. 나는 너의 차 옆자리에 타는 것이 좋았다. 너와 함께 영화를 보고, 드라이브를 하고, 술을 마시고,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고. 너는 스킨십을 싫어했지만 그래서인지 가끔은 술에 취해 내게 안겨오는 네가 더 가슴 뛰는 모습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너는 봄이 오는 것과 동시에, 겨우내 얼었던 강이 녹아서 다시 흘러가버리는 것처럼 내게서 멀어져갔다. 나는 겨울이 지나갔으므로 너를 찾지 않았다.

겨울에 스쳐지나간 '너'를 추억하며 쓰는 처음이자 마지막 글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기억 속에서 변형되고 왜곡되다가 종내는 영원히 사라져갈 이들이여, 부디 행복하기를.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5:46:11 

 

병장 정병훈 
  난해하네요 히히... 내공 부족으로 누가 해석좀... 털썩 2008-10-24
15:54:17
  

 

상병 이우중 
  아, 여기 등장하는 '너'는 총 6명입니다. 불친절하게도 그냥 쭉 써내려가버렸네요. 허허. 2008-10-24
15:56:08
  

 

병장 문수민 
  아.. 이제야좀 알겠네요.... 2008-10-24
15:58:02
  

 

병장 황인준 
  그렇군요. 6명이군요. 
그래도 수민씨 말처럼 이제 좀 알기엔 흑.. 

그동안 스쳐지나간 6분들에 대한 기억들인가요. 2008-10-24
16:12:06
  

 

병장 이동석 
  아니, 우중씨 
제가 기획하던 여자들에 대한 불친절한 이야기와 딱 맞아 떨어지는! 
역시 우리는 통하나봅니다. 허허허. 2008-10-24
16:22:22
 

 

상병 양순호 
  be happy, 행복하기를. 2008-10-24
17:48:32
  

 

상병 이우중 
  제목처럼 겨울의 환이죠 뭐. 김채원의 '겨울의 환'은 어조가 너무 조곤조곤한 나머지 살짝 잠이 오려고도 했고, 조경란의 '겨울의 환(여름의 환밖에 안썼던가요?)'은 아직 안봤어요. 그래서,는 아니고 위 내용과는 전혀 무관하게 제 기억 속의 겨울 속의 여인들 속의 일부를 한번 끄집어내어 보았답니다. 

동슥님, 전 좀 전에 담비를 태우다가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비몽'의 갈대밭 씬과도 어찌 보면 약간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안봤다면 죄송하지만) '나'의 시점에서(요건 3인칭이라도 상관없을 듯) '너'로 호명되는 대상이 바뀔 때마다 같은 배경에서 여자만 달라지는 거에요. 담배 하나 다 타들어갈 동안 여자만 싹 싹 바뀌는 거죠. 그렇게 전개해 나가다가... 어라, 근데 그런 거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나요? 제길.(웃음) 2008-10-24
18:06:22
  

 

병장 문두환 
  작가 명이 기억나지 않지만 저도 '겨울의 환'을 읽기는 했었네요. 

아, 그런데 툭툭 튀겨지는 듯한 어투 속에도 과거를 찾는 손길은 여전히 있는 듯 하네요. 그리고 그 손은 결코, 차갑게 식어 있지 않아요. 2008-10-24
18:12:44
  

 

상병 이우중 
  두환님. 뜨끔합니다(웃음) 2008-10-24
19:42:09
  

 

병장 문두환 
  저에게도 '열일곱'은 참 상징적인 나이인데, 우중님에게도 그런가요? 
열일곱은 저의 모든 것의 시작이었으니까요. 아하. 왠지 나중에 이것에 대해 글을 써 보고 싶을 것 같네요. 흐흐. 2008-10-25
12:42:35
  

 

상병 이우중 
  저는 열 여섯이요. 어쨌거나 고1이죠. 저 또한 (거의)모든 것의 시발점이었거든요. 히히. 
근데 아직까지 이리저리 얽힌 사람과 사연들이 많아서 제대로 된 회고는 어려울 것 같아요 저의 경우엔. 글을 쓰면 회고보다는 반성문이나 참회록에 가까울 듯 하군요. 허허... 

어쨌거나 두환님의 열 일곱에 대해 쓴 글 기대하겠습니다! 2008-10-25
12:56:34
  

 

병장 문두환 
  /우중 

고1이면...열 일곱 아닌가요(손가락으로 헤아리는 중)? 
전 지금도 조금 아쉬운 것이 고등학교때 너무 얌전하게 지내서 그런지 우중님처럼 그런 사연도, 얽힌 사람도 없다는 것이 조금. 뭐 그래요. 하하, 그런데 회고보다는 반성문이나 참회록이라니, 전 되려 우중님의 글이 더 기대되는군요. 전 여전히 ing중인 스토리라서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군요. 흐흐. 2008-10-25
13:37:17
  

 

상병 이우중 
  이런 제길, 담비를 태우다니요..... 누나, 미안해요. 담배요, 담배. 2008-11-21
14:0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