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관 화장실에서 변기 앞에 다가서자 센서가 깜빡거린다. 이내 물이 내려온다. 바지를 추스르고 한 걸음 물러서자 센서는 다시 깜빡거리면서 물을 내려 보낸다. 문뜩 저것이 '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눈이 소변을 보는 자신을 바라본다는 생각은 수치스럽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 '눈'은 나의 므흣한(?) 것을 보지 못한다.(설마 몰카? 두둥.) 단지 내가 왔다 혹은 갔다는 것만을 감지할 뿐이다. 다가온 내가 어떤 특성을 가지는지 알 필요가 없다. 키가 큰지, 뚱뚱한지, 피부는 하얀지, 청결하게 자신을 대하는지 아니면 거칠고 폭력적으로 대하는지.(응?) 이 모든 것을 그 눈은 전혀 볼 수가 없다. 심지어 사람이 아닌 것이 다가올지라도 상관없다. 무엇이 다가왔다 멀어졌다는 것만이 변기의 센서에 들어올 뿐이다. 



  그래서 그 '눈'은 아무 경험도 할 수 없다. 유일한 시감각 기능인, 무언가 다가왔다/멀어졌다 등의 감지는 결코 경험일 수 없다. 왜냐면 그것은 단순한 기계적 조건반사 같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눈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다. 과거의 경험이 누군가의 다가섬/물러섬을 감지하는 현재의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미래를 향한 꿈이 누군가의 다가섬/물러섬을 감지하는 현재의 자신에게 어떠한 감흥도 일으키지 못한다. 단지 끊임없이 현재로 미분된 상황에서 물을 내려 보낼지를 반복적으로 판단하게 할 뿐이다. 

  그래서 화장실 센서는, 그 눈은, 그 눈의 시감각은 '몸'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몸은 세상살이의 흔적을 품고 있는 창고다. 몸이 있음으로 '그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이 타인에게 공인되고, 타인과 더불어 일으키는 삶의 실천의 흔적은 바로 몸속에 새겨진다. 몸이 없는, 그래서 경험을 저장할 수 없는 센서는 단지 선험적으로 주어진 '코드'에 맞추어서 기계적으로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 




  여기서 화장실 센서는 지금의 내 모습에 관한 하나의 ‘은유’이다. 나는 마치 화장실 센서처럼, 다가선 이가 ‘볼 일’ 보려 그 자리에 다가선 것인지 아닌지 등에 대해 어떠한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변화무쌍한 수많은 상황을 모두 무시하고 단지 한 가지 조건, 다가섬/물러섬에만 일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내게 내재되어 있는 수많은 것들을 최대한 단순화시키고, 일정한 방식의 인식만을 나의 사유의 시선에 들어오도록 형상화한다. 

 

  이 녀석은 이러한 내 머리 속 메커니즘에 서식하는 ‘사유의 바이러스’다. 이것이 자라나는 안성맞춤의 토양이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행위자들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것이 어디에서 유래했으며,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지, 또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그것에 감염된 사유의 증상만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이 녀석은, 나의 사유가 시간과 공간의 좌표 이동에 따라 가변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나누어 인식하게 하며, 그 나뉜 범주에 따라 가장 단순하게 평가되고 가장 단순하게 행위하게 한다. 



  사회에서는 ‘부한 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며, 군에서는 ‘높은 자’와 ‘낮은 자’로 나뉜다. 그것은 ‘옳음’과 ‘그름’, 그리고 ‘아름다움’과 ‘추함’ 이라는 이항 대립적 기조에 따라 분할, 가치 평가되어 있으며, 그 좌측 항은 ‘성공’, 그리고 반대항은 ‘실패’로 각각 일대일 대응한다. 이것은 나의 울타리의 경계가 완강하게 구축되면 될수록, 울타리 외부의 경계심이 강력하면 할수록, 나의 ‘몸’의 전신에 구석구석 미치는 사유의 토대이며 실천의 양식처럼 자리 잡는다. 




  몸은 끊임없이 외부 환경과 대면하면서 스스로를 변모시켜 간다. 그런데 바이러스에 감염된 몸은 외부 환경을 그 모습 그대로 읽는 데 심각한 장애를 일으킨다. 다양한 양상을 단순화된 관계로 일괄화시켜 단순한 정보로 환원시키고, 그것만을 본다(혹은 인식한다). 경험이 인지 과정에서 왜곡된다. 그러니 바이러스에 감염된 몸은 점점 경색된 부위로 가득하게 되고, 결국 몸이 없는 ‘기계 덩어리’처럼 되어 간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기계 덩어리에 입력된 왜곡된 정보에 따른 반응이 대단히 공격적이라는 것이다. 정보의 단순화와 왜곡의 계기가 자신의 불안감이었으니, 이러한 공격성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나의 폭력이 일상 속에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폭력성이 더 이상 야만만은 아니라는 것을 뜻하고, 특정한 양식으로 경험을 이해하게 강요하는 인식 배후에 도사린 폭력의 일상화이며, 그럴수록 폭력성의 야만은 내 자신에게서 은폐된다. 일상화된 폭력성은 야만을 은폐하는 장치이기도 한 것이다. 마치 오늘날 자본의 광고 저널리즘처럼 허구적 이미지를 창조함으로써 그것은 기실 ‘옳음’이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틀을 이용해 사유의 환기와 더불어 반성적 자세를 취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현재 바이러스적 인식의 특성이 여전히 내게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데 있다. 또한 이를 긍정하는 인식의 보편화가 진척되고 있고, 그만큼 폭력이 일상화되어 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폭력의 야만성에 대한 나 자신의 감수성의 퇴화를 동반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이다. 권력에 의해 은폐된 기득권층의 욕망을 들춰내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욕망과 안위가 타자의 배제를 동반한 것에 대한 책임에서 면책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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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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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회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2008-01-07 18:18:36 | ipaddress : 52.2.6.64  
02|병장 김우상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단락. 털썩.
2008-01-08 09:19:32 | ipaddress : 52.2.6.190  
02|병장 이기중  
 준연님과 같은 느낌을 받을때마다, 예전엔 섬뜩하기도 하고 기를 쓰고 벗어나려 노력도 했는데, 요즘엔, 빨리 전역해야지 하는 생각만 들어요. 이 또한 적응의 결과이겠지요.

그런데 이 글, 전에도 본듯한 느낌이...
2008-01-08 10:18:17 | ipaddress : 56.4.2.227  
  
 현진 / 아아, 벌써 들켰네요.(먼산)

우상 / 수정하기 전 마지막 단락이셨는지..? 보안에 걸릴 것 같아 결국 한 단락은 빼버렸거든요.(눈물)

기중 / 사실 이 글은 작년 가을 쯤 생활관 동료들과 새벽 5시까지 이야기를 하고 작성되었고 마땅히 올릴 곳이 없어 꽤 오랫동안 제 PC속에 잠자고 있었는데요. 책마을이 폭파되고 HAS에 자리를 잡기 전, 경록씨와 지금은 보이지 않는 재영씨, 촌장님이 아닌 동명의 현진씨와 이 글을 비롯해서 올리지 못할 몇몇 글과 생각을 나눈 적이 있어요. 세희씨가 제대하고 마음 가는대로 '막' 지내고 있는 제 모습이 보이더군요. 뭐 결론은 저는 요새 '막' 살고 있답니다.
2008-01-09 08:13:20 | ipaddress : 54.1.35.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