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사는 여자, 삼순-을 생각하다 (병장 한상원/060105)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사는 여자, 삼순
정이현의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여기서도 몇 번 언급된 적이 있는 정이현의 소설집 제목이다. 2004년의 이효석 문학상을 받은 그녀의 <타인의 고독>을 읽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어찌어찌 2003년에 출간된 책을 읽게 되었다. 사실, 책을 읽고 나서 독서후기를 쓰는 것이 맞는 순서일 것만 같은데, 독서후기보다는 나를 포함하는 많은 남성들의 영원한 관심사이자 풀리지 않는 오랜 숙제와도 같은 여성들의 삶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졌다. 사실, 내가 이야기를 한다기보다는 덧붙여질지도 모르는 뭔가 또 다른 이야기들을 한번 기대해본다. 적어도 또래의 남성들이 모여 즐기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과는 다른, 조금은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생산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으니까 말이다. 나의 글을 그저 개인적인 생각을 담은 작은 화두일 뿐이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페미니즘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알 듯 모를 듯 한 말로 나를 규정하고 싶지는 않다. 괜한 거부감이라기보다는 정말 잘 모르니까. 그러니 그런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자.
2005년은 내게 여느 때보다 많은 성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 한 해였다. 메트로 섹슈얼이나, 위버 멘치로 이야기되는 기존의 남성성에서의 많은 변화들이 그다지 나의 남성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던 내게도 이게 뭔가하는 정도로 솔깃하게 들린 적이 종종 있으니. 불행일지 다행일지, 성정체성의 변화 양상이라는 커다란 토론장에나 어울릴법한 거창한 세미나 주제를 들이대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성에 관해 해박한 것은 결코 아니다. 허나, 트렌디한 것에 어느 정도 무심한 나 같은 사람이라도 이런 변화들이 어느 날 갑자기 밀어닥친 쓰나미처럼 번쩍하는 날벼락이 아니라 오히려 시나브로 옷깃을 적시는 가랑비에 가깝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남성의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그런 시각으로 성정체성의 변화를 보지만 여성은 어떨까. 남성성이 가랑비를 맞아 어느새 돌아보니 비에 푹 젖어 다른 무언가로 약간 성질이 변하는 화학반응이 일어났다면, 여성의 성정체성과 성역할은 롤러코스터에 올라 까마득한 위치에너지들이 몽땅 운동에너지로 급격하게 쏟아져내리는 과정은 아니었을까. 물론, 많은 남성성들이 듣지 못했던 소스라치는 그녀들의 비명소리는 둘째로 치더라도 말이다.
당당하고 솔직하게 밝혔어, <내 이름은 김삼순>이야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를 한편도 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드라마에서 다니엘 헤니가 떴다는 건 나중에 알았어도 ‘삼순이 신드롬’이 뭔지는 익히 알고 있다. 김선아 씨가 연기대상을 받은 후, 각종 미디어는 그간의 삼순이 신드롬을 분석해서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내지만 결국 그것은 사실 그대로의 일상의 솔직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던가. 살도 적당히 찌고 얼굴은 보통인, 화장이 울음으로 범벅되는 날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도 하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등등. 그런데 나의 피상적인 이해일지도 모르지만, 이 신드롬은 어쩌면 그다지 생소하고 낯설었던 여성들의 비밀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늘씬한 미녀들의 청초하고 깜찍한 사연들만 소개되던 방송, 드라마에서 정말 현실적인 캐릭터가 등장했기에 다 알고 있어도 실제로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당당하게 저녁 골든 타임에 공중파로 흘러나와서 그랬던 건 아닐까. 그 당당한 솔직함이 많은 이들을 매료시킨 것은 아닌가.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자. 남성의 경우, 정말 조각같이 수려한 외모와 테스토스테론이 화면가득 흘러넘치는 멋진 몸매를 가진 남자들 역시 티비에 수없이 등장한다. 남자들도 혹하는 미모와 몸매에 여자들은 오죽 보기 좋을까. 하지만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이 곧잘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멋지고 쿨한 울트라 캡숑 나이스 가이들일지라도 삼순이에 공감한 많은 여성들처럼 후줄근하게 다니기도 하고, <봄날은 간다>의 상우처럼 헤어진 애인의 차를 북북 긁어대는 구질구질한 모습을 심심찮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나 일정부분 삼순이스럽다. 그런데 굳이 여성들의 실체가 밝혀졌다고 해서, 게다가 공공연한 사실이었던 것이 방송에 드러난다고 해서 우우 화제가 되는 이유는 또 뭔가. “에이, 사실은 알고 있었으면서.”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건 그만큼 우리 사회에 존재해 온 여성에 대한 억압과 타자화를 반증하는 것은 아닌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그런 솔직한 실제와 베일이 드리워진 실루엣을 큰 화두로 이 시대, 2005년을 살았고, 2006년을 살아갈 여성들의 모습이다. <프렌즈>나 <섹스 앤 시티>, 최근의 <위기의 주부들>과 같은 시트콤들을 통해서 우리는 삼순이의 비밀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고 있긴 하지만 롤러코스터에서 여성들이 지르는 비명에 아직 공명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여성들이 여전히 타자화 되어있고, 보이지 않는 금기와 터부로 둘러 싸여있기 때문이다. 정이현의 이야기들은 그런 억압들 가운데 자기가 원하는 것을 교묘하게 실현하려는 여성들의 서스펜스 모험 활극일지도 모른다. 삼순이를 보라. 단지 공개석상에서 여성들의 삶은 솔직하다는 이유만으로, 무수한 삼순이들의 공감을 얻었다는 머릿기사와 함께 환호를 받는다. 하지만 이 환호는 롤러코스터에서 들려오는 여전한 비명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놓여있다.
예전에 신문의 칼럼에서 <그 많은 여대생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라는 제목의-기억이 정확하다면- 글을 읽었다. 내용인즉, 캠퍼스에는 정말 수많은 여성들이 있지만 정작 40대이상 여성 경제활동 인구는 왜 전체 경제활동 인구의 20%정도에 불과한가하는 내용이었다. 지금도 많은 여성 CEO는 물론, 여성이 각 분야에서 엄청난 역할을 하고 괄목할만한 비중으로 성장해 있는 것을 본다. 하지만 당장 눈에 두드러지는 부분은 많이 달라졌으나, 칼럼의 내용이 시시하는 바처럼 사회 내부를 조망하는 끈기 있는 시선으로 봤을 때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아직도 많은 편견과 억압들에 둘러싸여 여성들은 싸우고 있다고 생각된다. 남성성을 가진 자들의 상상 그 이상으로 말이다. 물론 궁극적인 지향은 성별로 인해 받는 물적, 심적 고통이 그 또는 그녀들로 하여금 손바닥 뒤집듯 성별을 바꾸어 태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리오라는 탄식을 내뱉지 않는 것이 아닐까. 성별을 바꾸는 것은 그저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즐길 수 있는 유쾌발칙한 상상이 되게끔 말이다.
내 이름을 부탁해
본인이 뭐 페미니즘의 투사나 여성인권의 신장을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운동가 혹은 남성성이 우세해 온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남성으로서 겸허히 반성하는 양심의 소리는 결코 아니다. 나 혼자 착해서 천사표 목소리를 나직하게 내는 것도 또한 아니다.
나는 정이현의 이야기들을 읽고 다만 좀 서글펐을 뿐이다.
결혼이 뭐길래, 혼수가, 성공이, 성별이 뭐길래 이리도 슬프단 말인가. 내가 무슨 권리로 주제넘게 울먹이겠냐만은, 자신으로 솔직히 살아가지 못하는 세상의 반쪽이야기, 그 반쪽 아래 섧게 누운 나의 누나, 나의 여동생, 나의 어머니, 나의 연인과 아내의 이야기가 꽤나 서글펐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시선에서는 정이현의 이야기가 익숙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정말 외딴 세계 이야기처럼 생뚱맞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건 그냥 소설일 뿐이야 라며 나지막하게 말하며 옆구리를 찔러댈 수도 있다. 과연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정이현의 이야기가 슬프지만, 어느 정도 이상 진실은 아닐까. 그런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든다. 결국은 각자가 각자의 전쟁터에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바라볼 일이겠지만.
삼순이는 자기의 이름을 스스로 불렀을 때, 자기가 선 자리에서 비로소 한 사람의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 성별이든 외모든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솔직한 자신의 모습으로. 우리도 그렇게 설 수 있을만큼 자라서 나의 이름을 불러보자. 그리고 당신의 애인과 어머니와 여동생과 누나의 이름도 불러보자. 정말 유쾌발칙한 즐거움을 자아낼 수 있는 성별을 넘어선 공감을 기대하며. 당신과 함께 살아갈 당신의 영원한 반쪽이 함께 행복할 수 있도록 말이다.
너의 고양이를 언제든 나에게 부탁해도 되도록.
상병 김성엽 (2006-01-05 07:50:25)
예전 부터 억압을 받고 살았던 여성.
이제 점점 자신들의 권리를 확장..아니 확장이 아니라 남성에 의해 빼았겼던 당연한 것을 되찾고 있네요..
좋은 현상이고 계속 진행이 되어야 할 사항인듯합니다. 그러나 너무 급격하게 변하는것 같아 조심스럽습니다.
그리고 방송매체에서 여성에 대한 묘사는 방송이란 특이한 경우에 의한 결과물이라 살짝 생각해보게 되네요.
우리네들이 다들 보기 좋고 듣기 좋은 것만 골라서 보고 들으려는 성향을 보면 말이죠.
그렇다고 상원님의 얘기가 틀리다는 말은 아니에요.하핫..
병장 한상천 (2006-01-05 08:20:52)
잘 읽었어요. 상원님. 저도 잊고 있던 저와 같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대했던 나의 여동생의 친구들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는 글이였어요. 정이연 황순원 문학상에서도 수상을 한듯하던데 지하철을 타고 오다
얼핏 본거 같아서 확실히 말씀은 못드리겠어요
일병 배성훈 (2006-01-05 10:05:00)
남자들 생각은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 단 예쁜 여자와 못생긴 여자는 빼고." 이런거 아니겠습니까
여성,남성 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나 동남아시아 귀화자들 등등 왜 소외계층이 되었는지 모를 사람들에 대한 인식 또한 알게모르게 주입된, 생성된 것들 아니겠습니까?
그 근본 원인과 해결책을 분석하고 제시하는게 문제죠.
병장 김동환 (2006-01-05 13:46:10)
<그 많은 여대생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저도 읽었어요! 동감 만점.
근데 상원님 전공도 혹시 사회학?
병장 한상천 (2006-01-05 15:20:16)
흠..나중에 회원특집을 통해서 확인해주세요
병장 한상원 (2006-01-05 21:00:34)
아, 글이 양쪽에 다 있다보니 같은 댓글을 두번 달아야 하는군요. 게시판이 늘어나면서 구조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봐야 할 것 같습니다.(땀)
성엽씨/ 저도 그 특이한 경우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방송이나 맥심과 같은 잡지나 등등. 그런 매체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여성상이 실제와는 상당히 왜곡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좀 더 쿨하고, 좀 더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때로는 지극히 지고지순하고. 거기다가 매체에서 보도되는 여성들의 성공사례는 많이 부풀려지기 일쑤아닐까요. 여전히 그 성취를 이루는 여성들이 소수이기 때문에 더 부각시켜 이제는 마치 동등한 듯 말이죠. 그런 시도는 때론 사회의 남성들이게 종종 '이제는 이 정도로 평등하고 동등한데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라는거냐'라는 식의 마초근성을 북돋는다고 생각해요.
동환씨/ 저요, 부끄럽게도 정치외교학 전공입니다. 어쩌다보니 전공을 살린 글은 한 편밖에 못올렸네요. 하하. 상천씨가 일부러 말씀안하셨나봐요. 별로 중요한게 아니니 궁금증은 바로바로 해결해드리죠. 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