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 27일. 토요일. 날씨는 흐림. 그러다가 약한 비. 

"어디야, 재곤 군? 학교 도서관 앞에 있는데 비 온다. 엉엉."

서울 대학로 성균관대학교 앞 PC방. 모니터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면서 마린 한마리 한마리에 청춘을 다하고 있던 도중, 핸드폰이 울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문자. 다 이긴 게임이지만, 미련없이 F10키와 ESC를 눌렀다. YOU LOSE. 볼 때마다 기분나빠서 한 마디씩 터트렸던 그 화면이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아닌 듯 - 그냥 툭 엔터를 눌러서 화면을 넘겼다. 

계단을 내려가서 1층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봄이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날씨는 벌써부터 포근했다. 작년 겨울은 참 추웠었는데. 많은 일이 있었지. 생각지도 못했던 대학에 합격하고. 문학동아리라는 곳에 가입해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직은 어렵기만 한 여자 동기들도 생겼다. 

그리고 - 사랑이라는 것도. 

"나도 우산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도 그냥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조그만 3단우산. 거기까지 올라가기도 힘든데, 내려오면 안 되냐?"

띠리리리. 소리와 함께 문자가 전송되었다. 학교 정문에서 오르막길을 한참 따라서 올라가야 강의실과 도서관이 나온다. 한 5분정도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귀찮고, 게다가 비까지 내려서 생각없이 문자를 보냈다.

"버럭! 버럭! 버럭! 그게 숙녀에게 할 소리야? 나더러 이렇게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고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라는 거야? 그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연약한 몸에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짜자잔! 하고 문자가 도착했다. 문자를 읽은 나는 피식, 하고 헛웃음을 삼켰다. 어쩌면, 아니, 분명히 이런 내용의 문자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더 귀여워서 그랬던 걸까. 어깨를 으쓱, 고개를 휙휙 저으면서 우산을 쓰고 매일 올라가는 등교길을 걸어 올라갔다. 

"뭐 - 하고 있는 거냐"

도서관 앞. 개나리색의 치마를 입고 빗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한 명의 사람이 있었다. 멀리서 보는 순간, 그녀다, 라고 확신했다. 

그녀 곁으로 살며시 다가가서, 우산을 살짝 씌워주었다. 그 때까지 내가 오는 것도 모르고, 작은 강아지처럼 촉촉하게 내리는 봄비 아래에서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있는 모습. 

그 - 조금은 비일상적인 모습조차도 왜 그렇게 귀엽게만 보였을까. 아마도 - 그건 내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으아아. 다 젖었네. 그러게 빨리빨리 왔어야지!"

따듯한 - 그러나 이름은 알 수 없는 - 커피와, 케이크 한 조각을 앞에 두고 그녀가 투덜거렸다. 달콤한 생크림이 들어있는 커피를 우물우물 떠먹고 있다가, 황당함에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난 - 왠 병원에서 탈출한 사람이 하나 학교에 잠입한 걸로 착각했다니까."

"응? 병원? 무슨 소리야?"

"정신병원. 그 개나리색 치마랑 잘 어울리는 이미지라고 생각하지 않아?"

퍽. 하고 쿠션 두 개가 연달아 날아들었다. 하나를 피하고 에헤헤, 하며 웃고 있던 얼굴 위로 날아드는 다른 쿠션 하나를 피하지 못해서 정면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우와. 정말 너무한다. 대한민국의 기본 모토인 비폭력 평화주의를 이렇게 철저하게 깨 부술 수 있는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균관 유생들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하는 성대생이."

"못하는 말은 없어요, 하여간. 대체 어디서 그런 말들을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생각해 내는 거야? 그 머리로 스타크래프트 말고 다른 일에 투자해 보지 그래?"

"그래서 요즘 PLAY STAITION2를 샀는데. 곧 XBOX도 살 예정이야. 이미 통화까지 했어. 여기 전화번호도 받아 논 상태고."

"으이구!!!!!!"

왁, 하고 화를 내는 그녀에게, 작은 케이크 조각 하나를 포크에 콕 하고 찍어서 건네주었다. 먹고 조용히 있으라는 의미야? 라고 말은 했지만, 그 이상 투덜거리지 않고 조용히 케이크를 오물오물 삼켰다.

"학교 생활은 어때? 동아리 이외에. 남는 시간이라거나. 주말이라거나."

"특별한 건 없어요. 뭐랄까. 서울이란 곳. 처음에는 호기심에 이리저리 기웃기웃 해 봤는데. 오랜 기간 이야기했던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여기 몇 명이 끝. 말 다 했지, 뭐. 그나마 주말에 불러낼 사람이라고는 너 하나 뿐이다."

"킥킥. 난 많은데, 20년동안 살던 곳에 그대로 살고 있으니까. 친구들도 많고. 이리저리 기웃거릴 곳도 많고."

"그래봤자 - 다 너같이 입 험한 남자애들 아냐? 대학생이나 되서 주말에는 여자애 하나라도 옆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뭐어. 그건 그렇지. 여자친구 하나 없이 대학생활을 할 수는 없잖아. 푸우우."

나는 억지로, 그리고 연기하는 티가 팍팍 나도록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너무 진지하게 반응했는지,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약간은 동그랗게 변했다. 

"그러니까 말이지."

그리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역시.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와 줄 수 있는 남자친구 하나쯤은 있는 것이 좋지 않겠어? 적어도, 외로울 때 그 외로움을 나눠 줄 사람 정도는?"

......

.......

........

침묵.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혼자서 머리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리고 여섯. 거기까지 세는 순간. 그녀가 웃었다. 그 미소는, 아주아주, 너무너무 밝은 웃음이여서, 나 역시 따라서 웃은 것 같다.

"나가자. 나가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저벅. 저벅. 탁. 탁. 저벅. 저벅. 탁. 탁.

빗소리와 발소리가 계속해서, 번갈아 들려오는 길을 걸었다. 아주 조금의 거리를 둔 채.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를 둔 채. 

대학로 버거킹 앞. 이리저리 지나다니는 차들 앞에서 우리는 멈췄다. 

"저기 온다. 니가 타고 다니는 2번 버스. 맞지?"

그러니까, 안녕. 하고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영문도 모르고, 결말도 모른 채, 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표정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웃고있었다. 계속해서. 아주 밝은, 해맑은 웃음을.

버스가 출발하고, 둘 사이의 거리는 떨어지는 빗속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서야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시선을 둘 곳은 어디에도 없어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그리고 - 울리는 핸드폰. 문자 메시지.


<대답. 못 해 줘서 미안. 나도 그런 말 듣는 거. 그리고 대답하는 거.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아하하. 뭐랄까. 조금은 아쉬었겠지. 그냥 보내서. 실망도 했겠고.

가끔은 어처구니 없는 말들만 하고. 그래서 가끔은 한 대 때려주고 싶기도 하고. 그리고 어느 순간 너무너무 고마워. 나한테 너는 그런 복잡한, 수많은 이미지의 집합체라고 할까. 그러니까. 오늘은 우선. 돌아가. 

그리고. 다음번에 - 내일이 될지. 혹은 모레가 될지. 그 때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나의 연인. 지희양." 이라고 말 해 주지 않을래? 그럼 나도. "나의 연인. 재곤군." 이라고 대답해 줄께. 아름다운지는 모르겠지만, 밝은 미소로.>


내 인생에서 가장 아쉬웠던 한 순간은. 곧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으로 다가왔다. 사랑이라는 것은. 아쉬움도 동반하고, 이별도 동반하고, 헤어짐도 동반한다. 

그러나 - 사랑은. 혹은 새로운 만남은. 아쉬움과 헤어짐이 있기에.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맑음. 매우 맑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