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세계를 향한 안티태제다. 시인은 돌연변이다. 이렇게 자유롭고 저항적인 존재의 정신에 주인 따위가 있다는 사실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사유를 구속하는 올무는 끊어버려야 한다. 외부의 간섭과 질서에서 내부에서 발생한 배리의 존재태까지, 자아조차도 주인이어서는 안 된다. 주인이라는 개념과 어휘를 말살하는 것이다. 노예는 시인이 될 수 없다. 시는 자유인의 웅변이다.

나는 증오의 시인이다. 사랑의 시인이 찬미하는 대상을 견디지 못한다. 인간이 꽃보다 아름답다거나 인간이 희망이라는 語不成說에 상처받는다. 모든 포유류의 새끼는 살해당하거나 방치되지 않기 위해 귀여운 외양을 가진다. 모성은 독점적이며 잔혹하다. 나나니벌이나 뻐꾸기와 인간 사이에 변별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꽃피는 지옥이다. 욕망이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음풍농월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지진과 해일, 태풍과 홍수다. 나는 무지개와 신기루와 사찰을 형언하지 않는다. 대면한 현실을 직시한다.

시는 소년원과 어울린다. 성적표에 A학점이 가득한 자에게는 걸맞지 않는다. 세상을 향해 사제 폭발물을 투척하는 자가 시인이다. 그는 定住하지 않는다. 獨走한다.

-	이승원 [나의 주인은 죽었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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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 도서관으로 기증된 06년 우수문학도서를 정리하던 도중 우연히 ‘어둠과 설탕’이라는 시집 뒤에 적혀진 저 ‘나의 주인은 죽었다’를 읽게되었다. 도서관 사서를 겸직하고 있기 때문에 수도 없이 많은 시집을 옆에 두고 있지만 정작 읽어본 적은 없다. 사실 ‘시’라는 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잘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등줄기로 오한이 달리는 것을 느꼈다. 좋다? 아니 좋은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이런 반 인간주의적인 시각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필이 온다? 그게 맞는 것 같다. 그렇다. 이 글에서는 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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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색과 인식에 잠기는 시인이 아니다. 냉소적인 시야의 사람들이 반 체제적인 성향을 띄면서도 결국은 침잠해 버리는 것과는 달리 그는 세계를 향해 사제 폭발물을 투척한다. [군용이 아니다. 사제다. 대단하다] 책 표지를 보니 턱수염이 덥수룩 하다. 얼마전에 읽었던 체게베라 평전이 문득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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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이다. 자신은 자신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간을 사랑한다. 우리는 말한다. 인간은 존엄하다. 지구를 향해 핵미사일을 날려도 존엄하고, 같은 인류를 독방에 밀어넣고 신경가스를 살포해도 존엄하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혹시 그의 말처럼 인간은 꽃피는 지옥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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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는 증오의 시인인 것 같다. 적어도 사랑의 시인은 아니다. 만약 그가 사랑의 시인임을 주장하고 싶다면, 그는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사물의 사랑일 것이다. 그는 인간의 식탁에 오르는 돼지고기를 보며 슬퍼해야 하고, 암세포를 가득 담은 주사기에 피부를 관통당하는 흰쥐를 보며 분노를 터뜨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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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메시지에 찬성하기는 힘들지만, 대단하다고는 생각한다. 그는 확고하다. 고개를 갸웃거리지도, 말꼬리를 흐리지도 않는다. 당당하게 인간은 욕망이다. 라고 확언한다. 그것이 감탄스럽다. 나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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