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늙어죽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나무가 늙어죽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발에 채이는 돌 
멀리 독경소리 마중나가고
나는 벚잎 모양으로 흩어져 
길 위를 뒹군다

소중함이 흩어져
다른 소중함을 지을 때까지
이 모든 혼돈들이
시로 읊어질 수 있을 때까지
지나고 나면 별 것 없고
별 것 없어 아득한
사랑과 사랑 사이
깨달음과 깨달음 사이 그 긴 시간을
나는 어떻게 견뎌온 것일까

팔백년을 살았다던 금송
후두둑 늙어죽은 자리에
애송 한 그루 새파랗고

억압이 심해질 수록
은유도 점점 첨예해지던 곳마다
피어나던 꽃들 점점이 분분하고










- 序

1년 전만 해도 성성했던 금송이 늙어죽는 걸 TV에서 본 적이 있다. 나무라면 영원히 살 것도 같은데, 용케 산 채로 잘리지 않고 늙어죽었댔다. 수령이 다하는 그 순간에도 성성했다는 그 나무가 남기고 간 핏줄은, 겨우 종아리께에 올락말락한 2년생 접붙임 애송이었다. 아, 이런게 새로운 시작이란 거구나. 그 무장하던 위용은 다 어디로 갔나. 허망했다.



─슬럼프, 라고 생각했다.
뭔가 다 시들하고 맥빠지고 흔들리고 모든 소중한 것들이 갑자기 하릴없어뵈고 얼마든 내쳐버릴 수 있을 것 같고, 계절을 맞아 스며든 독은 내 속살처럼 연한 것들부터 먼저 찔러들어왔다.
깨달음의 순간은 얼마나 찬란하던가. 사랑에 한창인 옆얼굴은 얼마나 공교롭던가. 그땐 그것이 세상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 모두 처음부터 시들지 않기를 바란 것은 아니다. 그걸 몰랐을 리 만무하다. 모든 게 무너진 다음에 다시 뛰어들어야 함을, 툭툭 털고 일어나야 함을, 보이지 않는 곳마다 쌓이고 있을 내 이력을 믿어야 함을 모르고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모르고 있진, 않았다.
오락실에서 본 적이 있다. 모아뒀던 노란 게이지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후미진 구석에 철컹 들어차는 빨간 도막. 깨달음의 끝에 선 기분이 그러하였다. 같은 값엔 현찰이라고, 마음 구석에 든든하게 차있던 것이 수표 바꾸듯 쑥 빠지고 나니 영 불안불안한 것이다. 철석같이 믿어왔던 머릿속의 장승을 허물고 맨몸으로 나와 세상의 안부를 물어야할 시간. 한번 허물어진 것은 두번 다시 같은 모양으로 세워질 줄 모르고, 나는 잃어야할 푯대를 잃은 사람처럼 태연한 혼동에 어지러웠다. 알고 있대서 그 믿음의 속청까지 채워지는 건 아니련만, 지난 깨달음이 최소한 어떤 보험 정도는 돼보일 줄 알았다. 그런 거 하나 없이 새 거는 그냥 맨 새 거였다. 모아논 기는 죽어도 오지 않을 끝판대장 앞에서 초필살기로나 부려질 참이었다. 오지 않을 그 때는 너무 멀었다.

그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때까지 난 너무 쉽게 영원회귀니 일상이니 깨달음 너머의 깨달음이니를 이야기해온 건 아닐까. 머릿속의 세상이 제 몸뚱이 딱 고만한 크기로 쪼그라드는 일이 어디 말처럼 쉬웁더란 말인가. 이등병때 잘했다고 병장때 잘하는 게 아니듯, 과거를 선선히 추억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쉽게 미래를 낙관하려던 나는 뒤통수를 맞은 듯 했다. 김훈씨의 말처럼, "지나온 모든 끼니는 앞으로 닥쳐올 단 하나의 끼니 앞에 무효였다.(<칼의 노래> 中)" 지나고 나면 별 것 없는 것은 다시 돌이키기 너무 아득해서 별 것 없어뵈는 것이고, 그 뒤론 전혀 달갑지 않은 새 시작이었다.

마침 부활절이었다. 예수가 새로 살아나고, 연등 걸린 법당은 석탄일을 앞두고 새로 태어난 부처맞이 준비에 한창이다. 모두들 참 쉽구나. 중학교 윤리 교과서에도 윤회라는 말은 나오는데, 터덜터덜 하릴없는 마음에 발끝에 채이는 돌 멀리 떨어지면, 그 앞으로 내게서 너무 먼 것들을 이야기하는 독경소리 모오모오거리며 도망간다. 왠지 불교보다 교회당이 더 바글거리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끝판대장 앞에서 초필살기 쓰는 맛을 모르지 않는다면 조악한 종말론적 세계관 따위 이해 못할 것도 없었다. 앞뒤가 탁탁 맞게 모든 업을 지고 영겁을 다시 살아내는 것보다, 말이 좀 안되더라도 한큐에 "세상 종칠 때 나 좀 건져주"라고 하는 게 사람들에게 더 와닿았음이 분명하다. 
부활의 상징인 죽은 달걀을 까먹고 돌아오는 길, 끝물인 벚꽃이 샛바람에 와 자지러진다. 원래 힘이 없는 건지 힘이 없을려고 없는 건지, 구별할 새 없이 벚잎들 저마다 나를 쓸고 지나간다. 깨달음을 한 바탕 접고 난 사람들이 왜 그리도 쉽게 변절하는지 나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위대한 것이 꺼지고 난 자리에 또다른 위대함을 보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온갖 사회적 범죄에 시달리고 있는 동구의 나라들 같이, 한 켠은 삼성으로 한 켠은 고시로 쓸어담기듯 옮겨지던 열심당원들 같이, 그들에게도 새로운 시작은 그리 쉽지 않아 "세상 종칠 때 나 좀 건져주" 했을지, 그러했을지 모른다.

겨우내 찬 바람 불 때 철갑의 태는 하나같이 강고했다. 그 서슬은 쪼매난 틈새도 잡아먹을 듯 퍼랬다. 이제 비로소 날이 풀리고 이 곳 저 곳에 꽃들 만발한데, 날 풀리고 잘하는게 진짜 잘하는 거랬던가. 철갑을 벗은 몸으로 흔들거리는 사이 나를 둘러싼 억압은 어느새 용의주도하게 나를 잠식하고, 그럴 수록 내 은유는 점점 첨예해져 한없이 가벼워간다. 입은 바지에 오줌싼 듯 뜨뜻미지근한 봄바람 감쳐오고 계절의 시작은 이리 꽃죽 터지는 벚날림이다. 금송도 이념도 과거도 없이, 나의 시작은 이렇게 초장부터 맨몸으로 날리는 벚잎쪼가리다.

스머프가 스머프가 되고 스머프가 벚잎이 되어 길바닥을 나뒹굴때마다, 나는 문득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벚잎처럼 가벼워진 내 언어의 원인이 궁금하다. 날이 갈 수록 말이 짧아지던 사람들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피해 세상 끝까지 가늘어질 사람들 속에서, 맨 몸으로 뒹굴더라도 그 뒹구는 모습 하나하나 똑똑히 새겨두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내 다음 이야기는 그렇게 나를 하늘거리게 만든 그 억압이 되어야만 하겠다. 그리고 그 억압이 스러져 다른 억압을 불러올 때쯤, 그때 나는 비로소 지금의 흩날림을 무엇으로건 읊어낼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새로 태어나는 거? 그거 X같은 거야."

끝물인 벚꽃들 또 한번 와─ 자지러진다.                                      - 20060418, cryingkid


 

  
 
 
 
 병장 김동환 (2006/04/18 09:58:59)

와- 자지러집니다.    
 
 
병장 한상원 (2006/04/18 10:24:58)

예전부터 대현씨 글에서 나던 냄새가 나무 냄새 였군요.    
 
 
상병 엄보운 (2006/04/19 13:53:48)

하아- 비가 오는 날 대현님의 이 글을 읽었습니다. -060419    
 
 
 병장 박진우 (2006/04/20 09:53:00)

또, 대현님이라니. 휴...    
 
 
상병 박종민 (2006/04/21 04:32:03)

...아아, 시인.    
 
 
병장 김강록 (2006/04/21 09:18:18)

저의 육감에 의하면, 요새 대현씨가 비록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뒤로는 뭔가를 열심히 공부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실험하고 있다는 느낌이 얼핏 듭니다. 위대한 문필가이면서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이기도 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대현씨는 그러한 경지를 향해 힘차게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 듯 하군요. 쫓아가려면 저도 부지런히 노력해야겠는데.    
 
 
병장 주영준 (2006/04/21 09:29:50)

곤돌이도 글좀 쓰세요. 아름다운 청년 김대현을 따라가야죠.    
 
 
상병 엄보운 (2006/04/21 10:19:20)

슬럼프가 슬럼프로 끝나지 않고, 도약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죠. (오늘은 반성할 일 투성이군요.)    
 
 
병장 김강록 (2006/04/21 14:30:15)

영준 / 글은 거의 항상 쓰고 있습니다. 다만 공개하지 않을 뿐. 가령 이를테면 지금 쓰고 있는 「틈틈이 쓰는 글의 미학 # 2006. 4. (2) : 패배주의적 사유의 전개도」라든지, 좌우간 글이라면 꾸준히 쓰고 있습니다.    
 
 
상병 조주현 (2006/04/21 15:59:56)

벌써 열번이 넘도록 보고 또 보고있습니다. 
..회를 거듭할수록 그 향기가 짙게 느껴집니다. 
굉장하달까요..    
 
 
 병장 박진우 (2006/04/22 11:37:38)

어젯밤 침울해져버린 내무반 안에서 프린트한 이 글을 보고 하염없이 울수밖에 없었습니다. 
왜그렇게 슬프던지. 세번,네번. 곱씹을수록 맛이 배어나는 육포처럼... 
당신의 글은 무얼 담았길래 이리도 한자한자 뻐근할걸까요.    
 
 
상병 안대섭 (2006/04/23 01:55:52)

강유원씨 홈페이지에서 보길, 공부를 하려면 스스로 학대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특이취향이 필요하다더니. 대현님처럼 학대할 수 있다면 공부 계속 할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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