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즘에서 에고이즘으로, 스포츠권의 종언에 반하여 , 박원익>



  나는 책마을에 발췌된, <스포츠권의 종언>이라는 글을 읽을 때 어떤 특정한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K대에서 일어났던 유명한 '감금사태'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아직도 있을지 모르겠다. 보건대 통합문제와 관련해서 존재했던 학교 측의 구두 약속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에 항의한 일련의 학생들이 본관에서 퇴근하려는 교직원들과 교수들을 가로막아선 게 사태의 발단이었다. 학생들이 요구했던 건, 보건대 사태와 관련한 학생들의 요구서를 받아달라는 것이었고, 교직원들은 그것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면서 접수를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사태가 장기화(?)되었다. 초저녁에서 시작된 일이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졌고, 결국 아침이 되어서야 학생은 감금(?)을 풀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즉시 학교 인터넷 사이트에 이를 비난하는 학교 측 성명이 공지사항으로 게시('감금'이라는 격한 표현이 최초로 사용되었다)되었고, 이와 관련한 징계위원회가 소집되었다... 어쨌든 상황이 굉장히 어려웠고, 본관점거와 무관했던 학생들까지 '출교'라는 극단적인 처분을 받았다는 귀결, 그리고 이에 관한 소송이 아직도 진행중이라는 사실(이미 한 차례 학생들이 승소했다)만을 언급해두자. 이하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는 생략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의 전개과정에 관한 결정적인 한 가지 사실을 말하자면,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일련의 급진적인 학생들이 벌인 일이, 과거와 달리 일말의 동정이나 이해도 얻지 못한 채로 오히려같은 '학생'들로부터 가혹한 악평을 얻었다는 점이다. '감금사태(?)'가 있었던 이후로, 그 사태를 주도했던 일련의 학생들(하지만 당시 대치상황에 별달리 관여하지 않았던 한 스포츠권 학생도 일종의 '괘씸죄'로 징계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패륜아'라는 프레임이 동료 학생들로부터 낙인 찍혔으며, 무엇보다 이 사태를 해명하면 해명할수록 역으로 학생사회로부터의 여론이 굉장히 악화되었다. 나 역시도 여기서에서 책마을에서 방금 올려진 제목대로 나름의 '스포츠권의 종언'이라는 것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당시 '대치상황'(감금이 아니라 대치라는 게 상황에 대한 올바른 표현이었다)의 쟁점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하려 해도, 또한 '감금'이라는 표현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소통'하려 해도 역으로, 공분(?)을 사고 마는 그런 악순환이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서부터 스포츠권이 학생사회에 대해, 그리고 시민사회 전체에 대해 끼쳤던 영향력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요새 '학생사회'와의 '소통'을 강조하는 스포츠권 세력의 곤궁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가? 말하자면 중요한 건 '소통'을 아무리 시도해도, 처음부터 학생사회로부터 '거부'당하는 어려움이 존재하는 것이다. 요컨대, 스포츠권이 무언가를 말하고 소통하려 한다고 해도, 그것이 '언표'의 수준에서 제 아무리 설득력을 가진다고 해도, 그것이 '언표행위'의 수준에서 다시 말해 '스포츠권'의 포지션에서 발언한다는 사실 자체에서부터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학생사회에서 운동권이 거부당할 때, 무엇보다 그들이 운동권의 위치에서, 혹은 운동권이라면 마땅히 표방해야할 '대의'Cause를 거론한다는 사실 자체가 비난받는 것이다. 가령, 그들만이 정의를 독점한듯이 말한다는 통상적인 비아냥들이 그 일례이다. 확실히 운동권이 가지고 있는 '정의감', 이 원초적인 차원에서 무언가 학생사회로부터 거부되는 요소가 있는 것이다. 막연히 '운동권의 종언'을 거론할 때 잊혀지는 건 그런 것이 아닐까? 오늘날 운동권이 '종언'을 맞이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소통을 등한시했다거나, 단순히 상황이 달라졌다는 식의 피상적인 진단(그리고 이러한 피상적인 진단이 다름 아닌 운동권 학생들 자신의 자기 비하적 농담으로 전용되고 있는 실정이다)과 다른 수준에서 그 원인이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운동권이 '정의' 혹은 '정의감'과 관계맺던 과거의 방식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정에서 출발해야하지 않을까? 

  내가 가장 거부하고 싶은 것은 '스포츠권'이 바야흐로 종언을 맞이했기 때문에, 스포츠권이 가지고 있었던 '정의' 혹은 '정의감'이라는 차원이 앞으로의 학생운동에서 전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는 유혹이다. 학생회는 혹은 학생단체는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정의'나 '대의'에 관해 발언하는 것을 그만두고, 일종의 '권리투쟁'에 매진해야할까? 나는 이러한 제안이 대단히 자기 파괴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히려 그러한 유혹에 대해 단호하게 저항해야 하며, 오히려 우리는 이미 옛것이 된 '정의감' 혹은 '대의'에 대한, 이전과 전혀 다른 '관계맺음'을 상상해봐야하지 않을까? 과거에 고전적인 학생 운동가/운동권들이 부르짖었던, 그리고 그것을 위해 심지어 '문자 그대로' 제 한 몸을 불살랐던 '정의'가 오늘날 근거를 잃었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층위에서 그것을 '재생'시킬 수 있을까? 우리는 과거의 정의를 어떻게 새로운 수준에서 '표상'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학생운동의 종언'에 걸려 있는 가장 중요한 쟁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덧붙여, '출교사태'와 관련해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K대 모 학과생들이 일부 학생들이 벌인 '패륜적인' 행위에 사과하는 의미에서, 검은 옷을 입고 본관 앞으로 떼지어 몰려가 폐를 끼친 스승님에게 '석고대죄'하는 퍼포먼스를 벌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지지여론이 빗발쳤던 게 악몽이 언제나 그렇듯이, 아직도 눈 앞에 생생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야, 이 사건이 결정적이라고 생각되는 건 왜일까? 이XX 님이 거론한 '학생운동의 종언'에서 학생운동의 가장 큰 장애물로 진단되었던 것은, 학생사회의 '무관심' 내지는 '무관계'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과거의 외상적인 기억에서, '학생운동의 종언'(그 출교사태 이후로 학생운동의 운신폭이 크게 위축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을 선고했던 사건에서 정작 우리 직면했던 것은 학생운동에 대한 나름의 '뜨거운 관심', 혹은 '열광적인 반응'이었던 것이다! 다름 아닌 증오, 거부감이라는 형태로 말이다. 나는 검은 옷을 입은 이 충직한 학생들의 퇴행적인 퍼포먼스에서 발현된 것이야말로, '학생운동의 종언'을 별 위기감 없이 거론할 때 억압된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학생운동가들이 지닌 '정의감'이 흔히들 말하듯 세간의 '무관심'에 부딪힌 게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상상적인 '정의감'에 부딪혀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학생운동의 종언은 바로 이런 두 정의감 간의 충돌로 바로 사고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검은 옷을 입은 학생들이 지닌 '정의감'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의 정의감은 학생운동의 당사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냈던 것일까? 그것은 우선, 자신의 이해관계를 내세워서 학교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급진적인 학생들은, 본인의 자기표상과 달리 실제로는 '이기주의자' 즉 '에고이스트'라는 것이다. 즉 운동권 학생들은 거창한 대의명분을 거론하지만, 운동가들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제로는 개인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가진, 퇴폐적 개인들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이다!) 그러한 자들이, 대의를 거론할 자격이 없으며, 오직 자신들과 같은 건전한 상식을 지닌 보통의 학생들만이 그런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퍼포먼스에는 단순히 선언된 것 이상의 증상이 함축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들이 교수님들에게, 나아가 학생들에게 벌인 퍼포먼스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정의감으로 위장된 비뚤어진 '에고이즘을' 축출하고 건전한 일상인의 상식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름의 정의감이 없지 않으며, 심지어 오늘날 평균적인 시민사회의 윤리와 부합되는 그러한 정의감이 반영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정의감에 가득찬 메시지를 전도된 형태로 받아들여, 그것의 '진리'를 기쁘게 수용해야하지 않을까? 그렇다, 우리는 에고이스트이다. 그리고 우리는 에고이스트들의 '정의'를 당신들에게 말하겠다. 

  학교를 지지했던 학생들이 욕망했던 것은, 과거에 운동권이 독점하고 있던 어떤 프레임, 즉 구도를 뒤집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어떤 사회의 보편적인 '대의'라는 사물을 독점한 운동권 세력에 맞서, 그러한 '대의'를 양식 있는 일반인들의 편으로 되돌리고 역으로 운동권 세력을 '에고이스트'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에고이즘'과 '나르시즘'이 다른 범주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확실히 그 충직한 검은 옷의 학생들이 '에고이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나는 그들이 확실한 '나르시스트'였다는 것을 단언하고 싶다. 예를 들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애국자는 확실히 '에고이스트'는 아니지만, 그는 확실히 '나르시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관한 사실은 국가와 민족에 계급이나 기타 항을 집어넣어도 여전히 성립된다. 어쩌면 과거의 학생운동을 지탱했던 것도 비슷한 류의 정의감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학생운동의 종언'에서 실제로 불가능해진 것은, 정의 그 자체가 아니라 '나르시즘으로서의 정의감' 혹은 '나르시즘적인 형태'로서 존속되는 정의감일지도 모른다. 학생들이 운동권에 반해 벌인 퍼포먼스는 그러한 정의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정의가 다름 아닌 그러한 예의 바른 학생들의 우스꽝스러운 연극으로서 '공연'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오히려 '나르시즘적이지 않은 형태'의 정의 혹은 보편적 대의를 학생사회의 수준에서 천명하는 게 아닐까? 가령 나는 에고이스트들의 정의, 혹은 정의감이 확실히 존재한다고 단언하고 싶다. 왜냐하면, 가령 68혁명을 이끌었던 주체들이 다름 아닌 그러한 '에고이스트'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은 유럽에 아직도 남아 있는데, 말하자면 실제적으로 어떤 공동체와 유의미한 관계도 맺지 않는 퇴폐적 개인들이, 그러한 개인들의 권리와 '연대'에 대해 말하고 실천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혹은 그러한 실천이 가능한 '장소'가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유럽의 68혁명(이것은 학생운동에서 시작되었다)의 유산이다. 

  그렇다면 학생사회에서 '에고이스트'의 연대는 어떻게 구현될 것인가? 책마을에서 제안된 '공동생활전선'이라는 제안이 만약 제대로 기능한다면, 그것은 오늘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 의식'이나, '인간에 대한 예의'와 같은 상상적인 범주('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것에 얼마나 많이 의존했던지!)에 의지하지 않는 '정의'를 그 구성원들에게 제공하는 한에서이다. 

  예컨대, 나는 학생운동의 종언의 증거가, 일반 학생들의 학생운동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무관심을 가장하는 '일반학생들'이란 허구적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관심이 있든 말든,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라캉의 말을 빌리자면, 진리를 보증하는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관심하다고 가정된 '학생일반'은 그러한 허구적인 대타자에 불과하다. 오히려 '종언'의 증거는, 학생들이 '정치화'될 수 있는 계기가 오직 '정당정치'의 틀 내부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에서 찾아져야 한다. 내가 잠깐 경험했던 학생운동, 혹은 학생조직은 어떤 정당, 그리고 현실정치적 계파의 연장 선상에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운동에 참가하는 개개인이 아무리 진정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장벽에 부딪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제대로 알아두자! 그러한 사태만이 진정한 학생운동의 종언의 증거이다. 

  오히려, 학생운동의 종언에 대한 반례가 있을 수 있다면(모든 정치적 실천은, '반례'를 실험하고 시도하는 것에 있다!), 그것은 정당조직 외부에서 '정치화'의 경험이 실존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선후배들 간의 상상적 연대의식 속에서 꽃피어나는 술자리에서가 아니더라도, 전혀 다른 형태의 정치적 욕망이 형성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욕망이 지속가능하지의 여부이다. 예컨대, 지금의 학내상황에서 정의감을 요청할 영역들이 아직도 도처에 존재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요청되는 정의감이란, 다른 거시적인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고 마시고 캠퍼스를 자유롭게 거닐 수 있게 하는 데 기여하지만, 학교 구성원으로서 전혀 재현되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그들의 단순한 삶 그리고 욕망이다. 그리고 그들이 요청하는 '정의'가 다른 누구가 아니라, 에고이스트들에게도 아니 오직 에고이스트들에게만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가령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본래 윤리학자였던 애덤 스미스가, 윤리를 정초한다고 말했던 것은 다름 아닌 '에고이스트'들, 에고이스트로서의 개인들이 가진 공감능력 즉 '상상력'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에고이스트들의 상상력은 나르시스트들의 상상력을 넘어선 차원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장담컨대, 앞으로의 학생들의 운동은 반드시 에고이스트들의 연합, 혹은 에고이스트들의 어소시에이션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