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될 수 없다. 
 
 
 
 

더이상 할 이야기가 없었다. 칼럼을 쓰고 있긴 한데, 과거에 했던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하고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전역인사'로 완성될 나의 모든 칼럼들은 언제나 피상적이었다. 나는 피상적인 글쓰기만 하고 있었다. 피상적인 글쓰기는 곧 지겨움을 불러왔다. 

나의 칼럼들은 모두 '전개'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위기'와 '절정'을 밀어올리고자 부던히 올려제끼고 있는 복선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나의 이야깃거리는 풍성을 바라는 '나'와 '너'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내가 화수분인줄 알고 우쭐댔다. 그러나 나 또한 비우고나면 채워야하는 '그릇의 인간'이었다. 나는 쏟아내면 채워야했다. 빈그릇은 요란했다. 요란하지 않은 글쓰기를 원하기위해 침묵했지만 결과물을 원하는 '나'와 '너'는 여전히 만족할줄 몰랐다. 나는 끊임없이 요란한 글쓰기를 견지했다.

바닥을 보이는 내 그릇의 위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찾아온 좌절은 뛰어난 문필가들이 포진한 책마을 때문이었다. 아는 것도 많고, 글도 잘쓰고, 게다가 감수성까지 뛰어나! 이것 참, 나같은 평민은 뭐 하라는건지. 

'우리는 수사학이 선인 세대야.' 라고 한유주가 말했다. 수사학을 만족시키기위해 '당신'의 칼럼을 베껴쓰기도 했다. 모자란 필력과 이야깃거리를 채우는데는 수사학이 최고였으니까. 뭐가 있어보이게 하는 데는 '내것이 아니라도' 덧붙이면 끝이었다.

그래서 하지연을 모방했고, 주영준을 모방했다. 김강록도 모방했고, 허원영도 모방했다. 송희석을 모방했고, 마성은을 모방했다. 김지민을 모방했고, 조주현을 모방했다. 황민우를 모방했고, 허익준을 모방했고, 김대현을 모방했다. 여러가지 가면을 쓰며 나는 네가 되기 위해 애를 썼다. 네가 된다면 네가 가지고 있는 그 것들을 가질수 있는줄만 알았으니까. 페이스 오프의 니콜라스 케이지처럼. 

그리고 혼란이 찾아왔다. 

비어있는 그릇은 색을 바꿔가며 '타인'의 업적을 가로채기에 바빴다. 기대하던 반응은 초라하기만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들이 되지 못했다. 색을 바꾸는 나는 여전히 '나 라는 그릇'이었다.

그릇의 여기저기서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염색을 자주하면 머릿결이 나빠지는 것처럼, 그릇은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타인의 스타일은 스타일의 본인에게만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들의 색은 나에게 맞지않는 옷과도 같이 헐렁하고 펑퍼짐했다.

오늘, 책가지에 있는 27사 시절의 과거 칼럼을 들춰봤다.
작년의 김강록, 하지연, 안대섭, 허원영, 강승민, 김동석, 김동환,  한상원, 주영준.
27사 눈팅회원일때 느꼈던 감동과 감정이 어제도, 오늘도 차오르는 밀물처럼 밀려왔다. 

똑같은 글인데도 어쩜 이리 다를까. 똑같은 사람인데도 어쩜 이리 다를까. 나도 이렇게 쓰고싶은데. 나도 이렇게 생각했는데 왜 써지지는 않을까. 재미도 있으면서 여운도 남는 글이라니. 글에는 글쓴이의 치열한 과거의 삶이 반영된다는데 나는 이렇게 살아오지 않고 뭘 했던가.

그리고 솔직한 글을 몇개 썼다. 필진 추천이 들어왔다. 낼름 받았다. 필진이라는 명찰만 달면 그들처럼 쓸수있게 될줄 알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들이 되고싶었다. 그들이 살아온 치열함, 그들이 이룩해온 업적 뒤에 보이지 않는 백조의 발. 전혀 보지 못했다. 금메달의 자리. 딱 거기에 서기만 해도 좋을것 같았다.

아니,

그런데 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되지 못했다.

나는 네가 될 수 없었다.

예전 MBC에서 테마게임이라는 프로그램을 했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몇개의 에피소드 중에서 이런 것이 있었다.

이윤석이 아마 주인공이었을거다. 이윤석은 A를 너무나 존경했다. 그래서 A를 닮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A의 뒤를 캐보니 A는 B를 닮으려고 애를 쓰고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이윤석은 'A가 닮으려는 B'를 다시 이상형으로 삼고 B를 닮으려고 했다. 그런데 B는 또 C를 동경하며 닮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윤석은 'A가 닮으려는 B가 닮으려는 C'를 닮으려고 애를 썼다. C의 일거수 일투족을 졸졸 따라다니며 C를 닮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C가 이윤석을 동경하며 닮으려고 했다는 사실이었다.

이윤석은 C의 뒤를 캐며 다니다가 그 사실을 발견하고 혼란하게되는 장면을 비춰주고 이윤석과 A와 B와 C를 네등분된 한 화면에 보여주며 극은 끝나게 된다. (A와 B와 C는 아마도 김국진, 김진수, 서경석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나는 네가 될수 없다. 네가 어쩌면 내가 되고싶어서 안달났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시나리오 어떻게 쓸것인가의 저자 로버트 맥기는 자신의 저서에서 초기 작가들이 저지르는 겪는 슬럼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작가들은 몇개의 시나리오를 탈고하고나면 할 이야깃거리가 떨어지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슬럼프에 빠지게되고 더이상 할 이야기도 없는데 무슨 새로운 시나리오를 쓰겠냐고 지레 짐작하고 펜을 손에서 놓게 된다. 

그러나 로버트 맥기는 그들에게 충고한다.

'글 쓰는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라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하고싶은 이야기가 떨어지면 끝난다. 그러나 글쓰는 행위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글을 쓰지 않으면 끝난다. 따라서 즐거움을 느끼려면 우리는 글을 써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강박관념에 빠졌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칼럼은 결말을 위한 '전개'여야 한다. 무언가를 전달해야한다. 라는 강박관념. 그래서 나는 글쓰기가 어려웠다. 즐겁지 못했다. '자신이 즐거운 일을 해야지요'라며 충고하던 내가 즐겁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니. 

그래서 나는 다시 글을 '즐겁게' 쓰기로 했다. 이영기처럼.

나를 나로써 나타내는 글은 즐겁다. 자다가 남의 다리를 긁는다고 해서 내 다리가 시원해지지는 않았다. 내가 시원함을 느껴야, 남들이 내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다리도 긁어주는 느낌을 받는다. 

글쓸 거리를 엉뚱한데서 찾는 습관을 버리기로 했다. 나는 네가 될수 없기에 '너의 마음' 또한 완벽하게 파악할수는 없었다. 내가 완벽에 가깝게 파악할수 있는 '마음'은 오직 나의 마음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나에게 솔직한 글을 써야했다. 

다시 한번 일상에 관한 이야깃거리를 수첩에 끄적일것이고, 살아갈 것이고, 생각할 것이고, 밥을 먹을 것이고, TV를 볼 것이고, 책을 볼 것이고, 과업을 할것이다.

그러다 문득 쓰고싶은 것이 생길때쯤. 그때 즈음. 

나는 글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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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달려봅시다. 흔들리던 마음 잡았어요. 

  
 
 
 
병장 김동석 (20060803 153359)

박진우님을 첫번째로 추천한 것은 저입니다. 핫핫.    
 
 
병장 고계영 (20060803 154302)

류시화의 책제목이 생각나는 제목이네요.[왜 나는 네가 아니고 나인가]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 
진우님의 글을 쓰는 이유. 요즘 점점 진우님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거 큰일입니다. 참. 흠. 
같이 달릴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들' 하하하. 잘 읽었습니다.    
 
 
병장 이영기 (20060803 170358)

글쓰기의 왕도는 배설적 글쓰기라니까.    
 
 
병장 고계영 (20060803 171111)

[배설의 왕 다작영기]. 역시. 다작만이 살길인가..흠.    
 
 
병장 김희곤 (20060803 171130)

하하. 열심히 달려주세요. 밖에서 어떻게 접할 수 없나 이번 정모 때 꼭 논의해 보아요.    
 
 
병장 김강록 (20060804 022651)

누군가를 닮으려는 노력은 그 사람과 나의 차이만을 부각시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발견이라는 긍정적인 변증법적 귀결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요. 제 좌우명 2번이 과거의 내 모습이 부끄러울 수 있는 건 오늘날의 내가 그만큼 성장했기 때문이다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은 언제나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면모를 동시에 가지고 있지요. 낙관과 비관은 서로 이면의 관계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중에서 어디를 보느냐라고 생각합니다.    
 
 
상병 배지훈 (20060804 071805)

난 그래서 리플을 단다 
(먼산)    
 
 
병장 조주현 (20060804 082714)

저에게 정말 와닿는 글이군요. 

테마게임, 정말 좋아했었는데    
 
 
병장 주영준 (20060804 083618)

귀여워 귀여워. 진우. 이렇게 업그레이드인가. 기대할께요. 연말전역 파이팅.    
 
 
 병장 김동환 (20060804 083805)

와. 좋습니다. 너무.    
 
 
 병장 박진우 (20060804 093134)

덧. 
즐기세요- 라던가. 
즐거움엔 힘이 있다- 라는 
CJ 의 카피는 좌우명일정도로 매우 좋아합니다.    
 
 
병장 박종민 (20060804 161047)

단결하라 연초 전역자들이여. 

음. 테마게임 광팬이었어요. 그 에피소드. 저도 지인들과 이야기하닥 간혹 꺼내는 이야긴데, 
기억하는 사람이 여기에도 있었군요. 

부럽네요. 저는 아직도 제 삶을 쥐어짜서 치장하는 글쓰기에 질려버려서 
한참 헤메이고 있는데. 슬럼프 탈출 축하.    
 
 
병장 주영준 (20060804 210030)

노루종민  2006년 12월 31일 다음날은 2006년 12월 32일이라는 걸 모르시는 사람이 아직도 있었을 줄이야.    
 
 
병장 박종민 (20060808 204929)

...그럼 난 12월 62일쯤 전역하면 되겠네. 

연말전역 파이팅... (...)    
 
 
병장 박형주 (20060808 212351)

어쨌든 세번 중에 한번만 안타를 치면 톱 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타를 칠 때의 스윙이 삼진당할 때와 뭐 그리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냥 조낸 휘두르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