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기억하지 못한다. 
 병장 이진호 03-09 11:16 | HIT : 247 



#1. 나는 너를 기억하지 못한다.
- 사요나라 병들이여-

"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굴까?"
" 아무래도 지금 들어오는 훈련병들 아니겠습니까? 하하"
" 나는 말야. 음. 가장 불쌍한 사람은, 제대하는 날 새벽에 쏜살같이 위병소를 통과해서 
 민간인이 되는 찰나에, 자신이 부른 콜택시에 치여 죽는 사람이 제일 불쌍해"

 쳇. 설마. 설마 하면서 불쌍하다고 나는 혀를 쯧쯧 찼다.
 혀에 무언가 이물질이 있다는 느낌에 혀를 쯧쯧 차는 지금, 억지 이야기를 나눴던 그 사람은 없다.
 나는 그사람을 기억한다. 
 정확한 표현을 쓴다면 그가 말했던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사람의 기억은 참 길다.
 주민번호, 군번을 헷갈리지 않고 기입하고, 생판 처음들은 복무신조를 2년이나 외우고
TV 에서 10년 전 초등학교 동창을 한 번에 찾아내는 것 모두 기억력이 길기에 가능하다. 
 책에서는 그렇게 적혀있다.
 아니, 밖에서는 그럴 것이다. 사회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곳은 그렇지 않다.

 내 곁에서 자고 있던 고참이 오늘 나간다고 해도, 한 달뒤에도 1년 뒤에도 기억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인사한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는데 그의 얼굴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코가 하나였고, 눈이 두개였던 건 확실한데 얼굴을 떠올리려 하는 건 
 중학교 2학년 여름때 내가 했던 말투를 떠올리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안면인식장애인가.

 시각에 문제가 있다면 후각이라도 있잖아. 
 사람에게는 각기 냄새가 있다고 해서 그의 관물대를 향해 연신 코를 킁킁거려 보지만
 땀에 절은 내 녹색양말이 이미 후각신경을 마비시켰다.

 촉각이라. 내 손이 섬세한 것도 아니고 그를 촉촉하게 정답게 스킨십 해 본적이 없다.
 미각이라. 어허. 나는 그를 맛보고 싶지 苛?

 난 그를 잊어버린 것일까. 
 우습게도 그런 질문을 되물어보지만 하룻밤을 더 자면 아무렇지가 않다. 
 그러다가 하룻밤을 더 자고, 하룻밤을 더 자고 하룻밤을 더 자면
 마치 그는 없었던 존재였던 것 처럼. 
 마치 그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 처럼.

 유통기한이 있다.
 우리는 웃기게도 유통기한이 있다.

" 너 유통기한 몇 일이야?" 
" 나 이제 20일 남았어."
" 우와. 진짜 많이 썩었네."

 포장이 깨끗하면서 광택이 나는 상품이 들어온다. 
" 너는 유통기한이 몇일이야?"
" 저는, 700일입니다."
" 토나와. 어떡하니. 너는 항상 싱싱하겠구나."

 다들 빨리 썩기를 바란다. 죽기를 원한다. 
 빨리 썩어서 된장띄우는 냄새가 나면, 못먹을 정도로 곪는다면 우리는 그때 죽는다.

 죽는다. 
 살고 싶더라도 죽는다. 일요일날 아무리 종교활동을 한다고 하지만 죽는다.
 우리는 군대에서 죽는다. 
 유통기한 187일인 내가 현재는 밥도 잘 먹고 생생하게 살아있지만
2007 년 8월 21일 이후에는 군대에선 이미 죽은 존재다.

 다들 기억하지 못한다. 
 어제까지 방구를 끼고, 여자연예인의 미모에 관해서 한참 논쟁을 나누었던 그 김병장의 자리가 느껴지지 않듯이.
 우리는 유통기한이 지나고 나면 이미 없는 존재다. 

 방구를 끼는 녀석은 김병장이 아닌 강일병이 대체하고 있고
 여자 연예인을 논하는 건 이미 서병장이 맡아서 하고 있다.

 리셋된다. 
Ctrl+Alt+Del 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리셋된다.
 마지막 대왕을 쓰러뜨리기 위해 달려갔던 캐릭이 다시 처음으로 시작한다.

 유통기한은 상품출고일일 수도 있다.
 우리는 사회를 적응하기 위해서 잠시 머무르고 있다.
 울고 웃고 떠들고 그렇게 미친듯이 먹다가도 떠나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안에 있던 사람이나 밖에 있던 사람이나

"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굴까?"
" 아무래도 지금 들어오는 훈련병들 아니겠습니까? 하하"
" 나는 말야. 음. 가장 불쌍한 사람은, 제대하는 날 새벽에 쏜살같이 위병소를 통과해서 
 민간인이 되는 찰나에, 자신이 부른 콜택시에 치여 죽는 사람이 제일 불쌍해"
" 죽어서 불쌍한 겁니까? 재수없는게 아니고 말입니다."
" 몰라. 차라리 더 불쌍한 사람은 그 사람과의 추억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아무개로 기억하는 우리들인가."

 김병장님. 강일병. 그리고 나랑 훈련소에서 같이 훈련받던 동기야.
 우리가 그렇게 미친듯이 웃고 미친듯이 떠들고 미친듯이 분노하고 미친듯이 샤워하던 그때에
 그렇게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아.

 한잔하자던 그 약속은 떠나고 나서 어디로 갔나.

 우리는 그럴까. 우리는 그것밖에 안되는 것일까. 우리는 기성품일까. 
 우리는 이마트에 널려있는 진열품같은 것일까.

 아니잖아.


 저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유통기한 187일입니다. 저는 곧 사라집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요.

 이진호 병장에서 
 이병장으로 
 그리고 김병장으로 
 그리고 어떤 사람으로 불리겠죠.



 상병 김병완 
 재밌게 읽었습니다. 웃음 마음에 드는 글이군요 03-09   

 상병 진규언 
 잘 읽었어요.. 와닿네요. 딴지는 아니구요, 유통기한이 165일밖에 안남으신 부폐하고 계신중의 이병장님인것 같아요..(웃음) 03-09   

 병장 이진호 
 허허. 예전에 썼던 글이거든요. 규언님. 
 그렇다고 제가 매일 변하는 유통기한을 바꾸기에는 수정을 하는게 귀찮네요. 03-09   

 상병 김지민 
 헤헤, 잘 읽었습니다. 표현이 극단을 달리는 만큼 와닿는 바도 많네요. 이 곳은 어디일까요. 사람을 죽이는 일은 굳이 살인 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잊는다는 것이라는데. 이곳은 살인자들의 단체가 아닐까요. 왜 우리는 잠시 2년의 세월들 속에서 묻혀 살인자가 되는 것일까요. 

 더욱이. 

 바깥 역시 마찬가지의 세상이 아닌가요? 하루에도 몇 명씩 지워내리며, 핸드폰 전화번호 목록에는 언제 전화했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이름이 수두룩하고. 알았던 이들은 다 어디갔을까. 기억속에서 몇 번 씩이고 죽이며 


 에이. 근데 뭐 어때요. 죽고 죽이며 사는거지. 그러다 부활도 하고. 
 내가 나를 기억하면 되잖아요. 03-09   

 병장 배진호 
 그나저나.. 유통기한이 지나면 우리는 썩어서 버려지는 걸꺼려나요? 

 아니면 새로운 기계에 들어가서 새로운 제품으로 탄생하는 걸까요? 03-09   

 병장 이영준 
 아아. 역시. 진호씨의 리플을 보고 맞구나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맨 첫 문장을 읽을 때 부터, 어디선가 본 글이라는 느낌이 들었더군요. 
 데쟈부가 아니었군요. 
 저는 유통기한이 빨리 지났으면 좋겠어요. 이 안의 일은, 이제 뭐든지 지겹거든요. 
 다음주면 입대 2주년이지만, 아직도 유통기한이 9X일 남았네요.. 03-09   

 일병 문태진 
 상당히 공감가는 글이네요.... 03-09   

 병장 임정우 
 세상은 다 똑같아요~ 아 모든것은 지나가지요~ 
 썩은 물이던 싱싱한 물이던 해골바가지에 담아 먹어요~ 
 아, 젠장이네요~ 03-09   

 병장 권이청 
 내가 나를 기억하면 되잖아요. 
 좋습니다. 03-09   

 일병 이재민 
 이곳의 인간관계는 역설적이게도 단편적입니다 03-09   

 상병 김선목 
 진호씨 저보다 10일 먼저 가시는군요. 참 많은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당장 8일전에 전역한 군생활하면서 가장 친하게 지내고 많은 소통을 가줬다고 느꼈던 한 선임도 어제 전화로 복학해서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왠지모를 낯설음이 느껴지더군요. 어느순간 그 사람과 저도 군생활 
 을 잠깐 같이 했던 누군가로 전락될지도 모른다는 서글픔이 드네요. 03-09   

 병장 민경갑 
 멋진 글이네요. 
 이곳에서의 인간관계란게 참 씁쓸할때가 많아요. 
 한계가 있는것 같아요. 마치 인간의 본능을 저울질하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03-09   

 병장 한상민 
 저에게는 이곳에서만의 일이 아니네요... 
 나들이를 다녀올때마다 휴대폰 전화번호 목록, 싸이월드 일촌목록이 자꾸 줄어드네요... 
 문제는 제 쪽에서 끊는다는데 있는거 같습니다.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네요 ... 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