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지는 것에 대하여
병장 김지민 05-11 16:36 | HIT : 292
'길들여지지 말라'
행정병이라면 거의 사용하고 있을 한컴쪽지. 나의 컴퓨터 한컴쪽지 중앙에 크게 씌여져 있는 말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말을 나의 좌우명처럼 생각하고 실천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쥐먼사 근무병으로 있으므로 따까리 노릇을 그야말로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내게, 이런 말은 오히려 어울리지 않는 말이겠지만, 나는 이 말을 보며 항상 길들여지지 말아야지 하고 굳게 다짐하고 있다. 길들여 진다는것은 타자가 된다는 것이니까. 수동이 된다는 말이니까. 알게 모르게,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타인의 의지에 흡수되어 버린다는 것이니까, 달가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결론 하에 내린 좌우명이다.
누군가를 길들이는 것은 많은 대상을 포함한다. 그리고 길들여지는 것 또한 많은 주체를 포함한다. 그것은 수두룩하게 많은 것들이다. 굳이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상황과 시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조차도 이런 길들임의 주체 내지는 대상이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길들여지지 말라' 라고 하는 말은 많은 의미를 담는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수동이 되지 말자' 라고나 할까. 그것이 핵심이다.
언젠가 공관병으로 일을 하는 고참에게서, 병사들도 간부들을 길들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였지만, 그렇게 듣고 나니 감흥이 색달랐다. 길들인다고? 간부를?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사람을 길들일 수 있다. 밀고 당기기를 통해서, 아부와 협박을 통해서, 사람은 길들이고 길들여지고 있다. 그것은 꼭 우위에 있는 사람이 주체가 되는 이야기가 아니고, 하위 사람의 경우에도 해당 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것을 몰랐다. 나는 다만 길들여 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누군가를 길들인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었다. 그랬기에 그 고참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보여주고 어떻게 말을 하냐에 따라서 윗사람을 길들일 수 있다니. 주도권의 문제는 결국 자기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때, 나의 좌우명은 더욱 큰 힘을 얻게 된 것 같다.
맨 처음 전입왔을 때가 기억난다. 아직 뭐 짬이 그렇게 많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은, 그때, 그 이등병 초기 무렵에는 누구나가 그렇듯이 고참들의 짓궂은 장난에도 주눅이 들고 그저 무서워서 벌벌 떨던 시기였다. 고참이 무슨 말만 했다 치면 '죄송합니다'가 연발로 나왔고, 어떻게 대처 할 줄을 몰라 그저 고개 수그리던 하루 하루 였었다. 그 무렵에 Y라는 사람이 내게는 특별히 더 그러한 사람이었다. 별 잘못을 하지 않아도 그는 나에게 한시간이 멀다 하고 잔소리와 갈굼을 해 대었고, 나는 쫄아서 그 시간들을 보내기 일수 였다. 가끔 때리는 시늉이라도 할라 치면 겁먹은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기도 했으니까. 나는 철저하게 그에게 약해지고 있었던 것 같다. Y는, 이른바 꺾인 상병으로서 내무실 안에서도 꽤 많은 힘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그런 '전체적인 힘'까지도 나에게는 위협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Y는 나와 어떤 다른 고참을 데리고 음료수를 마시자며 나가자고 했다.
"얘 음료수 왜 사줍니까?"
다른 고참이 나를 가리키며 Y에게 물었던 말이다. Y는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를 무서워하는 나로서는 이 자리가 마냥 불편하기만 하고 힘들었으므로, 오히려 음료수를 먹는 행위 자체가 부담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Y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Y상병님 이런 스타일 좋아하십니까?"
다른 고참이 또 의아했는지 물었다.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건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Y는 나를 때릴 시늉을 하면서 '뭘봐 색히야' 라고 말했을 뿐.
그 이후로 Y는 내게 많은 온정을 베풀었다. 두려움에서 호감도로 발전 하는 것은 꽤나 많은 상승 곡선을 그리는 일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를 안 좋게 평가 하던 나의 마음속은 '아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괜히 그런거구나'하는 이해심으로 변하여 그렇게 까지 좋을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이라면 괜히 신임이 가고, 좋기도 하여, 얼씨구나 하고 따랐고, 그는 나를 거의 오른팔 처럼 다룰 수가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 그는 정말 사람을 길들이는 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소신적 의지라는 것은 온데간데 없고 오로지 속된 '충성'만이 남아있었으니까. 철저하게 길들여졌던 셈이다. 사실상 나 좋고 그도 좋은 일이었으니까 결과론적으로 나쁜 일은 아니지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계획과 의도에 의해서 나는 그를 평가하게 되고, 또 그 의도에 맞춰 따르고 충성하게 되었다니. 이렇게 처절하게 길들여 지는 것이 어디있는가. 오히려 진실된 충성을 내가 바쳤다는 것이 지금에 와서는 더욱 더 찜찜하기도 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타인의 계획에 의해서 길들여지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항상 주체이고 싶었다.
언젠가 한번은 우리 분대로 온지 몇 일 안 되는 막내에게 충고삼아 한마디 해준 적이 있었다. 이유인즉,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내무 부조리의 한 형태를, 과한 충성으로 나에게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나는 참 이것이 고맙기도 하면서도 속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한마디 해줘야겠다 싶어서였다.
나는 녀석에게 '니가 이런 행동을 여러번 하면 나는 거기에 길들여 질거야' 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길들여지게 되면, 그것은 너에게 피해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 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넘치는 충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테니까. 마치 연인사이에서 넘치는 애정은 위험한 것처럼.
이런 친절한 설명에 덧붙여 나는 과감하게도 고참도 길들일 수 있는 존재라는 깨달음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니까, 충성을 보여주되, 잘 길들이면서 하란 말이야. 하고...
근데 나를 길들일려고 하면 죽여버릴거다.
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내 의지로서 걸어나가고 싶다.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일들과 사람들에게 부딪겨, 길들여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도 많겠지만은, 나는 최대한 항거 하고 싶다. 길들여지지 않는 쪽으로, 내가 주체가 될 수 있는 쪽으로, 타자의 목표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싸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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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탕입니다.
그리고 첨언 혹은, 변명
- 저의 허접한 독서후기 중 1984를 읽어 보셨다면 이 글의 취지와 제 독서 후기의 감상이 다소 다른 면을 드러내고 있음을 인지하시는 분이 있으실겁니다. 여기서는 길들여지지 않겠다고 말했으나 1984에서는 길들여지는 것에 대하여 찬성한다고 써 놓았으니까요. 그러나 여기에서 차이점 아니, 혹은 공통점은
' 목적의식을 가지면서도 허술하고 그래서 티가 나는 길들임'
에 대한 항거 입니다.
길들임에 대하여 찬성하는 것은 이런 조건이 붙습니다
1. 나의 의지와 동떨어진 권력의지가 창조한 길들임일 경우. 그래서 항거가 소용 없을 경우
2. 완벽한 길들임으로서 인식 체계 자체를 바꿔 길들임 당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길들임일 경우
이상 조잡한 첨언이자, 변명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은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길들여 지고 길들이게 된다는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길들임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혹은 세계에 대한 부정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시한번 위와 같은 '단서'를 제시합니다.
일병 김대윤
저도 제 후임들한테 하는 소리가 "나한테는 그렇게 하지 말아라. 익숙해지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나는 그게 싫다." 라는 이기적인 말입니다. 하하. 저는. 이나영에게 길들여지고 싶습니다. 조금 더 원초적으로는 사육(이런 짐승같은 응?). 05-11
병장 김지민
완전한 사육(!!) 05-11
상병 천재혁
하지만.
이미 거의 일상의 모든것에 길들여지지 않았으련지 생각해봅니다. 05-11
상병 안근홍
길들여 진다는거.. 무서운 일이지요... 05-11
병장 이승일
완전한 사육!!(장편) ........
' 단서' 들에 동감합니다. 타인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들에 의해 길들여지겠지요. 자신의 편협함과 욕망과 무지와 분노심에 의해.. 05-11 *
상병 구본성
처음엔 괜찮다가도 지내다 보면 길들여진 관계가 싫어질 때가 있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다시 관계설정을 하기는 매우 힘들지요. 처음이 중요한데, 어떻게 해야지 잘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05-11
상병 김윤호
예전에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시 보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군생활을 예전보다 더 오래해서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05-14
병장 진규언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05-14
상병 박수영
잘 읽었습니다. 길들여진다. 익숙해진다. 가끔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05-14
상병 박대규
어느정도의 전적으로 공감가는 글이네요...
사람은 처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나중에 적응(?) 및 길들여지고 나면...
나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진것을 당연시하면서 살아가곤하죠..
저도 이미 길들여진 완성품이 아닐런지...? 05-14
일병 이재민
마치 연인사이에서 넘치는 애정은 위험한 것처럼.! 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