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로 산다는 것』, 고종석 외 
 병장 진규언 06-04 10:36 | HIT : 203 



 시사저널 사태 일지

2006 년
6 월 16일 :S사 이학수 부회장의 인사 전횡 의혹을 다룬 경제면(3쪽) 기사를 금창태 사장이 인쇄 직전 단계에서 삭제.
6 월 19일 : 이윤삼 편집국장, 뒤늦게 기사 삭제 사실을 알고 항의 표시로 사표 제출.
6 월 25일 : 팀장 전원 서면 경고, 취재총괄팀장,편집팀장 감봉 3개월 징계 받음.
6 월 29일 : 시사저널 노동조합 출범.
7 월 5일 : 한겨레21 고경태 편집국장과 한국기자협회 정일용 회장, 민주언론시민연합 최민희 공동 대표를 금창태 사장이 명예 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발.
8 월 14일 : 장영희 취재총괄팀장 무기 정직 및 출근 금지 징계 받음.
8 월 23일 : 백승기 사진팀장 자택 대기 및 출근 금지 징계(뒤에 무기 정직으로 바뀜)
9 월 10일 : 노순동, 윤무영 기자 사장 의자 편집국으로 옮긴 뒤 정직 3개월 징계 받음
10 월 12일 : '시사저널 정상화를 위한 공동대책위' 출범
10 월 16일 : 시사저널을 사랑하는 모임(시사모) 발족(공동대표 : 고종석, 이재현)
12 월 5일~7일 : 경영진, 비상근 편집위원 대거 위촉(중앙일보 기자들 대거영입)
12 월 15일 : 단체협상 최종 결렬.

2007 년
1 월 11일 : 시사저널 노조, 무기한 전면 파업 돌입
1 월 22일 : 금창태 사장, 직장 폐쇄.
2 월 1일 : 고재열 기자, '시사저널 커버스토리, 이것이 기사면 파리도 새다' 기고 관련 무기 정직 징계 받음.

~ 현재 : 원 시사저널 기자들이 항의의 표시로 전면 파업에 돌입한 가운데 경영진은 모 일간지의 기자들을 빌어와 '짝퉁' 시사저널을 양산해내고 있으며, 이에 독자수는 점차적으로 감소. 부대내 우체국에도 매주 배달되고 있는걸 보면 참 신기함.


 벼락처럼 기획된 책이다.

1989 년 한국 사회가 가까스로 암흑의 시기를 벗어나려는 무렵에 혜성처럼 나타나, 기존 잡지의 패러다임을 단숨에 바꾸어 놓은 잡지. 시서저널. '한국의 타임'이라는 별칭대로 시사저널은 창간하자마자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논조, 적확하고 품위있는 우리말 문장, 세련된 디자인을 선보이며 단숨에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기자들의 면면 또한 화려하였다. 언론계 대부이자 한국방송 사장을 지낸 박권상, 당대의 문장가로 통하는 소설가 김훈, 시사지 최초로 여성 정치부장과 편집장을 역임한 서명숙, 느림과 기다림의 미학을 노래하는 시인 이문재 등, 쟁쟁한 글쟁이들이 지난 18년 동안 시사저널을 거쳐갔다. 한반도 전문 기자, 탐사 보도 전문 기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한국형 전문 탐사 보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 또한 시사저널 기자들이었다.

 색깔론에 휘말릴때에도 '언론의 정도'를 걷겠다는 일념하나로 버텨왔으며, 왜곡된 사실이 아닌 사실 그대로의 사실을 보도하고자하는 편집국의 고집이 이른바 '시사저널 사태'를 불거지게 했다. 2006년 6월 시사저널 경영진이 기자들 모르게 삼성 관련 기사를 삭제함으로써 사태는 파행으로 치달아 결국 기자들은 파업에 돌입하게 되었고, 경영진은 그에 맞서 직장 폐쇄라는 극단적인 조처를 단행했다. 주요 언론사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런 경우 출간을 축하한다고 해야 할지 좀 헷갈린다. 좋은 시절에 책이 나와야 흔쾌한 마음으로 받아들 터인데, 요즘의 사서저널 사태가 이 모양이니 한편으로 무거운 마음이 앞서는 걸 어쩌겠는가. 용서하신다면 이번에는 절반의 축하만 보낼까 한다. 시서저널이 이 아픔을 이겨 내고 거듭나는날, 나머지 절반의 축하를 기쁜 마음으로 마저 보내드리고 싶다. - 손석희, 언론인 성신여대 교수 


 정기 구독자가 아니었다. 몇번 접해보았을때 그저 그런 주간지겠거니 했다. 주간xx, 주간oo 등과 마찬가지로 일간지보다야 깊이 있는 내용이되, 시의성은 조금 떨어지는, 읽기는 훨씬 편한 그런 주간지구나 했다. 이곳에 들어와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척에서 일이 벌어졌을때 눈이 가려져 있었으며 귀가 멀어있었다. 매일같이 접하는 '주류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시사저널이 끈질긴 명맥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역설적인 사실을 목격하고 만다. 영내 우체국에는 어김없이 금주 시사저널이 배달되어 왔고, 이것이 J일보인지 주간J인지 구분이 안되는 기사들을 머금고 있었다. 담뿍 머금은 주간J(시사저널)에는 자본의 논리에 영합하지 않고, 권력에 영합하지 않는 fact를 전달하고자 하는 굳어진 시서저널의 정신을 찾아보기 힘들다.

 한겨레21과 비슷한 논조를 띤다고 해서, 혹은 오마X뉴스에 자주 소개된다고 하여 이들을 살포시 왼편으로 두는 우를 범하는 것은 결례이다. 사실을 보도하는게 언론의 존재 의의라면(독자들이 원하는 것이 사실인양 호도되고 있지만) 그것을 증명해내는 것이 뒤따르는 당연한 과제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옳은 것을 옳다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는 주관적인 판단을 배제하려 노력한 채, fact를 전달하고자 노력했던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기실 그러하다. 그들이 좌편이 서있는것이 아니라, 그들을 좌편으로 내모는 스스로가 우편이 되는 것이고, 그들을 우편으로 몰아치면 자신은 좌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혹은 '사건'에 대한 주관적 판단이 우리를 나누는 것이 아니던가. 

 고로 기다려 본다. 벼락처럼 재창간될 (진짜)'시사저널'을.
 그날엔 주저없이 정기 구독자가 되리라는 다짐과 함께
 그들의 기사에 대한 주관적 판단은 전적으로 
 경제주간지와 J일간지의 열혈독자이자 보수우익인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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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병 박준연 
 한겨레21에서 시사저널사태를 다뤄준 기사를 종종봐서 저는 살포시 왼편으로 두는 결례를 범했네요. 아차, 그리고 규언님은 보수우익이셨군요.(웃음) 06-04   

 병장 김지민 
 보수 우익이라는 단어가 유독 강렬한 결언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단한 규언님이 느껴집니다. 06-04   

 병장 진규언 
 준연, 두려움이 많아 아예 다루기를 꺼려하는 주류언론들의 행태로 인해 원하든 원치 않든 좌편으로 둘 수밖에 없게된것 같아요. 한X레21 측은 그들과 독자를 양분하는 체제였기에 사태의 정점기에는 보도를 자제해왔다는 음모론을 규명해야합니다. 근데 정말 보수우익 맞아요(웃음) 

 지민, 개인의 안위를 가장 먼저 고민할뿐더러 국가주의에 매몰된 개인을 지양하면서도, '국가 정체성'이 결여된 개인은 꺼려지게 되고, 결국 굳건히 디디고 있을 토양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다시 귀결되는걸 보면 우익은 맞습니다. 저 빌어먹을 민족주의에 함몰되고 싶지도 않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우선생각하고자 하나 민족주의 색채가 눈꼽만치도 남아있지 않은 내 조국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보수라는 가치와 우익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잘 융합되느냐는 제가 감내해야할 몫이겠지만요. 06-04   

 병장 김일섭 
 제가 보기엔 한국엔 좌익다운 좌익이 없답니다. 개체주의를 지향한다는 분들이 19c 구소련에서나 했을법한 섬뜩한 집체극이나 헤대니 원. 우익이라고 나을 건덕지도 하나도 없습니다.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확실하고도 실천적으로 보여주시는 XXX당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포진해 계시고 있기 때문이죠. 하여간에 책 마 을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결론- 브루스커밍스류의 소설따위 "한국전쟁의 기원'등의 서적을 읽는다면 브레진 스키의 '거대한 체스판' 정도로 지적균형감을 맞추시는게 어떨까 합니다. 하하 이거 결론이 이상한데? 06-04   

 병장 진규언 
 일섭, 사실 전 개체주의에 대해 모종의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허락된 개체의 범위이며, 어느 선까지가 '개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임계점인지 잘 몰라서요. 인생에서 최정점으로 집단에 속해 있으면서 개체를 지향하지만 개체주의에는 반감을 가지고 있다? 참 이상해요. 06-04   

 병장 김일섭 
 규언// 본래 개체주의의 참뜻은 개체를 실체적, 제일의적인 것으로 보고, 보편 또는 전체를 비본질적.제이의적인 것으로 보는 주장이죠. 한 마디로 개별적인 것만이 진실이라고 하는 입장이에요. 
 집단을 개인보다 중시여긴다고 볼 수 있죠. 이는 개인으로 출발한 근대국가의 이념과 어느정도 일치점이 찾아지지만, 그 사회의 구성원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열심히만 노력한다면 정의로 나아갈 수 있고 그것이 곧 공동의 선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규언님이 궁금해하시는 부분. 어디까지를 개체로 볼 것인가의 문제는 개인입니다. 각 개인. 개인의 존엄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것이죠. 이것이 그들의 출발점입니다. 
 규언님께서 이상하게 보는 부분은 좌파라는 시각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물전 꼴뚜기 삿갓쓰고 시 읆는 똥파리들이 우글우글하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좌파의 본질은 "탈국가주의", "개체주의", "휴머니즘" 인데. 뭔 일만 있으면 거리에 가득모여서 ... 아시죠? 더 궁금한 점 있으면 물어보세요~~ 06-04   

 병장 김일섭 
 준연// "모든"이라는 말은 붙인 적이 없습니다. 좌파의 본질과 모든 좌파의 본질은 전혀 틀린말입니다. 휴머니즘의 뿌리가 개체주의가 되지 않으면 무엇이 될까요? 탈국가주의가 무엇입니까? 그냥 단순히 국가를 벗어나고픈 욕망정도로 생각하십니까? 이익의 관점에서 국가의 이익보다 개개인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논리가 탈국가주의입니다. 따지고 보면 휴머니즘, 탈국가주의, 개체주의는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06-04   

 상병 이기중 
 한국에 좌익다운 좌익이 없다는 분들은 그 좌익답지 않은 좌익의 예를 꼭 민족주의 진영에서 찾더라구요. 하긴 거기까지라도 쳐주는게 어딥니까. 현 대통령을 좌파라고 말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요. 옛날부터 한줌밖에 안되었던 프로듀서들은 Mr. cellophane...(흑흑)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해 균형감각을 맞추기 위한 도서로는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정도면 충분할 듯 하네요. 그리고 그 둘의 동일한 전제를 깨기 위해서는 임지현 내지 박노자 정도라면 마뜩입니다. 

 시사저널 바뀌고 나서 딱 한 번 봤는데, 이건 fact의 문제 이전에 기사가 너무 후져요. 표지도 비호감이고...다음에서 시사저널 거리의 편집국을 클릭하세요(웃음) 06-04   

 상병 김현진 
 일섭/ 개인주의자들의 출발점은 물론 개인의 존엄성입니다. 그러나 그 존엄성은 그냥 자기 혼자서 굳게 다짐한다고 해서 지켜지는 게 아닙니다. 본래 개인주의는 압제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은 적극적으로 지켜져야 할 가치입니다. 여기서 개인주의자'도' 모일 필요성이 제기되지요. 

' 모임'이라는 것을 개인주의와 부합하지 않는 가치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십니다만, 그건 잘못된 인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보다는 아마 소위 한국의 좌파 전체에 대한 상당한 회의감을 갖고 계신 듯 하며, 그러한 감정에서 나온 '마냥 부정적인', 그래서 걔네들이 모이는 것조차 맘에 안든다고 생각하신 건지도 모르겠군요. 여튼, 그러나 모이는 것 자체는 그들이나 수구 꼴통이나, 성조기와 십자가를 든 애국자들조차도 하는 겁니다. 이는 우리가 인정하는 정치 체계에 근거하는데, 민주주의 체제가 채택하고 있는 의견 개진의 방식이 '머릿수'이기 때문이지요. 의사결정 과정에 있어서는 과반수 논리가 적용되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집단'이 개인보다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지요.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렸듯 개인주의는 적극적인 저항-정치적 참여-을 필요로 합니다. 

 또한 개인주의자는 국가를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는 일종의 울타리가 될 수 있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필요하기도 하니까요. 개인주의가 대항하는 것은 전체주의이며 따라서 개인주의자는 '국가 속에서' 전체주의적인 요소를 없애 나가려 할 겁니다. 고로, 저는 개인주의자야말로 정치적 인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주의를 탈정치화와 같은 말로 보는 순간 우리는 체제의 전횡을 묵인하는 게 될 테니까요. 06-04   

 병장 김일섭 
 현진// 제 말이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재가 있었군요. 거리에 가득 모여서 다음에 어떤 말들이 보안에 위배될까 일부러 생략시켰습니다. 다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었군요. 

 사람들이 모인다고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말은. 모인 후가 문제의 여지가 있다는 거죠. 국가를 부정한다는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니므로 PASS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제 말은 현진님이 말씀하신 적극적인 저항-정치적 참여의 "방법"을 문제삼은 것이지, 그 행동 자체를 문제삼진 않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진님이 지적하신 "모임"이란 것을 개인주의와 부합하지 않는 가치라고 보는 것이 제 견해가 아니라 "모임의 방법"을 문제 삼은 것이 제 견해라 보는 것이 맞는 듯 싶군요. 

 제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어, 제 정치성향마저 앞서 판단하시니 이거 죄송스럽군요. 

 제 말을 오해하시지 않으셨다면 개인주의를 탈정치화로 본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을텐데요. (웃음) 06-05